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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기계화 학교의 미스테리 일본 전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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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기계화 학교의 미스테리 일본 전차 -2-


1차 세계 대전 때 처음 출현하여 그 대단한 위력을 알린 전차의 시대가 서구 열강에서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을 때에도 일본은 이 신무기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뒤늦게야 프랑스와 르노 전차 1개 중대, 영국의 빅커스 C형 전차 1개 중대를 도입하여 시험 운행해보며 전차의 가능성을 배우기 시작했다,


[영국 빅커스 마크 1 C 형 전차- 포는 없고 기관총만 5정이 있다.]



1925년에 전차 개발에 착수한 일본 육군은 그들의 무기 개발이 항상 그랬듯 영국의 빅커스 C 형[?]전차를 카피했다.


1 차 세계대전 말기에 생산된 C형 전차는 89식 전차와 크기와 모양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아마 크기와 모양이 비슷했었던 빅커스 중형 마크 2를 말하는 듯하다. 이 전차는 1925년부터 1934년까지 생산되었으니까 당시로서 일본이 베낄만한 최신의 탱크였을 것이다.


여기에 나름대로의 창의력도 약간 보태서 개발한 탱크가 89식 전차다. 이 전차는 시험 제작 일호기 [試製一号戦車]라는 이름을 간단히 줄인 이고[一號)]전차로 불리기도 한다.



[빅커스 중형 전차 마크 2]


또 일본 중형 전차들에 붙이는 이름인 치로라는 별칭도 있다. 일본이 가장 많이 생산했었고 가장 많이 투입되어 파괴된 97식 중형 전차는 치하라는 이름이 있었고 후기 개발 중형 전차들에도 치헤니 치게니 하는 돌림 별칭이 있었다. 장성 기계화 학교에서는 이 전차는 89식 전차라는 이름보다 치로 전차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전차는 미쓰비시 중공업이 전차 생산 공장을 건립해서 1931년부터 생산한 일본 전차의 원조다.12.79톤의 중량에 엔진은 120 마력,주포는 포신 길이가 1 m 가 안 되는 57mm 단포신[0.85m] 직사포로서 사거리는,1,000미터였었다. 그 외에 두 정의 기관총이 있었다. 



[89식 전차]


승무원은 4명으로서 현재 60톤의 M1A1탱크와 같은 수(數)였다. 전차장이 포수 역할까지 했으나 그 좁은 포탑에서 운신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결과 스페이스 확보를 위해 포탑의 기관총은 주포와 반대편에 설치된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포를 반대로 돌려야만 기관총을 발사할 수 있는 구조였다.


89식 전차는 취역 직후 발발한 만주 사변[1931년]과 1 차 샹하이 사변에서 활약을 하였다. 상대하는 적인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의 전차 부대가 단 3개 대대밖에 없었으니 전차를 상대로 전차전을 하지 않았었고 주로 보병들의 진지를 공격하는 임무를 했었다.


89식 전차가 좀 역할을 했다는 것은 1939년 만몽 국경 지대인 노몬한에서 벌어진 소일 전투에서 였다. 소련은 이 전투에 막대한 병력과 화력을 투입해서 일본군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압도적인 소련의 기갑 부대가 참전한 전투에서 89식 전차가 육군 3전차 연대 주력으로서 야간 돌격으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작은 전과도 올리기도 하였으나 객관적으로 말하면 전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미미한 수준이었다.



[노몬한 전투[할힌골 전투]의 89식 전차대]


2 차 세계 대전 때 전장의 주역으로 출현한 미국의 M 4 전차와 소련의 T-34 전차에 비하면 89식 전차는 전장에 감히 내밀기도 거북한 일종의 코미디 수준의 빈약하고 웃기는 전차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89식 전차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남양군도 각지로 전개되었으나 실전에 겪을수록 89식의 성능은 시대에 너무도 뒤처진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었다. 89식 전차는 1942년부터 전선에서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이 전차를 호를 파서 차체는 묻고 포탑은 나오게 해 놓아 고정 포대로 쓰기도 하였다.


89식 전차가 어떻게 한 반도에 남아 있다가 장성 기계화 학교로 와서 전시되고 있는 것일까? 더구나 땅에 묻혀 있다가 발견되었고 그 발굴 사연이나 기계화 학교로 옮겨져 왔던 내력은 전혀 전해오지 않고 있다. 나에게 89식 전차에 대한 정보를 전해준 문정웅 대위가 교내의 알만한 분들에게 다 물어보았는데 알 수가 없었다고 미안해 한다.


여기에 대해서 평소 나 나름 심각하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기업체와 달리 군을 비롯하여 관공서는 소위 순환 근무라는 것을 실시하고 있다. 이런 순환 근무의 인사 제도가 장점도 있겠지만 전문성의 축적이라던가 정보의 축적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서 책임자가 바뀔 때마다 모든 것이 초기화되어 전문성은 증발해버리고 기록은 망각되어 버린다. 


결과 책임자가 바뀔 때마다 허다한 낭비와 오류를 범해야 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며 각 분야에서 더 깊은 전문성을 요구하고 있고 더 풍부한 정보를 요구하는 정보화 및 지식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 시대 순환 근무제도가 보여주는 어이없는 폐단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도 당국은 이런 것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가 보다. 이 정도의 유물이 기계화 학교에 입수되었다면 단 한 페이지의 기록이라도 만들어져 계속 전해 내려왔어야 했었다. 빈번한 인사 이동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참 여기서도 우리 관의 고질적 문제인 순환 근무 제도의 문제점을 맛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것이 현실이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또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며 연구해볼 수밖에 없었다.도대체 이 전차가 어떻게 해서 기계화 학교에 왔는가 하는 내력을 연구해보았다는 말이다..


한반도에 일본 전차가 주둔한 일이 있었던가? 

조선 반도에는 두 개의 일본군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 개 사단, 즉 19사단이 함경북도 나남에,그리고 다른 사단, 즉 20 사단이 경성[서울]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사단들에 전차 중대가 배속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내 능력의 부족이랄까 두 개 사단에 전차 중대가 있었다는 정보는 들어보지 못했다.



[기계화 학교의 89식 전차]

 - 상태가 매우 좋다.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기계화 학교에 있는 89식 전차가 조선 주둔의 두 개 사단 중 한 개 사단 소속이라면 휴전선이 막혀있으니 북한의 19 사단은 대상에서 제쳐놓고 남한 사단인 용산 주둔 20사단의 경우만 들여다 보기로 한다. 이 용산 사단의 옛 터는 현재 미8군과 전쟁 기념관이 차지하고 있다.


나는 미 8군 용산 기지의 최북단 후암동에 있는 캠프 코이너에 일본군 사단 기병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즉 후암동의 동네 어르신 분이 지금의 용산 고등학교 건너 편의 미군 부대 일대가 모두 일본군 기병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었다. 


전차 부대의 전신이 기병 부대다.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중에 기병 부대를 해체하고 이를 전차 부대로 대체한다는 정책을 취했지만 장비가 부족해서 말단 부대까지는 실행되지는 않았었다.


나는 캠프 코이너 자리에 일본 기병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동네 어르신께 전화를 해서 전차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대답은 “전차 같은 것은 못 봤 수!”였다. 그래서 장성 기계화 학교의 89식 전차가 서울에서 발견되었을 가능성은 ‘배제는 못하지만’ 아주 낮다고 생각되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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