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때문에 탄생한 경제체제 [ 1 ] 잊지 못할 악몽
우리나라에서 IMF(Int'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는 결코 생소한 단어가 아니다. 기억에도 생생한 1997년에 있었던 고통스런 환란 시절을 상징하는 대명사처럼 여겨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데, 흔히 당시의 위기를 언론에서 ‘IMF사태’라고 표현한다. 이제 20여년 가까이 되었지만 바로 엊그제 일처럼 두고두고 기억 될 만큼 우리 삶 전반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였다.
[ 1997년 한국은 초유의 국가 부도사태에 직면하여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지원받았는데 이를 IMF사태라 한다 ]
오히려 본의 아니게 그때 키운 내성 덕분에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고통조차 다른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게 느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IMF사태는 6.25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 표현될 정도로 크고 깊었고, 그 여파는 지금도 우리 사회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 2008년의 금융위기도 상대적으로 작게 느꼈을 정도로 IMF사태는 컸다 ]
국방 분야도 IMF사태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분야다. 예를 들어 지금도 난항을 겪고 있는 3차 FX(차세대 전투기) 사업이 대표적이다. 원래 FX사업은 지난 1994년 처음 소요가 제기되어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총 120여기의 신예기를 신속히 도입하기로 예정되었다. 하지만 IMF사태로 말미암아 도입 계획이 연기되었다.
[ 원래 완료가 예정되었던 2005년도에 FX 1차 물량이 도입되었다 ]
1999년 우여곡절 끝에 사업이 재개되었지만 2009년까지 우선 40기를 구매하는 것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이처럼 한 번 계획이 밀리면서 노후기 대체에 막대한 차질을 빚기 시작하였고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전력 공백이 우려스러울 만큼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다. 이처럼 국군의 전력 증강 사업에 IMF사태가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 치열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대상 기종이 확정되지 않은 3차 FX 사업
IMF사태에 따라 최초 계획이 틀어지면서 노후기 대체에 애를 먹고 있다 ]
그런데 IMF사태라는 말은 잘못된 용어이고 ‘외환위기에 따른 IMF 구제 금융 사태’가 정확한 표현이다. 1960년대 이후 30여 년간 고도 성장기를 구가하며 알게 모르게 싸여있던 한국 경제의 모순과 문제점이 들어난 순간이었다. 더불어 국제 투기 자본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사상 초유의 외환 부족 사태를 겪으면서 일순간 국가 경제가 부도 위기에 처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였다.
[ 급격한 외화 부족은 우리 경제에 치명적인 결정타였다 ]
특히 대부분의 물자를 해외에서 도입하여야 하는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상 외환 부족은 엄청난 국가적 위기였다. 누구보다 먼저 위기를 감지한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원화의 가치는 미친 듯이 급락한 반면 금리는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하면서 부도 기업들이 속출하였다. 엄청난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수많은 자영업자들도 함께 몰락하였다.
[ 초유의 금모으기 캠페인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 ]
복지시스템이 열악하였던 당시의 사회 구조상 이들을 모두 구원하기는 어려웠다. 더불어 간신히 자리를 보존한 이들도 임금이 대폭 삭감당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일거에 우리 사회를 든든히 받치던 중산층이 대거 몰락하였고 결국 IMF로부터 550억 달러의 긴급 자금을 수혈 받으며 간신히 위기를 극복하였다.
[ 당시 설치된 IMF 서울사무소 현판 ]
하지만 거액을 빌려준 IMF는 대신 한국 경제 전반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기업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었고 우량한 기업이라도 이런 고통에서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이처럼 고통을 몸소 실감하다보니 IMF가 어떤 기구인지 그리고 정확한 개념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타도 대상으로 생각한 이들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