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자동소총 사수의 영웅적인 최후
지금은 국군 편제에서 사라졌지만 보병 편제에 자동소총[AR로 더 잘 알려짐]이 있었다. 총기의 천재 브라우닝이 발명했다고 해서 BAR[BROWNING AUTOMATIC RIFLE]로도 불린다.
[자동소총—Browning Automatic Rifle]
탄창에 단 20발 밖에 장탄되지 않았지만 자동 사격이 가능해서 분대의 중심 화기 역할을 했었다. M1 소총 시절 소총 분대마다 한 정씩 장비되었었다. 국군 장병들 사이에서는 너무 무겁고 분해 결합이 어려워서 별다른 인기는 없었다. 그러나 자동소총은 1차 세계 대전 때 처음으로 탄생하여 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월남전까지 겪은 롱 런 무기다.
[오키나와 전선에서 공격을 선도하는 자동소총 사수]
이 자동화기가 전쟁사에 남긴 감동적이거나 영웅적인 스토리는 아주 드물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한 미군 병사가 이 자동소총으로 영웅적인 전투를 전개해서 전우들의 철수를 지원하고 자기는 장렬한 최후를 맞은 일화가 존재한다. 미 의회는 그에게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 영웅은 이곳 한반도 국민들에게 다소 생소한 하와이 원주민으로서 오아후 섬 출신이다. 이름은 허버트 카이리에하 필리라아우다.[1928년 10월 10일 -1951년 9월 17일]
[필리라아우]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필리라아우는 징집되어 훈련을 받고 1951년 3월에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한국 전선에 도착한 그는 미 2사단 23연대 C 중대에 배속을 받았다. 그는 남들이 싫어하는 자동소총 사수직을 자원하였다.
[단장의 능선]
1951년 8월, 필리라아우는 한국 동부지역에 있는 피의 능선 전투에 참여하였다. 피의 능선 전투는 미군이 국군 5사단과 함께 수행했었던 전투로서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3일까지 2주 이상 계속되었었다.
피의 능선 북쪽 고지군[高地群]은 후에 단장의 능선으로 불리게 된다. 단장의 능선 전투는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5일까지 한 달간 문등리 계곡과 사태리 계곡을 양쪽에 둔 산악의 고지에서 벌어졌었던 전투였었다.
1951년 9월 그의 부대인 C 중대가 속한 연대는 피의 능선 북쪽 단장의 능선을 점령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필리라아우의 중대에게 제일 높은 931 고지를 점령하는 공격 임무가 주어졌다.
고지를 방어하고 있던 북한군 사단은 북한군 최강 6사단이었다. 6.25 전쟁 초기, 북한군 6사단은 북한군 최우측에서 서해안을 따라 우회해서 마산 전선을 위협했었고 인천 상륙 작전 성공 후 북한 사단 중에 유일하게 사단 건제를 유지하고 태백 산맥을 따라 강계 쪽으로 탈출했었던 사단이었다.
[단장의 능선과 그 아래 피의 능선]
그의 중대는 목표인 주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공격해 갔는데 필리라아우의 소대는 선두에서 공격을 주도하였다. 그의 소대는 목표 지근 거리에서 적의 맹렬한 저항으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공격 돈좌 [頓挫]상태가 되었다.
소대는 방어 태세로 급편하고 오후 내내 포병과 박격포, 중기관총의 원거리 사격 지원을 받으며 여러 번의 반격을 해오는 북한군을 막아냈다.
그런 상태로 밤이 왔다. 밤 열 시 경, 북한군의 6사단 13연대 두 개 대대의 대병력이 미군 소대에 강습을 가해왔다. 북한군의 보병 공격에 더해서 포병들도 필리라아우의 소대를 맹렬히 두들겨 댔다.
소대는 힘들게 확보한 이 거점을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서 철수를 결정했다. 서둘러 철수하여 본대인 중대와 합류하여야 했다. 필리라아우의 분대가 소대 철수의 후위를 맡았다.
적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정신없이 싸우던 필리라아우는 자기와 분대장 두 사람만 철수를 못하고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분대장은 틈을 보다가 약간 후방의 관측 장교 위치로 탈출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북한군에 맞선 전투원은 자동소총 사수 필리라아우뿐이었다. 포병 관측장교 리차드 하가 중위는 분대장과 협조하여 계속해서 미군 포병 화력이 필리라아우의 앞에 떨어지게 유도하였다.
필리라아우가 자동소총을 연사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하가 중위는 아군 포병 화력이 그에게 너무 가깝게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포병 사격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필리라아우는 자기는 괜찮으니 포 사격을 계속하도록 요청하였다.
[단장의 능선]
필리라아우는 쇄도하는 적에게 자동 소총 사격을 계속하다가 탄창을 다 써 버린 것을 알았다. 아무리 뒤져봐도 실탄이 장탄된 탄창은 없고 빈 탄창만 남아 있자 그는 가지고 있던 몇 발의 수류탄으로 적과 맞섰다.
그러나 수류탄도 다 던지고 말았다. 필리라아우는 돌을 집어 들고 북한군들에게 던지기 시작했다.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최후가 왔다고 생각한 필리라아우는 자기가 소지했던 대검을 휘두르며 쇄도하는 북한군들에게 돌격했다. 그는 대검과 주먹을 휘두르며 북한군과 육박전을 벌였다. 그러나 최후는 바로 찾아왔다. 수많은 북한군은 그를 둘러싸고 총검으로 찔렀다.
조금 낮은 능선에 있던 중대의 전초에 배치된 전우들은 그의 눈물 나는 혈투와 최후의 순간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다음 날 다시 반격한 그의 중대는 전사한 필리라아우의 진지 주위에서 자동소총 사격으로 죽은 약 40구의 북한군 시체를 발견하였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저항이 극심하자 미군은 고지 좌우 문등리와 사태리 계곡으로 전차 부대를 투입했다. 전차부대는 단장의 능선 고지의 후방을 차단하고 후면에서 공격을 가하자 그제야 공산군은 물러났다.
필리라아우는 고향으로 돌아와 하와이의 미 국립 현충 묘지에 묻혔다. 미 의회는 그가 전사한 일년 후 그에게 명예훈장을 추서하였다. 하와이에 있는 미군의 휴양시설인 Recreation Center와 그의 고향에 필리라아우 이름을 붙인 공원이 있다. 2000년에는 USS필리라아우의 이름으로 명명된 미 해군 수송선단 지휘함이 취역하기도 하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