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 지상군 주둔약사 [ 1 ] 70년의 기록
미국은 지리적으로는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우리나라와는 정치, 외교,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문화, 예술까지, 어느 한 분야도 관련이 없는 곳이 없다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다. 그 중에서도 안보는 더욱 그러한데, 특히 6.25전쟁이라는 질곡의 시기를 거치면서 동맹을 맺게 되었다. 특히 군사동맹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주한미군은 우리 현대사에 커다란 하나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 주한미군은 한미동맹의 상징이다 ]
흔히 주한미군을 1950년 발발한 6.25전쟁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인연은 그 보다 좀 더 오래전에 맺어졌다.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기 5년 전에 대규모의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하였던 적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에 미 제24군단 예하 제7사단이 인천으로 진입했는데, 비록 행정 상륙이었지만 분명히 군사작전이었고 이를 준비하며 쌓은 경험은 이후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 38선 이남 군정을 위해 열을 맞춰 인천항 내항으로 진입하는 미 제7사단 ]
당시 미 제7사단이 인천으로 상륙한 이유는 식민지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주둔 중인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정부수립 전까지 군정을 실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것은 한반도와 미군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역사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한반도에서 주한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올해 2015년은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한지 어언 70주년이 되는 해다.
[ 상륙 주정에서 바라 본 인천의 모습 ]
하지만 제2차 대전의 승자이자 해방군을 자임하며 자신만만하게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그들 또한 당시에는 앞으로 70년이 넘게 한반도에 미군이 계속하여 주둔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군이 주둔한 이후 태어난 사람이 그 이전에 태어난 사람보다 훨씬 많이 살고 있을 만큼 70년은 엄청난 시간이다. 지난 세기 중반에 주둔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앞으로도 언제까지 인연이 계속 이어질지는 지금 시점에서 판단하기 어렵다.
[ 조선총독부의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는 모습 ]
미군의 군정시기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1948년 8월 15일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뒤이어 38선 이북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이 별도의 정부를 수립하면서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통치하던 소련군과 미군은 1949년 6월 30일 공식적으로 철군을 완료했다. 소수의 군사 고문단이 계속 남아있었지만 사실 군사적으로는 그다지 의미를 부여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 38선을 경비하는 미군의 모습 ]
결과론이지만 한반도가 비록 남북으로 분단되었더라도 마치 동서독처럼 평화적으로 공존 관계만 유지했어도 미군과 한반도의 인연은 이것으로 종막을 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불법적인 전쟁 도발은 불과 1년 만에 철군했던 미군이 한반도로 다시 돌아오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이후 미군주도하에 전쟁이 수행되고 휴전 후에도 세력균형을 위한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만들었다.
[ 정부 수립 후 1949년 6월 인천항을 통해 철군하는 모습 ]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시작된 전쟁은 동서냉전의 시작과 맞물리며 거대한 국제전이 되었다. 이때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을 외세의 개입으로 보는 극히 편향된 일부의 시각도 있지만 이는 전쟁 발발의 책임을 다른 곳으로 전가하려는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먼저 북한의 남침이 없었다면 이 땅에 국제전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소련이라는 외세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전쟁의 발발이 있었던 것이다.
[ 북한의 남침은 주한미군이 되돌아오게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 ]
6.25전쟁이후 미국 스스로의 정책에 따라, 때로는 우리 사회의 요구가 더해져 주둔한 미군에게 많은 변화가 이루어져왔다. 현재 주한미군은 크게 지상군과 공군으로 구성되는데, 비록 정보 수집과 타격 능력을 고려할 때 제7공군으로 대변되는 항공 전력도 엄청난 수준이지만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상군이 여전히 주한미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소개할 내용은 지난 70년간 이 땅에 존재하였던 미 지상군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