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계곡에 돌진한 전차대 -제 3 부-
몇 개월 뒤에 이 일대에서 진지 공사가 있어서 나는 자주 국사봉 계곡[밥재 계곡]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계곡 입구 논에서 못자리 준비를 하러 나온 중년의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불현듯 이 농부에게 식현리 전차전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나이를 보니 그 전투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일대가 한미군이 보전조 공격을 한 곳 인줄을 아느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이 동네에서 살았던 토박이로서 전투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계곡 안에 가한 미군의 전차 공격에 수많은 중공군들이 이리저리 몰려 쫓겨 다니다가 몰살당하다시피 했다고 말해주었다. 그가 중공군 시체가 쌓여서 시냇물에 피가 섞여 흘렀다고 했던 말은 아직까지 귀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계곡에는 제일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아래까지 흐르는 농수로가 있었다. 겨울에도 물이 흐르는지 아닌지 모를만큼 실같은 물이 흘렀었다.
[촬영하던 날 비가 와서 시냇물이 많이 흘렀다. 옛날 시내는 이렇게 잘 정비되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미군의 전차 공격을 받았던 중공군이 이 계곡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대부분 죽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었다.
식현리의 전차 공격 때 임진강을 도강한 중공군이 국사봉 능선을 넘어 식현리 개활지로 나왔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떼죽음을 당한 줄 알았으나 그 후반 단계에서 한미 보전조에 의해서 외진 구석 같은 이 국사봉 계곡으로 몰려 집단으로 섬멸당했다는 것도 추리할 수가 있었다.
나의 근무 시절 미군이 그들 전차에게 어울리지 않은 좁은 계곡을 연습장으로 썼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옛 격전지를 연습장으로 삼아 훈련의 실감을 더해보자는 취지에서였을 것이다.
군 복무 중에 이 계곡 앞을 자주 오가며 이 식현리 전차 작전의 전투 자료를 구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었다. 불과 몇 년 전에야 식현리 전차 공격에 관련된 글을 미 군사 잡지에서 발견했다.
이 잡지 글을 내가 자주 지나 다녀서 눈에 익은 그 곳 전투 지형과 또 내가 들었던 현지 주민의 증언과 대조해보며 읽어보니 그제서야 전투의 전모가 머릿 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는 것이었다.
식현리 전투의 시작과 끝을 아래에서 지도를 참조해가며 실감 있게 설명하고자 한다. 중공군이 임진강을 도강해서 공격하자 미군 C 중대의 전차와 국군 15연대의 1개 중대가 합동해서 보전조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미 전차 부대와 한국 보병부대 이들은 공격 전 마지리 남방에 집결했다.
[지도가 좀 엉성해 보인다.
A가 중간 목표, 좌측 F가 최종 목표인국사봉.
노란 빗금이 보전조가 마지막 단계에서 공격한 국사봉 계곡 일대]
내가 만나 본 식현리 주민은 미군의 전차 부대가 계곡 남쪽 파평산 왼쪽 길에서 나타나서 공격을 개시했다고 말했었다.
이 길은 파평산의 동쪽 기슭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만들어진 길로서 법원리에서 식현리로 통하는 길이다. 길의 만곡도가 심해서 중공군이 있었던 식현리에서는 전차들이 개활지 출구로 쏟아져 나올 때까지 볼 수가 없다.
공격 개시5분 전 보전조는 파평산 동쪽 우회 도로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좌우 논으로 산개하여 오 분간 공격 준비 사격을 가했다.
그리고 정확히 15:00, 공격 개시선을 넘어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 개시선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눌노천이 가장 유력하지만 중공군의 진출이 아직 잘 진행되지 않았었더라면 더 북상한 지점인 금파리와 적성을 잇는 큰 길 대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공군의 위치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라 본 눌노천-
다리 너머 나무 뒤에서 한미 보전조가 공격을 개시했다.오른 쪽 후방은 파평산 기슭이다.]
중간 목표인 128고지는 전차 2개 소대와 보병 2개 소대가 공격하고 나머지 2개 보전 소대는 계곡으로 더 들어가 최종 목표 높이150미터의 국사봉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계곡 속에 중공군의 주력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중간 목표는 손쉽게 점령되었다. 공격은 한 시간 반 동안이나 했다고 했는데 이 동안 식현리 앞을 지나는 금파리-적성 도로에서 횡대로 정차해서 포탑을 우측으로 돌리고 집중 사격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적은 박격포와 소화기를 동원해서 완강하게 저항했다.개활지에서 전차포 사격을 피해서 살아남았던 중공군들은 계곡 안으로 밀려 들어와 배후 국사봉 주변 민둥 산 능선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전차포 사정 거리인 계곡 양쪽 민둥산에서 저항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생존한 중공군들은 점점 기억 자로 구부러져가는 계곡 안쪽으로 밀려서 후퇴했으나 미 전차들은 한국군 보병의 지원을 받으며 국사봉 계곡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코너에 밀린 중공군들은 오던 길로 되돌아가 계곡과 임진강 사이 능선에 붙어서 저항했다. 이 능선에 올라가보면 바로 아래에서 동쪽 전곡 쪽에서 흘러나와 서쪽 고랑포 쪽으로 지나가는 임진강의 시원한 전경이 한 눈에 보인다.
공격할 때는 봄철이어서 천수답인 계곡의 논에는 물이 없었다. 2개 소대의 전차들은 계단식 논에 횡대로 전개하여 사격과 기동을 되풀이 하며 계곡 깊숙이 진격했다. 이렇게 좁은 산간 계곡에 10량 정도의 전차를 투입하는 것은 전례가 없었던 곳이다. 사실 현장을 가서 보면 보병 일개 중대 규모의 전력을 공격 대형으로 전개하면 꼭 어울리는 장소였다
중공군들은 전차가 접근하지 못할 높은 국사봉 정상 언저리와 임진강 능선에 붙어 사격을 했기에 전투가 한 시간 반이나 계속 되었다.
능선에 중공군이 붙어서 저항을 계속하자 미 전차 중대장은 전차 일개 소대와 보병 일개 소대를 직접 지휘하여 국사봉 계곡과 128고지의 계곡 사이로 난 접근 소로를 타고 밥재를 넘어가 임진강으로 우회 돌진하였다.
결과는 중공군 배후 후퇴로의 차단이었다. 중공군의 등뒤에서 공격하는 묘수였다.
[계곡 입구 농경지]
공격 개시 전 소로의 오른쪽 128고지를 왼쪽의 국사봉과 함께 점령 목표로 삼은 것은 임진강으로 내려가는 소로를 확보 해놓고 기회가 되면 임진강으로 뚫고 넘어가 중공군의 배후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배후를 치는 기동으로 중공군은 별수없이 와해되어 산맥을 타고 서쪽 하류 고랑포 쪽으로 도주하거나 일부는 강에 뛰어 들어 도강을 시도했으나 전차에서 발사하는 무수한 포탄과 실탄에 사살당했다.
이 전투에서 파괴된 미군 전차는 한량도 없었고 한국군 보병 두명만 가벼운 부상만 입었을 뿐이다.장갑 보호가 된 미군 전차가 잘 하고 있는데 국군 보병이 사상자를 내가며 일선 돌격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격전지 2킬로 미터 지점에 있는 파평 윤씨의 시조가 태어난 용연 [龍淵]
- 전장과 어울리지 않은 평화로운 임진강 유역 명소 전경이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