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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대학살 - 중공군 대패의 춘계공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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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와 트루먼 - 서로 웃고 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안 좋았다.

 

 

 

여기에 더해서 미 국방성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국방장관 마샬 원수가 틀고 나섰다. 그도 역시 맥아더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야전형 맥아더 장군은 행정형 장군이었던 마샬을 미워했었다마샬은 표면적으로는 정책적인 이유를 들고 나왔다. 이렇게 아시아 구석에 대규모 미군이 붙들려 있는 동안 소련이 미 국익에 훨씬 더 중요한 유럽에서 불장난을 해버리면 미군이 이를 방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샬은 원래 유럽을 중시하는 정책 신봉자로서, 아시아에서 오랫동안 근무해서 아시아를 중시하는 맥아더와는 정 반대의 입장을 가져졌다그는 불과 몇 년 전에도 붕괴되어 대륙에서 쫓겨나고 있던 장개석 군 지원 정책을 틀어버린 일이 있었다.

 

 

 

조지 마샬 - 그의 장개석 정부 불지원, 한국전쟁 조기 종결, 이스라엘 불인정 정책은 후세의 논란이 되었다.

  

 

그러니까 미국 수뇌부의 분위기는 한국에서는 적당한 수준에서 정전한 뒤에 유럽에 미국의 국방력을 집중하자는 이야기였으니 이들의 명예 회복을 절실하게 바라던 맥아더의 투지나 한국민의 통일 염원은 관심조차 없었다. 맥아더는 분통을 터뜨렸으나 여론과 대통령의 비협조를 등에 업은 워싱턴의 군부세력이 내부에서 걸어온 반대에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출현한 중공군 때문에 2~3배로 커버린 적군을 그냥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싸우라니 그가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어중간한 상황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내놓고 일단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다유엔군이 이렇게 복잡한 사연을 안고 철수를 계속하고 있을 때 중공군의 사기는 하늘같이 치솟았다. 세계 강국 미군을 꺾었으니 기고만장 할만도 하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교만한 군대는 필히 패한다는 교병필패[驕兵必敗]라는 전략 원칙의 상태에 전 군대가 발을 드려 놓는 순간이었다 [교병필패[驕兵必敗], 전격전의 아버지 바실 리델하트가 6일 전쟁 뒤 승리에 도취했던 이스라엘에게 찬사대신 충고 할 때 인용했던 손자의 명언이다. 이스라엘은 10월 전쟁에서큰 피해를 보았다.]

 

중국은 한반도에 투입되었을 때 미군에 대한 공포 심리가 다분했다. 그들의 빈약한 무장과 병참은 막강한 최신 무기로 무장한 미군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처음 1,2차 전역으로 미군과 격돌했을 때 이들에게는 항공지원은 커녕 변변한 포병 화력도 없었다위력있는 무기라야 기관총과 박격포 정도뿐이었다. 식량은 콩가루 아니면 미숫가루였다. 부식은 없었다.

 

슬리핑 백 같은 것은 물론 없어서 몸에 걸친 누비옷이 유일한 방한복으로서 밤에 얼어붙은 땅바닥에서 입은 채 그냥 새우잠을 자야 했다. 전투가 길어지고 겨울이 깊어지자 동상에 의해서 일개 연대가 완전히 전투 불능화된 사건도 있었다. [동상 환자가 속출해서 제586연대는 전투력이 마비될 정도였다.] 병참을 위한 트럭 지원을 일선까지 받지 못해서 각 보병이 가지고 있는 실탄, 가지고 있는 식량으로 전투를 하고 그것이 소진되면 다시 보급 받을 방법도 없으므로 전투를 마감하고 철수해야 했다.

 

그 기간이 대강 닷새에서 이레 정도였다. 미군은 일찌감치 중공군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알아내고 작전수립에 크게 활용했다. 중공군처럼 세계에서 빈약한 무장의 가난한 대군은 현대 군대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과거 이태리 침공군에 대항했던 이티오피아 군대도 이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런 부대가 최강 미군을 타격해 큰 피해를 주고 격퇴시키고 이를 추격까지 해서 적 수도까지도 다시 탈환하지 않았던가!

 

중국은 민관군이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열광했다. 각 도시에서 승리 축하 행진이 있었고 신문들은 연일 사설을 동원해서 미군들을 현해탄으로 쓸어 넣으라고 들뜬 어조로 선동기사를 해댔다. 과장과 몽상과 태만은 민간에게만 전파된 것이 아니었다중공군 병사들 사이에 미군들이 별 것 아닌 잡병들로서 트럭을 타고 도망만 가는 비겁한 군대라고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38선을 넘을 때 축배를 드는 중공군 - 유엔군을 한참 우습게 볼 때다.

  

 

도망가는 미군 꼴만 보았던 이들 병사들은 미군을 그들이 대륙에서 내쫓았던 장개석군보다 못한 오합지졸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군 경시 사상은 병사들뿐만 아니라 중공군 장교들 사이에 까지 만연되어서 무리한 공격 일변도의 의견들이 난무했다. 많은 중공군들이 저 따위 오합지졸 같은 미군을 바로 부산으로 몰고 내려가서 바다 속에 처넣을 공격 행동도 없이 군을 한반도 중부에 정지해 놓고 서성거리게 만드는 지휘부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털어 놓고 있었다. 덩달아 김일성까지도 팽덕회에게 미군을 부산 앞바다로 쓸어버리라고 보챘다. 주 북한 소련 대사 스티코프가 여기에 합세해 팽덕회에게 압력을 가했다.

 

 

  북한 공연단의 중공군 위문

  

 

그러나 이런 들 뜬 심리는 최고 통치자 모택동의 심리상태에 비하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그는 일선에서 싸우는 중공군의 상태도 생각하지 않고 철수하는 미군의 의도도 깊이 연구하지 않고 걸핏하면 팽덕회에게 계속적인 공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노련한 팽덕회는 중공군 안팍에 넘쳐흐르는 교병[驕兵]심리에 남모르게 경계심을 품기 시작했다. 근는 원래 적이 싸우지 않고 도주하는 것을 보고 뭔가 있다는 의심을 품고 일단 38선 근처에서 정지하고 사태를 보려고 했다. 그러나 모택동의 채근으로 다시 힘이 부치는 서울을 공격하였고 유엔군을 한강 이남으로 몰아냈다.

 

이것이 3차 전역[三次 戰役]인데 팽덕회는 지칠대로 지친 부대와 빈약한 병참으로 어거지로 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은근히 자기 의견이라는 겸손을 떨면서 남진을 명했다. 허나 의심 많은 팽덕회는 그의 주력 부대를 한강을 넘어 남진시키지 않고 위력 정찰 부대들만 평택-안성선까지 내려 보내 정찰을 했다그가 발견한 것은 유엔군들이 질서정연하게 방어선을 구축해놓고 중공군의 남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판단은 역시 맞았던 것이다.

 

 

 

미군의 포격 - 헐벗은 한국의 산야가 눈에 들어온다.

 

 

 

중공군이 더 이상 남하하지 않자 유엔군은 반격의 수순으로 들어갔다. 워커 중장이 죽고 리지웨이를 새 사령관으로 맞아들인 미군은 19511월 25일부터 전선을 정리하고 전 전선에서 신중하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서울을 향하여 전진해오는 미군의 진격을 늦추고 모택동의 바람도 만족시키고자 팽덕회는 횡성, 홍천 전선의 한국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것이 4차 전역[四次 戰役]이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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