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부터 국군 창설까지, 유동열 선생 일대기
▲ 유동열 선생의 모습
(출처 : 국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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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민족의 격동기를 보내면서도 오로지 애국의 길만 걸었던 선열들이 있습니다. 유동열 선생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한국 광복군 참모총장, 미군정 초대 통위부장(현 국방부 장관) 등을 거치며 국군 건립에 크게 이바지한 유동열 선생의 일대기를 소개합니다.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항일운동 펼친 독립운동가
유동열 선생은 1879년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04년 대한제국 육군 기병참위로 임관해 무관학교 교관, 참모국 제2과장 등을 지낸 군인이었습니다. 유동열 선생은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안창호, 이상재,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는 일제 침탈을 결사 반대하는 격문을 띄우거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등의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펼쳤습니다. 영화 ‘암살’에서처럼 노백린, 이동휘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해 친일파 대신의 암살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으로 망명한 유동열 선생은 1911년 ‘105인 사건(일제가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해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잡아들였던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1년 여 만에 출감한 그는 만주로 망명해 1919년 안창호, 김좌진, 이승만, 김규식 등과 함께 무오년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는 등 항일독립투쟁을 이어나갔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일하던 유동열 선생은 1938년 고려혁명당 간부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평소 임시정부 추진세력들에게 신망이 높았던 그는 한성임시정부 참모부총장, 노령 대한국민회의 참모총장,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 광복군 참모총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회 모습. 오른쪽 끝이 유동열 선생. 좌측 끛에는 김규식과 김구 선생의 모습도 보인다.
(출처 : 위키피디아)
미 군정 통위부장으로서 국군 창설에 기여하다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온 유동열 선생은 이제 건국을 위해 매진했습니다. 그는 1946년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미 군정청 통위부장을 역임하며 우리 국군의 모태가 된 조선국방경비대 창설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48년 5·10 총선거 전후로 통위부는 경비대를 5만명 수준으로 확장시키는 증강 계획을 추진합니다. 건군을 준비한 것입니다.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유동열 선생은 이범석 초대 국방부장관에게 국방 관련 업무를 이양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범석 장관에게 “심·덕·체를 하나로 조국의 재건과 방위에 중추가 돼 달라”고 당부했다고 전합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광복 후에는 건국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유동열 선생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안타깝게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습니다. 74세의 고령으로 북쪽으로 끌려가던 유동열 선생은 고향 마을이 가까운 평안북도 희천의 한 농가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1989년 대한민국 정부는 유동열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유 선생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수차례 선정해 그의 업적과 유공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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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독립운동과 건국에 크게 기여한 유동열 선생의 일대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오로지 조국의 안녕만을 걱정했습니다. 유 선생과 같은 선열들의 뼈를 깎는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