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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호’의 ‘수석총 [燧石銃]’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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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호’의 ‘수석총 [燧石銃]’  -5-


중국은 뇌관이 발명된 지 30년이 안 되는 1850년대에 뇌관을 국산화하였다. 상당히 빠른 국산화였다.이후 이 중국식 뇌관총에 관한 기록들이 조선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최초로 중국 뇌관총 자취가 보이는 것은 1872년 압록강 건너 파견한 조선의 염탐꾼들이 관에 올린 정찰 보고서에서 부터였다. 


아직 중국의 통제력이 미약하던 압록강 이북은 소위 호인[湖人] 이라고 불리는 여진족과 조선인, 중국인들의 영역이었다. 이들은 주로 가을의 추수철이 되면 무리로 조선 땅에 침입해 노략질을 해대서 조선 조정과 국경 지대 조선인들은 골치를 앓았었다. 



[압록강 후창 - 1988년 김일성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김형직군으로 개명]


1872년, 그 전해 가을에 도강한 호인들과 큰 전투를 한 압록강 옆 후창 군수[조장현]는 그 해 5월 30일, 호인들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최종범, 김태흥,임석근 세 명의 정보원을 압록강 너머로 파견하였다. 정보원들은 한 달 반 후인 그 해 7월 15일 무사히 돌아와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한양 조정에까지 보내졌다. 이 보고서는 후에 규장각에서 발견되어 강북일기[江北日記]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압록강 상류 –일제 시대 상류]


우리나라 북방의 여러 역사 정보가 보여주는 이 책에서 호인들 지역의 무장 규모를 보여주는 두 번의 정보 보고가 있다. 그 내용들을 먼저 보자.



[강북일기]


첫 번째 기록 정보다.

6월 3일 혈암평 지역 실력자며 회두[촌장]신태의 집에서 본 지역 기록이다. 책자에서 신태 휘하 지역의 무장 수준이 호총[胡銃]85정, 대총[大銃]20정. 우리나라 조총[鳥銃]48정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대총은 앞에서 소개한 징겔포다.]


두 번째로 기록된 정보다.

6월 8일 지역 실력자며 귀화자인 김여옥의 집에 들려 조사한 지역 군세에, 호총[胡銃]이 216정, 대총[大銃]이 20정, 조총[鳥銃]이 73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고자가 총기들을 분명히 구분해놓은 것이 시선을 끈다. 먼저 대총이라는 대형총[앞에서 소개 –징겔포]을 다량으로 보유한 것이 이 총이 마을 방어를 위해서 필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형총인 대총을 제외하고 두 가지 총기를 그 출신 국가를 따져 조선총과 호총[중국총]으로 나누어서 보고하고 있는 사실에 주시해보자. 이 보고서는 조총이 우리나라 총이라는 사실을 특기하여 그 출신을 밝히고 있다.


조총이란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화승총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말하는 조총도 틀림없는 화승총이리라. 그 화승총과 다른 명칭을 사용하는 중국총은 구조나 성능이 달랐기에 따로 구분했을 것이며 그것은 당시 뇌관이 일반화 된 중국에서 제조한 뇌관식 소총일 것이라는 강력한 심증이 간다. 특기 사항은 조선의 조총보다도 호총이라는 뇌관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이 보고서가 있기 1년 전인 1971년에 신미양요가 있었다. 미 해병과 수병들의 혼성 기습대는 강화도 광성보를 강습해서 어재연이 지휘하는 조선 수비대를 궤멸시켰다. 미 함대에 전속 사진사가 배속되어서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겼는데 이 중에 미군이 노획한 조선군의 무기들은

촬영한 사진도 있다. 모두 화승총으로서 뇌관총이 아직 조선에 들어오지 않은 사실을 말해준다.

    

뇌관의 한국 유입에 대해 다른 사례를 찾아보자. 뇌관만의 조선 국내 등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한 폭탄 테러에서였다. 국내 최초의 폭탄 테러일 가능성이 있다. 


1974년 11월 명성황후의 [가문 입양]오빠였으며 실세였던 민승호가 정적 대원군이 보낸 것으로 보이는 궤짝을 열다가 폭발해서 그와 아들, 그리고 어머니가 죽었다. 그는 이 보물로 위장된 궤짝을 암살자가 위장한 스님이 알려 준대로 열쇠로 열다가 폭발했다. 사람도 죽었지만 집에 화재가 발생했었다.



[대원군]


사건을 살펴 보건데 당시의 화약인 흑색화약에 뇌관 격발 장치가 된 폭탄이었던 듯하다. 그 때는 대원군이 겁 없이 미군과 전투를 한 신미양요가 지나고 꼭 삼 년 뒤의 일이었다. 


조선이 서양의 문명과 담쌓고 살던 때다. 서울의 권문 세도가 중에 서양에 뇌관이라는 것이 있었고 이것이 암살용 폭탄에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만큼 깬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일부 관군은 고종이 신식 서양의 탄약식 라이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이런 뇌관총으로 무장했었고 1880-90년대에는 민간 포수들도 이 뇌관총을 사용했었다.


1890년대초 동학란 직전, 황해도의 인망높던 안 태훈 진사를 방문했던 김구선생은 안태훈 진사의 아들 안중근 [의사]이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똠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가지고 사냥 나가는 장면을 회고했었다. 그 똠방총이 화승총보다 총신이 짧은 뇌관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흰옷 차림의 포수가 들고 있는 총이 뇌관총이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진이 얼마 전 KBS에 방영한 프로에서 보였다. 프로의 핵심은 1896년 추정 호랑이에 영국제 쌍발총을 들고 죽은 호랑이등에 올라 탄 상투쟁이 한국인 포수 사진의 정체를 쫓는 것이 줄거리였다.이 의문의 사람이 1903년 추정. 일본 영국 공사관 무관 포드 바클레이가 진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할 때 찍은 사진에서 뇌관총을 들고 나온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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