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중 양양 해변에 좌초한 태국함 -2-
[좌초한 파라세]
30노트의 속도로 부는 강풍 속에서 헬기가 좁은 파라세의 갑판에 사람을 내리게 하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고 두 번째 시도에서 비극이 발생하였다. 큰 파도가 배를 덮치자 배가 크게 흔들리면서 헬기가 마스트에 부딪혀 갑판에 추락하였다. 기체가 두 동강나고 불이 나서 사방으로 번졌다.
불길은 바로 옆의 20mm 탄 박스에 옮겨 붙어 연달아 폭발이 일어나게 하였다. 태국 해군 승조원들이 호스로 물을 뿌려 진화하려고 했지만 수압이 제대로 나오지를 않았다.
불길은 함에 장착된 폭뢰 발사대로 퍼져 나갔다. 수병들은 목숨을 걸고 폭뢰에 접근하여 이들을 수중으로 투하시켰다. 갑판을 휩쓰는 불길에 한 구석으로 몰려 타죽게 된 수병들은 뼈까지 얼어붙는 바닷물로 뛰어들어 해변으로 대피했다. 이 중 부사관 푸안 포르느 사용은 바다에 뛰어든 후 발견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갑판을 휘젓던 불길은 잦아들었다. 오후에 미 해군의 상륙정 운반함 컴스턱이 도착했다. 이 배에서 파견한 세 명의 지원자들인 두 명의 군의관과 구조 전문 장교가 파라세 접근에 성공하였다. 상륙정은 파라세의 부상병들을 싣고 해변으로 가서 이들을 내려놓았고 헬리콥터가 이들을 구조하였다.
[해변의 태국 승조원들]
그 때 북한군들이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파라세의 포술 장교와 미 해군들은 협력하여 해역의 구축함들에게 북한군의 위치를 알려주고 포사격을 요청하였다. 함포탄들은 접근하는 북한군들을 정확히 강타하였다.
그러나 북한군들은 그들이 해변의 태국군과 미군들에게 접근해서 육박전을 벌인다면 포사격이 멈춘다는 것을 알고 악착같이 달려왔다. 구축함 포술 장교가 북한군의 선두 그룹이 해변에 나타나자 즉시 40mm 기관포의 포문을 열고 이들을 전멸시켰다. 그제서야 북한군들은 물러갔다.
그 날 밤 파라세를 엄호하던 함대는 15-20 분 간격으로 해안의 적 예상 접근로에 포격을 가하면서 적들을 견제하였다.
1월 9일.
날씨는 맑았으나 추위는 더욱 심해졌다. 로프가 얼어붙어 예인 작업은 한계에 부딪혔다. 파라세 함의 엔진이 꽁꽁 얼어붙어 식수마저 떨어졌다. 승조원들은 눈을 녹여서 취사를 하여야 했다. 함체를 두들기는 파도의 힘이 너무 거세서 배의 후미가 돌아갔고 파라세는 함체를 해안과 수평으로 두고 파도를 더 심하게 맞아야 했다. 그날 밤 파라세의 승조원들은 전기도 물도 난방도 없이 떨며 지새야 했다
1월 10일.
일기는 더욱 나빠졌다. 전력 시스템의 복구에는 실패하였고 함저의 좌초된 부위에서는 물이 새기 시작했다. 열대 지방 출신인 승조원들은 추위에 떨다가 하나 둘씩 앓기 시작했다.
1월 11일.
다시 한 번 예인이 시도되었지만 실패하였다. 밤 8시 경에는 기온은 영하 16도로 급강하하고 말았다. 승조원들 모두가 정상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대부분의 수병들이 감기와 폐렴과 동상 환자가 되었다.
1월 12일.
미 해군 맨체스터 함의 군의관이 달려와서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고 이들 전원이 함상 근무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파라세 승무원중에 상태가 극히 안 좋은 사람부터 미 구축함 잉글리쉬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1월 13일.
도쿄의 유엔 군 사령부에서 배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파라세 승조원들은 공산군이 사용할 만한 중요 장비는 다 부수고 요소요소에 폭약을 설치한 후 물러나면서 폭파하였다.
병든 수병들은 모두 해변으로 대피해서 헬리콥터에 의한 공중 수송을 대기하였다. 총원 퇴함 후에 파라세는 미 해군 구축함이 쏜 50 발의 포탄을 맞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태국함 방파콩을 포함한 미 함대는 일본 사세보로 향하였다. 이 함대는 파라세의 구출 시도에 총 7일의 시간을 보냈다. 1월 14일 아침 08:00, 함대는 모두 사세보 항으로 돌아왔다.
미함 만체스터 의무실에 승함해있던 중환자들은 모두 항내 해군 기지 병원으로 이송이 되었고 파라세 승조원들은 태국함 방파콩과 지원함 시창에 나누어 수용되었다. 27명이 극심한 추위로 운신을 못하는 중병을 앓고 있었고 바다에 빠진 두 사람은 실종 처리되었다.
파라세 승조원들은 석달 후 어느 정도 완쾌되어 전원 민간 지원함 커스텐 머스크 호를 타고 일본을 떠나 3월 20일 태국으로 도착하였다.
태국정부는 북한 해안에서 파라세 함을 상실했음에도 한국 지원을 단념하지 않았다. 태국은 미국에게 두 척의 프리게이트 함 판매를 요청하였다. 미국은 태국 해군이 이들을 구입 후 한국 해역에서 투입한다는 조건으로
미 태평양 함대에서 두 척의 프리게이트 함을 빼내 태국에 판매하였다.
[태국에 판매한 두 척의 미 프리게이트 함]
태국은 두 척의 프리게이트 함 대금으로 미화 861,946 불을 지불하였다. 두 척의 전 미 해군 프리게이트 함들은 각각 타친과 파라세Ⅱ로 명명되었다.
태국이 구입한 두 척의 프리게이트 함들은 일단 1951년 10월 3일 사세보 항으로 와서 미 해군으로부터 운용교육을 받고 태국으로 갔다가 1951년 12월 26일, 다시 사세보로 돌아왔다. 두 함은 여기서 필요한 정비를 하고 1952년 1월 11일 북한 해역을 향하여 출동하였다. 두 척은 휴전이 될 때까지 동해안를 초계하며 원산과 성진 사이 해변의 목표물들을 포격하는 작전도 했다.
타친의 출동일수는 220일이며 25개의 해상 작전에 참여했었다. 파라세 Ⅱ는 32 개의 작전에 참여했으며 해상 출동일수는 300일이다. 이 기간 동안 두 번의 승조원 교대가 있었다. 휴전이 성립되고도 한국 해역에 머무르던 두 척의 태국 군함들은 사세보 항으로 돌아와 이곳 미군 해군 정비창에서 대규모로 정비를 받았다. 정비가 다 끝난 1월 6일 태국 군함들은 본국으로의 복귀 명령을 받았다.
2000년에 퇴역한 파라세 Ⅱ는 현재 태국 파라세 강의 강구에 기념관이 되어 영구 정박하고 있다.
[프라세 Ⅱ]
태국 해군은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3년간이나 참전했으며 총 2,485명의 해군이 참전하였다. 태국은 공군도 파견했었다. C-47 3 기가 파견되어 일본의 공군 기지에서 수송 임무를 수행했다. 태국 육군의 1 개 중대는 1972년까지 경기 북부 운천에서 주둔하며 한국 방위에 기여하였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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