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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 포병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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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 포병대 -1-

 

 

한국 전쟁의 미 포병대 사격


1950년 북한 동해안에 상륙한 미 해병대 1사단은 함흥에서 좌회전해서 북상, 장진호로 이어지는 긴 협곡으로 들어섰다. 해병대는 일로 서북진하여 평안북도 무평리에서 북상해오는 제 8군과 링크하라는 미 10군단장 아몬드 장군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저돌적인 아몬드 장군은 무턱댄 맹진 명령을 남발하며 해병들을 다그쳤다.

 

그러나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협곡에 대부대를 투입하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하던 중에 대부대의 중공군이 출현하자 경계심을 높이고 가급적 천천히 전진하였다.

 

그 스피드는 거의 항명 수준이었다스미스 소장은 중간중간 보급품 기지를 만들며 신중히 전진하다가 장진군청 소재지 하갈우리에 도달하자 서둘러서 활주로 길이 1,500미터의 간이 비행장을 만들었다. 이 비행장은 장진호 전투중에 보급과 병력 및 환자 수송을 가능케해서 해병들의 작전에 거대한 기여를 한다.

 

스미스 장군의 조심성이 해병1사단의 중공군 포위 탈출에 큰 역할을 했다중공군은 9병단을 이 방면에 투입했었다. 그 병력은 엄청나서 무려 6개 사단, 총 60,000명이었다. 사령관은 마흔 두 살의 송시륜 [성씨룬] 장군. 1937년 모택동의 대장정 때 이미 20대의 어린 나이로 연대장을 했었던 능력있는 지휘관이었다.

 

장진호 계곡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된 미군 병력은 해병 13,500, 육군 4,500명이었다. 해병 3개 연대중 2개 연대와 육군 부대[7사단 32 전투단]가 더 북상하여 장진호 좌측과 우측으로 들어서자 11월 27, 중공군은 대규모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길게 배치된 해병대 부대를 토막내기 위해서 유담리를 먼저 치고 이어서 하갈우리고토리 등 도처에서 해병대에게 연속적인 기습을 했던 것이다이중 해병대 주력 5연대, 7연대가 있던 최전방 유담리에 대한 공세가 극심했다그러나 유담리의 해병대는 사투를 벌이며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탈출을 했고 호수 우측에 전개했던 육군 7사단 32 전투단은 실질적으로 궤멸되어 버렸으나 소수의 병력은 사단 본부가 있던 하갈우리로 철수를 했다

 

다음 순서는 그 남쪽 고토리로 철수하는 것이었다.


 장진호 동쪽 호반에서 궤멸된 미 육군 32 전투단은 연대기를 유실했다.

이를 줏은 중공군 병사가 보자기로 쓰다가 지휘관에 발견되어 지금은

중국 북경 군사 박물관에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미국내 신문에서 장진호의 해병들 운명에 대해 극히 비관적인 보도를 하고 미국민들도 절망적 분위기에 있었을 때 해병대는 남쪽 흥남으로의 탈출을 개시하였다해병 1사단이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북극권을 뛰어넘는 엄청난 추위와 싸우면서 다음 목표인 고토리로 철수하던 길에서 격돌했던 전투가 이번 포스팅의 중심 이야기다.

 

1950127.

미리 짜여진 차량 행군 계획에 따라 미 해병 포병들이 장진호 바로 밑의 하갈우리에서 그 아래 고토리로 후퇴하던 도중이었다그 북쪽 유담리에서부터 살인적인 추위를 아랑곳 하지 않고 악착같이 매달려 습격해오는 중공군과 싸우며 후퇴하던 해병들이 아직도 최종 도착지 흥남까지는 갈 길이 멀었던 때였다.

 

장진호에서 후퇴하는 해병들.

이들이 입은 긴 파카는 해병대 지급용이 아니라 해군용 동계 피복이었다.



차량들은 행렬을 지어 좁은 도로를 전진과 정지를 되풀이하며 천천히 행군했다좌우 산악에는 미리 매복했거나 뒤에서 추격해오는 중공군들로 붐볐다약점이 발견되는 결정적일 때 중공군들은 매복 병력을 풀어 공격할 것이었다.

왼쪽 위 유담리까지 진격했던 미 해병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호수밑 하갈우리에 집결, 아래 고토리로 철수했다이 구간에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이 있었다포병대 공격도 이 구간에서 있었다.



수 많은 중공군들이 파리 목숨으로 죽어갔던 장진호 전투에서 한국전중 중공군의 트레이드 마크인 인해전술이 하갈우리에서 처음으로 적극 구사되었다.

 

중공군


날이 밝았을 때 행군 종대는 동쪽 고지에서 쏟아지는 적군의 집중 사격으로 갑자기 전진을 멈추어야 했다중공군은 하갈우리에서 잘 싸웠던 미 해병대 포병의 행렬을 노렸다무거운 장비가 있어서 운신에 제약이 있을 것이고 총격전에 보병보다도 전투력이 뒤질 것이라는 계산에서였을 것이다.

 

중공군이 표적에 퍼 부운 화력의 강도로 보아 그것은 교란 사격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포병의 G포대와 H포대를 목표로 매복했던 병력이 곧 돌격해올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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