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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에서 어뢰 공격을 한 생존 일본 조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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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에서 어뢰 공격을 한 생존 일본 조종사



[과달카날 상륙 지점 함선에 가하는 1식 육상 공격기들의 육박. 공격. 

멀리 과달카날 섬의 산들이 보인다. 원 안의 선두기가 다카바야시 비행 병조가 모는 육공기다.]


위의 사진은 1942년 8월 8일 과달카날 상륙 작전에서 군수품을 양륙하는 미 수송선과 호위함들에게 돌격하는 일본 해군 1식 육상 공격기[陸攻機] 편대들의 뇌격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 육공기들의 초저공 비행과 치열한 미군 함대 대공포화가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미군은 1941년 8월 7일, 이 뇌격 출격의 전날 태평양 전쟁 최초의 본격적인 반격 작전으로서 무방비 상태였던 과달카날을 공격하였다.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던 일본 해군 공병대는 별 저항도 못하고 밀림으로 도망쳤고 미 해병대는 상륙에 성공하였다. 일본군이 거의 완공했었던 비행장은 미군에 의해서 헨더슨 비행장이라는 이름이 주어지고 과달카날 점령 작전에 십분 활용되었다.


미군의 기습적인 상륙작전이 있자 크게 놀란 라바울의 일본 해군 항공대는 제로 전투기들의 호위를 붙인 1식 육공기 편대들을 과달카날로 출격시켰다. 육공기들은 폭장 [爆裝-폭탄 무장]을 하고 이륙했다. 이날의 출격 거리는 당시에 일본군이 경험해보지 못한 최장거리였다. 단발기인 제로 전투기들로서는 극한의 출격거리였다. 


과달카날 상공에 도달한 육공기들은 상륙 작전을 하는 미 해군 선단과 함대를 폭격하였으나 극히 저조한 명중률을 보였다. 폭탄보다 어뢰가 훨씬 적합하다고 판단한 일본 해군은 다음 날인 1941년 8월8일 어뢰로 무장[雷裝] 한 육공기편대를 과달카날로 출격시켰다. 


위의 사진은 이날 8월 8일 과달카날 연안에서 미 해군에 육박하는 일본 육공기 편대들의 뇌격 장면을 촬영한 것이었다.


일본의 격추왕 사카이 사부로는 첫날 육공기 편대를 호위하는 제로기 조종사로서 미 해군기와 공중전을 하다가 피격당했다. 머리에 파편상을 입어 눈 하나가 멀고 반신이 일시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으나 다섯 시간에 걸친 필사적 귀환 비행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는 그의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 에서 과달카날에 출격한 육공기들이 투하한 폭탄들의 불량한 명중률을 지적하며 어뢰 공격을 했었더라면 훨씬 큰 전과를 거둘 뻔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일본 해군 항공대도 같은 판단을 하고 뇌장을 한 공격기를 파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카이 사부로 [坂正 三郞] 64기 격추의 베테랑. 

60기 격추 후 과달카날 전투에서 애꾸눈이 되었으나 유황도 전투 등지에서 4기를 더 격추하였다.]


이 뇌격 장면은 그 전해 말라야 해에서 일본 해군의 1식 육공기 항공대가 영국 전함 프린스 어브 웨일스와 리펄스 함들에 쇄도하여 침몰시켰던 장면을 연상하게 하였다. 


[좌측에 폭격과 뇌격을 받은 영 전함 프린스 어브 웨일스와 리펄스가 연기를 뿜으며 대피 기동을 하고 있다. 앞은 영국 구축함 에섹스의 급변침 모습]


그러나 이날 과달카날의 미 해군들은 전날의 일본군 공습에 놀라 조밀한 대공포 방어망을 구성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불의 비처럼 쏘아 올리는 미 해군의 대공포화는 영국 함대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좌측 선두 수면에 바짝 붙어서 비행한 육공기 한 기만 빼고 모두 격추되었다. 이날 기적적으로 살아 남아서 라바울로 귀환했었던 육공기의 조종사는 20살의 다카바야시 준 비행병조였다.


[다카바야시 준 비행병조. 6척의 장신이었다. 

일 해군에서 조종사들만 머리를 기르도록 허용되었었다. 

격한 공중전의 경우 머리에 가해지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조처라고 한다.]


그는 이 과달카날 전투에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태평양 전쟁내내 계속되는 위험한 출격에서도 생존했었고 2016년인 지금까지도 생존해있다. 1922년생인 다카바야시는 나중에 이 충격적인 공격 장면의 사진에 관한 TV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뇌격의 성공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1,000미터 내로 육박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건 아주 위험한 접근을 말하는 것이었기에 육공기들은 수면 5미터 상공을 비행하여야 했습니다. 이 높이는 미군 함선의 대공포가 설치 된 덱크의 높이와 같기에 대공화기가 항공기를 쏠 수 없는 사각 지대였어요.”


말이 쉽지 해면 5미터 상의 초저공을 나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이었다. 쉬지 않고 상하 요동하는 공격기의 조종간을 찰나의 방심으로 미세하게라도 잘못 움직였다면 기수는 해면으로 처박힐 수밖에 없다.


[1식 육공기가 어뢰를 발사하는 순간]


다카바야시는 1922년생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던 1941년 일본 해군 항공학교인 조카렌[豫科練-海軍 飛行予科 練習生]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고 폭격기 조종사가 되었다. 조종사가 되는 것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었다. 


그는 태평양 항공전이 피크에 달했던 1942-43년에 남양에서 작전한 40개의 항공대에서 생존했던 두 기의 육공기 조종사 중의 한 명이었다.


일본 본토로 돌아온 그는 가미카제 특공대에 편성되어 오키나와 작전에 출격을 자원했었다. 그는 명받은 출격일, 출격을 위한 의식을 치루고 마지막으로 작별의 냉수 한 잔까지 마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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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무사들은 맑은 물이 영혼을 맑게 해준다고 믿는다.

출격 직전이나 자결 전에 이 물 한잔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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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특공기 탑승 직전 출격이 취소되어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그는 가미카제 특공대신 단기로 출격하는 특수 출격만 했었다. 그의 육공기도 항공기들이 다 파괴되어 버린 이 마지막 항공대에서 유일한 생존기였다.


전후 그는 민간 항공 인재 육성에 뛰어들어 비행 교관으로서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적십자를 위한 구호 비행에도 봉사했었고 아직도 그라이더 견인기의 조종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다카바야시는 2014년 가장 나이 많은 현역 민간 상업용기 조종사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다카바야시 동체에 그의 나이가 써있다.]


30여년 전 그가 환갑이 되던 해에 축적한 비행 시간은 25,500시간이었다. 거의 3년간이나 하늘에 떠서 쉬지 않고 비행했다는 것이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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