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4-
이런 난동의 파괴가 대한민국의 한 도시에서 발생하고 있었을 때 의령 외부에서는 이영회 부대의 습격을 전혀 알지를 못했다. 이영회 부대 일부가 외부 도로를 차단했었기 때문이기도 했었고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인 전화 교환소가 있던 우체국을 장악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서원들 - 이들과 의용 경찰이라는 큰 조직이 지서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의령 사건을 보면 이 때로부터 40년 뒤인 1982년 4월 26일, 같은 의령의 궁류면 궁류 지서에 근무하던 순경 우범곤이 술에 취해 무기고에서 칼빈 총과 수류탄을 꺼내 들고 궁류면 4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 62명을 사살하고 34명을 부상시킨 대살인 사건을 연상케 한다.
그는 먼저 우체국부터 습격하여 집배원과 교환원을 사살하고 밤새 궁류면 마을을 돌아다니며 살육을 했었지만 새벽에 수류탄으로 자살할 때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아무 제지도 받지 않았었다.
[우순경의 미친 난동에 의령 궁류면에는 줄초상이 있었다.]
이영회가 기습한 이날 조능대 의령 군수는 보건 진료소에서 허벅지에 난 종기의 치료를 받고 잠시 쉬면서 진료소장 김영곤 선생과 환담 중이었었다.
대화 중 갑자기 총을 든 군인 복장의 괴한이 뛰어 들어와 다짜고짜 약품을 자루에 챙겨 나가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두 사람은 뒷문을 통해 몸을 피했다. 그가 군청 군수실에서 근무하던 중 이영회 부대원의 습격을 받았다면 아마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의령을 습격한 공비 부대는 지리산으로 복귀하기 위해서 북으로 우회하는 루트를 택했다.
동그라미가 복귀하던 공비들이 통과한 지역들]
공비들은 19시경 탈취한 트럭에 전원 올라타고 의령을 떠나 용덕 쪽으로 내달았다. 용덕 지서의 지서원들은 의령 읍을 박살낸 공비들이 자기 지서로 오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채고 모두 도주해버렸다.
공비들은 서슴치않고 지서에 불을 지르고 다시 트럭으로 이동하여 원껄을 지나 매새 마을 [산학 부락이라고도 한다] 앞 진동재 고개에 이르렀다. 여기서 운전사가 고의로 했는지 트럭이 낡아서 그랬는지 고장이 나고 말았다.
이 때가 22:OO 이었다. 상당한 시간 꾸무럭거리며 자동차를 수리하려고 애를 썼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공비들은 할 수 없이 차에 불을 지르고 걷기 시작하였다.
공비들은 조용히 정곡면 죽전과 대신 마을을 통과하면서 민가에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약탈할 것이 많은 정곡면 소재지를 공격 할 계획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이 시각은 이미 이 영회의 의령 습격 사건이 보고가 되어 경찰에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공비 부대는 정곡면 소재지 못 미처 나직한 산고개에 잠복한 정곡 지서원들의 사격을 받았으나 숫적으로 강한 공비들의 반격에 지서원들은 모두 흩어져서 도주하였다. 공비들은 정곡면 소재지에 난입하여 맨 먼저 정곡 지서에 불을 질렀다. 이 때가 23시 30분이었다.
정곡면 사무소는 미리 알아채고 호적부 등 중요 서류를 물이 없는 배수로에 던져놓고 대피했기에 이 중요 서류들은 무사했었다.
오늘날의 정곡 파출소
지서에 불을 지른 공비들은 면사무소와 금융 조합 건물에 방화하고 주차 중인 트럭 1대를 탈취하여 도주를 계속하였다. 24시 30분경 유곡 송산을 거쳐 01:30경 정곡면 중교 부락에 도달하였다. 공비 일행은 납치한 군인들과 경찰관을 포함 50여 명에 이르렀다.
공비들은 이 마을에서 밥을 시켜먹고 이어 04:40 분경 궁류면 벽계리 부근에서 트럭을 버리고 도보로 자굴산 방향으로 향했다. 이 영회는 이곳에서 납치해서 끌고 가던 두 명의 경찰관을 알몸으로 벌거벗겨 놓아주었다.
공비 내습의 급보를 받은 경찰은 비상을 걸고 이들의 추격에 나섰다. 동원된 경찰대는 의령 경찰서, 함안서, 진주서, 마산서, 사천서, 고성서, 창녕서등의 경찰대로서 총동원의 비상출동이었다. 육군 보병 56연대도 동원되어 합천 방면에서 차단에 들어갔다.
경찰이 구사한 전술은 [앞서 말한] 이미 경지에 오른 전투 경찰 독자 개발의 ‘매복 전술’이었다.
경찰은 이영회의 도주 경로를 미리 예측하고 대의면 모의, 칠곡면 내조, 가례면 갑을,궁유면 정동의 통과 예상 지점에 매복 병력을 완료한 것은 사건 발생 12시간이 지난 새벽이 다 된 후였다. 지역 경찰들이 매복을 완료하고 이어서 동원한 기동 경찰 병력들이 추격하기 위해서 전개하였다.
서남 지구 경찰 전투 사령부 소속 150여명과 경남도경 직속 특수부대 70명은 합동으로 한우산, 자굴산 일대의 수색에 들어갔다.공비들은 이 무렵 소부대로 분산되어 도주하고 있었다.그 중 궁유면 벽계의 산성산을 넘어 도주하뎐 공비의 소부대가 제일 먼저 경남 특수 부대인 맹호 부대의 매복에 걸려 섬멸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