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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호’의 ‘수석총 [燧石銃]’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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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대호’의 ‘수석총 [燧石銃]’  -9-


화승총 시대에 머무르던 근세 조선 군의 무기체계는 임오군란 직전 일본에서 대거 도입했었던 잉여 무기로 크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사쓰마 [薩摩藩-가고시마 현], 조슈 [長州藩-야마구치 현],두 서남번이 주축이 되고 시코쿠[四國]의 도사[土佐藩-고치 현]가 연합하여 도쿠가와 막부에 대항하던 반군 부대는 교토의 일왕[日王]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 관군[官軍]이라는 정통성의 명칭을 부여 받았으며 역적인 막부를 토벌하라는 대명도 받아냈다.


1868년 12월, 사쓰 조 연합군은 도쿠카와 막부와 그에 협력하는 동맹군을 타도하는 전쟁을 벌여 다음 해 1869년, 이들을 패망시키고 사쓰 조 번벌[藩閥]들이 주도하는 메이지 정부를 세웠다. 이것이 보신전쟁 [戊辰戰爭,-무진전쟁]이며, 결과로 부국강병 정책을 목표로 내세운 메이지 정부가 성립되었다.


[보신전쟁 때 사쓰마 죠수 번병[藩兵]들의 군복- 거의 서양 군대 복식화했다.]



300년 가까이 집권하다가 졸지에 역적이 되어 토벌당한 도쿠카와 막부 군은 프랑스와 관계가 돈독했었기에 상대적 구식인 프랑스제 미니에 전장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1851년 개발된 프랑스 미니에 소총]


도쿠카와의 동맹군들, 아이즈 번이나, 나가오카 번들은  미국제나 유럽제의 최신 무기들을 도입하기도 하였으나 소량이었고 전장총들이 여전히 도쿠카와나 동맹군들의 주력 총기였다.



[막부군이 사용하던 미국제 7연발 스펜서 카빈]


그러나 사쓰마를 비롯한 관군들은 무기인 독일제 게베르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이 신식총은 전투의 양상을 바꾸어 버린 혁명적인 디자인을 담고 있다. 이 게베르 총에 대한 설명부터 해본다.


 [게베르 총 –드레이스 총[단발]]


독일 게베르 총의 탄약은 뇌관식과 탄약식의 중간 형태로서 탄두와 뇌관이 같이 합체된 것을 왁스 먹인 종이로 만든 손가락 마디만한 화약의 튜브 앞에 묶은 형인데 탄두 뒤에 뇌관이 있어서 대침 같은 긴 대바늘 공이가 화약 튜브를 먼저 관통하고 뇌관을 때리는 형태다. 


[종이 탄피의 게베르 실탄. 뇌관이 탄두 바로 밑에 같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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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베르[gewehr]는 독일어로 라이플이라는 말이지만 본래의 독일어 명칭 Zündnadelgewehr의 끝부분 약자이기도 하다. 본래의 뜻은 ‘대바늘 총-needle gun”이라는 뜻이다. 게베르 총은 발명자 드레이스의 이름을 따서 드레이스 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게베르 총은 그때까지 병기계의 대세인 총구[銃口]에 화약을 붓고 총탄을 장진하는 전장총[前裝銃]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반대로 총미[銃尾]에 탄약을 장전하는 후장총[後裝銃]의 독특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프러시아의 게베르 총은 당시 보병의 전술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총구에 화약과 실탄을 장진 하기 위해서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투 상황에서도 죽음의 위협을 감수하며 뻣뻣하게 서서 장진해야하는 전장총[前裝銃]의 시대를 마감시킨 최초의 후장총[後裝銃]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언하자면 게베르 총은 총구에 화약과 실탄을 장전할 필요가 없어 피탄의 가능성이 큰 서서 쏴 자세를 취하지 않고 더 안전하게 엎드려 쏴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이는 병사들의 생존성을 크게 해서 병사들의 생존율과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가 있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 워터루 전투 – 병사들이 모두 서서 사격을 하고 있다.]


프러시아의 게베르 총은 1841년에 제식 승인되어 1849년에 실전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이 총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전쟁의 분수령이 된 1866 년 7월 3 일에 있었던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프러시아 군이 승리를 거머쥐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게베르 총은 실전에 사용하면서 여러 문제점들을 드러냈지만 창의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어서 그 특성을 살린 개발이 1856년 프랑스의 샤스포 총과 1871년 모젤 71 총으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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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제 11mm 샤스포 소총 –근대 볼트 액션 소총의 원조며 단발이다

드레이스 총, 즉 게베르 총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났다.]



막부군 타도의 주역인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는 도자기 수출[조선 도공들의 후예들이 제작], 오키나와[사쓰마가 지배]생산 설탕 판매, 샹하이와 남양과의 밀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서남[西南]의 웅번[雄藩]’으로 불렸다. 


그들은 유럽의 무기 상인들이 극동에 소개한 게베르 총의 전술적 효율성에 주목했다. 1862년 사쓰마는 거액을 지출해서 다량의 게베르 총을 수입하여 군대 무장을 혁신하고 보유했었던 구식 소총들은 염가로 다른 번에 처분해버렸다. 



[사쓰마 도자기- 납치해간 조선 도공들의 후예가 만든 작품들. 유럽 상인들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중국의 도자기 생산이 제대로 되지 않자 일본으로 몰려와서 사쓰마나 조슈의 금고를 불려주었다.]



일본 역사의 근세사 기록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 사쓰 조 연합군이 프랑스제 미니에 전장총으로 무장한 막부군과 동맹군을 무찌른 무진 전쟁에서 올린 승리의 한 원인을 사쓰 조 연합군이 사용했던 게베르 총과 그 후속타인 영국제 스나이더 총등,후장총의 성능으로 돌린다. 프랑스에서 미니에 총은 1867년 후장총으로 개조가 되었으나 그 직후인 보신 전쟁 중의 일본 막부군에 미처 공급되지 못한 듯하다.


[스나이더-엔필드 소총으로 개조하기 전의 영국 전장총. 1851 엔필드 소총]



전쟁이 진행되면서 열세에 몰린 도쿠카와 막부와 동맹 번들도 최신 무기의 도입를 추진했었다. 요코하마를 통해서 주로 남북전쟁이 끝나고 잉여 무기가 넘쳐 나던 미국의 첨단 무기들,개틀링 기관총, 스펜서 카빈,콜트 권총들이 도입되었고 나가사키를 통해서 영국제 엔필드나 스나이더 ,또는 독일제 게베르, 프랑스제 샤스포 같은 총들도 도입되었으나 각 번의 재정 상태가 열악했었던 형편으로 각 번에서 입수한 이런 최신 무기들은 소량이었다. 도쿠카와 막부군도 이런 현대식 총기를 수 만 정이나 구입하려던 의욕이 있었고 협상도 했었으나 경제적 능력이 되지를 못했었다.


보신 전쟁이 끝났지만 신 메이지 정부군의 총기 개발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일본 게베르 총의 후속타가 영국제 스나이더 총이다.스나이더 총은 영국제로서 정식 명칙은 스나이더- 엔필드 총[스나이더 총으로 약칭]이다. 전장식 뇌관총인 1853년식 엔필드 총을 사용하던 영국은 독일과 [드레이스 총] 프랑스에서 [샤스포 총]잇따라 후장총이 등장한 상황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미국의 제이콥 스나이더가 엔필드 소총의 격발 장치만 바꾸면 총미에서 탄약을 장전 발사하는 후장식 총으로 개조하는 격발 장치를 개발했다. 영국은 이 장치를 검토해보고 1866년에 정식으로 제식으로 채택했다. 엔필드 소총을 개조하면서 총기 명칭도 스나이더-엔필드 소총으로 변경했다. [스나이더 총으로 약칭]스나이더 소총은 짧은 동안 사용되다가 1974년 더 성능이 우수한 마티니 헨리 소총에 자리를 내주었다.


[개조된 스나이더- 엔필드 [단발식]]


후장총 드레이스 총를 도입했던 사쓰마는 1867년 보신 전쟁중에 개조한 스나이더 총을 급히 도입해서 끝까지 저항하던 도쿠카와 동맹군을 토벌할 때 사용하였다. 스나이더 소총의 구경은 영국식으로 577구경이었다. 게베르는 독일식 구경은 15.4mm 였다.모두 단발총이었다.


[일본 내전, 보신 전쟁중에 사용되었던 스나이더 총]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고 폐번치현[廢藩置縣]의 중앙집권적 정책이 실시되자 난립하던 번들이 없어지자 각 번들이 소유했던 잡다하고 엄청난 무기들이 중앙 메이지 정부에 접수되었다


스나이더는 정권을 잡은 번벌들의 메이지 정부군이 프랑스제 샤스포 총, 미군의 스펜서 연발총등과 함께 제식 총으로 채택되어 30식 보병총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이 제식명은 러일 전쟁 때 일본군의 제식 소총 30년식 아리사카 총과 혼동되기 좋은 이름이다.


일본 군부는 문을 닫은 번들로부터 회수했었던 총중에는 스나이더로 개조하기 전의 구식 엔필드 뇌관총도 많았었다. 메이지 정부나 군의 관계 기관들은 예산과 기회가 되면 틈 나는대로 이들 구식 엔필드 소총을 스나이더 소총으로 개조했었다.


1878년, 엔필드 소총을 스나이더 소총으로 개조하는데 3원 30전이 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간헐적이지만 꾸준한 개조가 있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엔필드, 소총의 스나이더 총 개조는 소규모로 진행되어 오다가 1879년 정부 주도로 대대적인 개조 사업이 있었다. 


그러나 이 스나이더에는 후장총이고 탄약식 소총이라는 장점이 있었지만 구식 뇌관식 총을 개조했었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있었다. 제일 큰 문제는 명중률이 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무라타 13년 식 11mm총]


[1874. 프랑스 M 80그라스 총,샤스포 총의 종이 탄피 탄약을 동피 탄약으로 바꾼 총.이 총을 모델로 해서 일본 무라타 13년 식 소총이 개발이 되었다.]


[무라타 육군 소장 –사쓰마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총에 관심이 많았었고 사격의 명수였었다.]


일본의 스나이더 소총은 10년 이상 제식 총으로 사용되다가 1880년 유럽에 총기 제조 유학을 다녀온 무라타 [村田 経芳] 가 프랑스의 그라스 총[종이 탄약 샤스포 총을 동피 탄약 총으로 개량한 것]을 모방한 메이지 13년 식 11mm 볼트 액션 단발 소총을 개발한 뒤에 점차 퇴역하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이 스나이더 총은 2선 군대에서 청일 전쟁까지 사용되었다.


[일본 최초의 무연화약 무라타 22년 식 8mm라이플[5 연발총]]


메이지13년식 단발총은 나중에 5 연발 22년 식 8mm 무라타 총까지로 변신했었다. 8mm 무라다 총은 일본 최초의 무연화약 총이기도 하였다.일본 정규군은 이 총으로 총기 단일화를 해서 청일전쟁에서 잡다한 무기로 무장한 청군과 싸워 이겼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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