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7월 7일 사이판. 3 주 전 1944년 6월 11일 사이판에 상륙한 미군들은 한 달에 걸친 혈투 끝에 일본군을 섬 내부의 타포 차우 산악지대로 몰아놓고 계속 토벌하고 있었다.
3만 명이 넘었던 일본군은 이제 6,000명 정도만 생존해있었다. 죽어가는 부상병들이 많았으나 의약품은 없었다. 식량은 물론 식수조차도 구하기 힘들었다. 증원군은 불가능하고 더 이상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일본군의 사령관 사이토 중장은 그 전날 전원 옥쇄 돌격을 결심했다. 미군들에게 반자이[萬歲]돌격이라고 알려진 이 옥쇄 돌격은 미군의 포화에 전신을 드러내고 돌격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자살 돌격을 발한다.
사이판 섬
이 산악 지방까지 후퇴해온 일본군들에게는 따라온 일본 민간인들도 많았었다. 2만 5천명의 일본인들이 사이판에 거주했다. 일본 군부는 18세와 60세 사이 남성은 전투 지원 인력으로 쓰기 위해서 섬에 남겨 두고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을 중심으로 5천 명만 철수시켰다. 2만 명의 일본 민간인이 미군의 대병력이 공격해오는 결전장인 사이판에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사이판의 일본군은 지하 동굴에서 저항하였다.
사이토 중장은 휘하 부하들 전원 자살 돌격을 명하면서 민간인들에게도 죽창이라도 들고 동참하라는 비정한 명령을 내렸다. 7월 7일 새벽, 커다란 적색 깃발을 든 12명의 향도가 앞서고 그 뒤를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는 3천 명의 병력이 미군의 화력을 향하여 최후의 돌격을 감행 하였다. 놀랍게도 그 뒤를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무장도 제대로 되지 못한 반신 불수상태의 부상병들이 비틀거리며 유령처럼 뒤 따랐다.
태평양 전쟁 중에 발생했었던 최대의 자살 돌격이 실행되었다. 미군은 포로로부터 자살 총돌격이 곧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진지 강화를 하고 지원 화력을 증강하고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목숨을 포기한 일본군의 광폭하고 맹목적인 돌격은 미군의 화력에도 멈추지 않았다.
사이판의 일본군 토벌
이 대규모 자살 공격에 압도되어 미 육군 105 연대의 1대대와 2대대에서 65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미군 해병과 육군들은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격렬히 저항했다. 전투는 15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결국 미군들은 4,300명의 일본군 자살 돌격대를 죽이고 돌격을 저지시켰다.
육군 27사단 105 연대는 일본군이 최후로 감행한 자살 돌격의 거센 반격을 받고 고전하고 있던 중에 105 보병 연대의 2대대의 군의관 벤 L.살로먼 대위는 실탄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연속 발생하던 부상병들을 모아 응급조치를 하고 후방으로 후송을 보내는 구출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치의학을 전공하다가 입대하여 치과 군의관으로 임관하였다. 그의 응급 구호소 천막은 보병들의 참호에서 단지 50야드 떨어진 후방에 있었다. 그가 네 명의 부상자들을 후송시키려고 하던 차에 전면이 뚫리면서 4명의 일본군들이 총검 돌격을 해왔다. 그는 이들을 처치하고 즉시 후송 철수를 명령한 뒤에 앞으로 달려가 비워 둔 기관총 진지를 점령하고 돌격해오는 일본군들에게 계속 기총사격을 가했다.
살로먼 대위가 사격한 LMG A4 형
그는 직접 장탄과 발사를 해가며 몰려오는 일본군을 쓰러 뜨렸다. 그가 분투하면서 기관총 사격을 가하자 일본군들은 정면 돌파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도 총격을 입고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부상병들은 안전하게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미군 해병과 육군들은 큰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격렬히 저항했다.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이판의 민간인들
전투는 15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결국 미군들은 4,300명의 일본군 자살 돌격대를 죽이고 돌격을 저지시켰다. 전투가 끝나고 미군들은 다시 돌아와서 살로먼의 전사체를 회수하였다. 그의 사체는 기관총의 위에 쓰러져 있었고 몸에는 76개의 총탄 구멍과 총검 구멍이 나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중에 24개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생긴 것이었다.
무참한 그의 죽음에 놀란 전우들이 더 놀란 것은 그의 기관총 진지 앞에 무려 88명의 일본군 전사체가 흩어져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보병 훈련이나 중화기 훈련을 받지 못했던 그가 어떻게 그런 전공을 세웠는지 기적같이 생각되었다. 이날 살로먼 대위가 속했던 미군 105연대는 일본군의 자살 돌격을 잘 막아 냈고 최고 무공 훈장이 명예훈장을 받은 전사 영웅들만 세 명이나 배출하였다.
전투가 끝나고 전리품과 같이 기념 촬영을 하는 미군들
살로먼 대위도 그중 한 명이었다.그러나 훈장 수여는 상당히 늦어 2002년에야 이루어졌다. 그는 유태인이었다. 유태인들이 전장에서 별로 무공을 세우는 일은 없어서 2차세계대전에서 단지 3명만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는데 군의관 살로먼이 그 중 한명이었다.
최후 돌격에서 일본군은 거의 증발하다시피 전멸해버렸다. 7월 9일 미 해군 사령관 터너 중장은 사이판이 점령되었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