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로 무장한 미 북군 최강여단 -1-
미국이 남북으로 나뉘어져서 싸웠던 남북 전쟁 시기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이끌던 북군의 최정예 부대의 하나로 ‘번개 여단’ 또는 ‘도끼 여단’이라는 별칭을 가진 부대가 있었다.
[도끼여단]
이 여단은 현대의 특수 부대나 레인저 부대처럼 우수한 인재를 선출해서 특별 훈련을 시킨 부대도 아니고 지휘관도 최고의 군사 엘리트 코스를 거친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나자 자원한 의용군들이었고 지휘관은 전쟁 전에 철공소 사장을 하던 기업인이었다. 최정예의 반열에 들 수 있는 부대의 큰 전공들은 오로지 창의력과 인화력이 뛰어난 지휘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단결했었던 아마추어 부대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이 번개 여단은 기본적으로 보병이었다. 그러나 모두 말을 타고 이동하는 ‘승마 보병’이라는 독특한 편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마 부대였지만 기능은 보통 기병과 분명히 달라서 말은 이동할 때만 사용했었다.
기병의 기본 장비라고 할 수 있는 개인 화기와 기병 군도 선택에서 번개 여단은 독특한 창의성을 보였다. 여단은 기병 군도를 채택하지 않고 긴 손잡이가 달린 벌목용 도끼를 기본 장비로 채택했었다. 기병 5,000년 역사에서 없었던 기발한 무장이었다.
다른 주력 무장인 개인 화기 선택에서 더욱 그 창의력이 빛나 보인다. 당시 남북군의 기본 화기는 단발총이었다. 번개 여단은 파격적으로 그 시기 막 탄생한 연발총을 부대 개인 화기로 도입하였다.
도끼와 연발총을 기본 무장으로 하는 독특한 부대를 창설해서 미 남북전쟁에서 대활약을 했었던 사람의 이름은 존 토마스 와일더[1830-1917]였다.
[존 T. 와일더]
그는 뉴욕 주의 산골 캣스킬 마을에서 태어났다. 19살이 되어 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는 부모로부터 자립하여 무일푼으로 서부로 떠났다. 와일더는 오하이오 콜럼버스로 흘러가 그 곳의 한 철공소에서 견습공 일자리를 얻어 열심히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8년간 충분히 경험을 쌓은 그는 1857년, 인디아나 주 그린스버그로 이동해서 자신만의 철공소를 오픈했다. 이곳에서 그는 각종 철물 도구를 만들어 팔았는데 특히 물레방아 제작에 관해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해서 물레방아와 제분기계 등을 잘 만드는 전문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 때 방앗간은 모두 수력(水力)을 사용하던 때라 물레방아 시장의 수요가 컸었다. 그는 창의력이 뛰어나서 1859년 그가 특허를 낸 물레방아의 우수함으로 그를 이 업계의 최고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와일더의 사업은 나날이 발전해나갔다.
[미국 물레방아]
1861년 4월 6일 남북 전쟁이 터졌다. 와일더는 궐기하여 그린스버그 지역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원래 그의 계획은 포병 1개 포대를 편성해서 참전할 예정이었다. 와일더는 자비로 자기 철공소에서 두 문의 6파운드 포를 제작했다.
그는 준비가 갖추어지자 북군에 정규군으로의 편입을 청원했으나 북군은 포병으로 참전하겠다는 그의 청원을 거절했다. 편제상 포병들은 충분히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와일더에게 정규군 대위 계급을 부여하여 임관시키고 그의 부대는 보병으로 북군에 편입시켰다. 그의 부대는 제17인디애나 의용군 연대 A 중대가 되었다. 비록 보병 부대가 되었으나 와일더 대위는 자기가 만든 포 두 문을 가지고 출동하였다.
얼마 후 의용군 연대는 주력 전장인 버지니아로 이동하였다. 버지니아에서 그의 A 중대는 연대에서 분리되어 나중에 26포대로서 재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경포병 부대는 부대 원조인 와일더의 이름을 따서 와일더 포대라는 애칭을 전쟁동안 유지하였다.
1861년 6월 4일, 와일더는 17인디애나 연대의 중령으로 진급이 되었고 그 다음 해인 1862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17인디애나 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남북전쟁]
와일더는 그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천부적인 능력의 연대장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1862년 켄터키주 문포드빌의 철도역을 공격해온 남군의 대공세를 격퇴한 전투가 이 기간의 전투로 유명하다. 그의 연대는 특히 툴라호마 전역에서 신속한 기동과 기습으로 대승을 거두어 그와 그의 이름을 전군에 알렸었다.
1963년 대령으로 승진된 와일더는 인디애나 연대와 일리노이 연대들로 편성된 보병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 직후 대공세를 가하고 퇴각하는 남군의 모간 장군 군단을 도보로 추격하는 대작전을 전개했었으나 실패했었다.
와일더는 기동력의 필요를 절감하고 그의 보병을 승마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와일더는 원래 한 전투에서 군수품 수레를 끄는 노새들을 징발하여 보병을 승마 기동시켰는데 이 엉성한 기마대로 이룬 성과가 상당히 컸었다.
[남북 전쟁 수송대- 대개 힘 좋은 노새들이 끌었었다.]
여기서 그는 한 확신을 얻은 듯하다. 1863년 1월, 그는 그의 보병 부대가 말로 이동하는 “승마 보병” 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안하고 그 아이디어를 북군 참모총장 그란트 장군의 승인을 받았다.
기병은 항상 말 위에서 이동하고 전투하지만 그의 기마 보병은 이동만 기마로 하고 전투는 하마[下馬]하여 도보로 하는 개념이었다. 그는 필요한 말을 테네시 주민들의 기증으로 충당하였다. 3월까지 충분한 말을 구한 그의 여단은 모두 승마 보병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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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의 상징인 발도(拔刀)돌격, 즉 강습을 하지 않고 하마 전투만 전문으로 했었던 기병대가 그 후의 역사에 나타난다. 러일 전쟁 때 일본군 기병 여단장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 好古]소장은 훨씬 강했던 러시아 코사크 기병대와 정면 대결을 피하고 이동은 기병으로 하되 전투는 통상 보병과 같이 구축한 진지에서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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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