전우의 뒷모습
‘국군 감동 이야기 공모전’ 여섯 번째 이야기는 장려상 수상작 ‘전우의 뒷모습’입니다.
글 이웅
* 수상자의 작품을 칼럼 형식에 맞도록 수정하였습니다.
입대 전 나는 말 그대로 '온실 속의 화초'였다. 큰 어려움 한번 겪지 않고 자라 세상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였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보내며 단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화목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기대와 신뢰를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102보충대에서 모든 훈련병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27사단으로 배치를 받았다. 신병교육대 시절에도 다른 훈련병들에 비해 체력이 좋고 눈치도 빨라 요령 있게 생활하며 지냈다. 교관이나 조교들이 말하는 것을 척척해내는 이른바 'A급 병사'였다. 그런 내가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동기 상준이었다. 상준이는 운동신경이 없고 행동도 느릿느릿해서 자주 교관의 지적을 받곤 했다. 상준이 때문에 생활관 전체가 단체 기합을 받는 일도 허다했다. 나는 내 옆자리에서 어리바리하게 움직이는 상준이를 구박하거나 무시하는 말까지 쏟아냈다. 하지만 상준이는 내가 그럴 때에도 해맑게 웃으며 "미안해, 최선을 다할게"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나 또한 상준이가 언제나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생활관 동기들도 대부분 그랬다. 다만 '빨리 배치를 받아 상준이와 떨어졌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나는 휴가를 많이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27사단 이기자부대 수색대에 지원을 했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부대로 향하는 군용트럭에 올라타 보니 상준이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어리바리한 녀석이 수색대라니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나 또한 다른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색대에 도착해 건강·심리검사를 받는 동안 상준이가 '아이가 둘이나 있는 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준이는 수색대에서 열심히 생활해 휴가를 많이 받아 밖에 있는 딸들을 자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신병교육대에서 함께 고생한 정이 있어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그럼에도 힘들기로 소문난 수색대에서 상준이가 버텨 낼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그렇게 상준이와 나를 포함한 50여명의 인원은 한 달간의 수색병 교육훈련에 돌입했다. 4일 무수면 지속훈련이 시작되자 첫날부터 절반이 포기를 했다. 잠을 자지 않고 연속적으로 행군을 하는 것은 정말 체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일이었다. 나 또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상준이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같이 끝까지 버텨보자'라고 외치며 견뎌냈다. 마지막 야간 행군이 남았고 그것을 통과하면 수색병 교육은 끝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상자와 포기자는 바로 퇴소시켰기 때문에 처음의 50명 중 남아있는 동기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야간 행군, 산 정상에서 부대로 복귀하는 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얗게 내리는 눈발이 전투복과 전투화를 적시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앞에 선 동기의 전투화뿐이었다. 발은 이미 물집 투성이었지만 행군 속도는 점차 빨라지기만 했다. 고통을 견디며 부대 근처에 다다른 순간 방심한 나는 넘어지면서 발목을 접지르고 말았다. 나는 너무 아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행군을 억지로 통과해도 계속해서 힘든 훈련을 받아야 할 텐데. 그냥 포기하고 다른 부대로 갈까'. 온갖 생각들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쳤다. 번쩍이는 앰뷸런스 불빛이 보였다. 교관과 조교들이 나를 앰뷸런스에 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스로 군장을 짊어지고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된 것이 억울해 눈물이 났지만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 의무병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와 쓰러져있던 나를 일으켰다. 항상 내 뒤에서 걸었던 상준이었다. 상준이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표정으로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명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당장 일어나라는 외침과 욕설을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까닭없이 계속 눈물이 났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마웠고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입대 후 처음으로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준이는 총 끈을 바짝 매고 내 군장을 대신 멨다. 엄하기만 했던 교관과 조교들도 상준이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놀랄 틈도 없었다. 그저 소총을 목에 멘 채 다리를 질질 끌며 상준이의 뒤를 따랐다. 내가 따라 올 걸 믿는다는 듯 상준이는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때 상준이의 뒷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느릿느릿하고 어리바리한 모습이 아니었다. 부대 위병소에 이르러서야 상준이는 내 군장을 돌려주었고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행군을 마칠 수 있었다.
부대에서 이를 기특하게 여겼던 모양인지 이후 상준이와 나는 같은 중대로 배치가 되었다. 중대에 배치가 되어서도 상준이는 여전히 느릿느릿 행동했고, 나는 눈치를 보며 요령껏 생활했다. 처음에는 내가 중대의 선임과 간부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준이의 우직함과 진솔함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상준이를 따르는 후임들이 많아졌고 선임들과 간부들도 요령을 피우는 나보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상준이를 더 찾곤 했다. 나도 그런 상준이가 좋았다. 모든 것이 정반대인 우리는 2년 동안 서로에게 배우며 하나뿐인 동기로서 군 생활을 함께했다. 상준이는 전역 직전 상근예비역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보직을 변경했다면 편한 생활과 두 딸을 매일 만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걱정해 끝까지 나와 군 생활을 함께 해주었다. 당시 나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무척 힘들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마운 내 동기 어리바리 상준아!
수년이 지나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군장 두 개를 들쳐 멘 너의 등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 이 후로 나는 혼자 다짐했어. 전쟁이 나서 우리가 함께 전장에 나가 싸우게 되더라도 내가 너의 등을 지키겠다고 말이다.
이토록 뜨거운 마음을 가슴깊이 선물해줘서 정말 고맙다 내 동기야.
군 생활 중 가끔씩 두 딸의 사진을 꺼내보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구나.
가족들과 항상 화목하고 행복하고 건강하길 기도한다.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우리 조카들 맛있는 것 많이 사줄게.
사랑한다, 내 동기 이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