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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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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1-

 

이 글은 여순 14연대 반란 주모자의 한 명이었으며 6년간 지리산 일대에서 악명 높은 공비 행각으로 군경을 괴롭히다가 1953년 11월 사살 된 공비 두목 이 영회의 최후에 관한 글이다.

 

이 영회에 대한 전사적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 글이 이 자에 대한 유일한 글일 수도 있으며 단편적이지만 그에 관한 새로운 인적 정보도 담고 있어서 전투 경찰사에 의미있는 기록이라고도 자평하고 싶다.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도로 반란 진압의 출동 명령을 받고 승선 대기 중이던 14연대 일부 좌익분자들은 장교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사병들과 인간 관계가 좋았던 연대 인사계 지 창수 상사가 주도해서 반란의 불길을 일으켰으나 곧 뒤에 숨어있던 좌익 장교 김 지회 중위가 전면에 나서 반란을 지휘했다. 두 명의 장교와 좌익 부사관들 40여명이 일으킨 반란 사건은 300여 명이 사살되고 2,000여명이 투항하여 일단 진압되었다.

 

 

진압 직전 반란군들이 지른 불에 타고 있는 여수시

 

두목 김지회와 홍순석등의 좌익 장교들과 하사관들은 700명의 잔당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김지회와 홍순석이 지휘하는 반란 부대는 지리산으로 잠적 후 추적하는 군경들과 싸우며 도망다녔다. 두 장교 출신 수괴들은 6개월 뒤에 토벌대에 포착되어 사살당했다.

 

그러나 14연대 반란병들중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던 몇몇 하사관들은 공비 부대의 간부들로 변신해서 휴전의 시점을 지나서까지 긴 세월동안 반란군 공비 부대를 이끌며 군과 민간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반란을 주도한 연대 하사관 그룹에는 지창수와, 이영회, 송관일, 김흥복등이 있었다. 주동자 지 창수만 반란 직후 행불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공비 두목으로 변신하여 대활약을 하였다.

 

반란군 출신의 공비들. 머리가 긴 것으로 보아 사건후 적어도 한 달이 지나서 체포된 듯하다.

그들은 반란으로 준 피해를 준 것보다도 공비 활동으로 몇 배나 더 큰 피해를 대한민국에게 주었다. 반란군 출신 공비 두목들은 모두 군경의 손에 의해서 최후를 맞았지만 군사 훈련을 받은 그들의 전투 지휘력은 공비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났다.

 

비록 후퇴하지 못하고 지리산으로 들어온 북한의 정예 4사단이나 6사단의 북한 정규군 잔당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이들 반란군 출신처럼 끝까지 버티어 내지 못하고 일찌감치 토멸되었다. 한때 1만 명의 공비들이 우글거리던 지리산 공비들도 여러 번의 군의 대규모 토벌 작전과 경찰의 추격전으로 휴전 무렵에는 1,000여 명이 남아 있었다.[일설에는 600명]


그리고 3년 뒤인 1956년에는 단지 60여 명만이 산야를 떠돌며 목숨을 이어갈뿐이었다. 1963년 11월 최후의 공비이자 여자였던 정순덕이 체포됨으로서 남한의 공비 준동은 끝을 맺었다.

 

이 현상- 금산군의 부농 출신으로  보성전문을 나오고 박 헌영과 함께 조선 공산당을 창립했다.

 

 

남로당은 반란군 입산 후 이들 군사력을 지휘 보존하고자 과거 일제시 지리산에서 피신 생활을 했었던 이현상을 입산시켰다. 이현상은 이후 지리산을 일대의 공비들 지도자가 되어 이들을 이끌었는데 군경의 지속적인 토벌을 받아서 감소되다가 한국 전쟁 발발 때는 겨우 200여명의 공비들만 남았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발발하고 남침한 북한군 패잔병들과 부역자들이 대거 입산함으로서 그의 파워는 대폭 확대되었었다.

 

그가 1951년 덕유산 송치골 회의에서 남한을 6개 구역으로 나누고 자신이 제일 주요한 전남북의 5 구역 위원장겸 남한 공비부대를 총지휘하는 남부군 총사령관이 된 것은 아직 북한에서 잔명을 이어가며 그래도 약간의 힘이 있었던 남로당의 영향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전후 김 일성에 의해서 잔인한 남로당 대숙청이 있자 이현상은 휴전 직후인1953년 8월 26일 지리산 반야봉 서쪽 빗점골 회의에서 전남 도당 위원장 박 영발이 주도하는 반대파에 의해서 5 지구당 위원장 직을 박탈당하고 실질적으로 남한 공비 부대의 총사령관직도 내려놓은 평당원으로 강등당했다.


 1953년 9월 17일,그는 자기를 지지하는 경상도 제 4 지구당을 찾아가다가 지리산 빗점골에서 군경에 죽임을 당하였다. 이현상은 리더십이 뛰어난 남로당 간부였지만 그가 일사분란하게 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이 현상은 경남도당 위원장 김 선우의 지지를 받았으나 그가 직할하는 제 5지구당의 휘하 전북도당 위원장 방 준표와 전남도당 위원장 박 영발과는 상당한 알력이 있었다.

[위 세 명의 도당 위원장들은 다음 해인 1954년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이현상이 그래도 그 지휘권을 행사했던 것에는 그가 공비 최강 부대를 지휘하는 여순 14연대 출신 이 영회의 지지와 충성을 받았던 것이 큰 이유가 된다. 이현상과 구(舊)빨치로 분류되는 반란군 출신 부대와는 한국전부터 토벌대에 쫓기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다져진 진한 유대감이 있었다.

 

14연대 대전차포 중대 상사 출신인 이영회는 그를 신임하는 이현상에게 충성을 다했었다. 이영회는 이현상의 지지로 남부군 부사령관까지 승진했었다. 이영회가 지휘하던 부대는 공비 부대중에서도 알아주는 최정예 부대로서 전투 경찰들도 상대하기를 두려워하는 부대였었다. 이영회 부대와 여러 번 싸운 일이 있었던 현재 참전 경우회 사무총장인 김을로씨는 이 영회 부대를 이렇게 평했다.

 

“ 그 누마 부대 말도 못하게 강했다 아이가!”


 그는 또 잔인한 것으로도 유명해서 한때 몸담았던 국군 군인을 포로들은 방면해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하였으나 군 입대 전부터 감정이 안 좋았던 경찰 포로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학살해버리기 일쑤였다. 이영회는 휴전 다음해 인 1953년 11월에 이 글이 소개하려고 하는 의령 경찰서 습격을 마치고 지리산 아지트로 복귀하다가 전투 경찰의 매복에 걸려 사살될 때까지 수없는 살인과 약탈의 만행을 저질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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