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인지라 팽덕회는 주저했지만 모택동의 압력은 거셌다. 서부 전선의 50군과 112사단이 전진하는 미군을 막아 내는 동안 39군과 40군, 그리고 42군은 동부 전선으로 이동을 명했다. 중공군의 사[師]는 한국군의 사단(師團), 군(軍)은 한국군의 군단(軍團), 집단군(集團軍)은 한국군의 군(軍)에 해당한다. 중공군은 2월6일 서부전선에서 횡성지구로 이동해 한국군 11사단에 타격을 가하고 양평군 지평리에서 미 7연대와 프랑스군 대대를 포위했으나 미군과 프랑스군의 막강한 방어력에 제대로 공격도 못하고 대치 중에 미군 기동부대가 구출을 위해서 달려오자 맥없이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와 한강 이남에서 진격하는 미군들과 [기습의 효과가 사라진] 전투를 해 본 팽덕회는 미군들이 종이 호랑이가 아니라 마음만 먹는다면 공격이건 방어건 마음대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했다. 그러나 서울을 내놓고 북쪽으로 철수한 팽덕회는 본국에서 계속 새로운 대부대가 도착하고 포병대까지 도착하자 모택동의 바람대로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주도권을 노리고 대공세를 기획하게 된다. 이번 새로운 작전의 목표는 대전과 안동을 잇는 선까지 진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벗어나 말을 해보자. 2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가 일선 부대의 작전에 일일이 개입했다가 독일군 멸망의 결과를 가져왔는데 모택동도 허욕과 전선 정보도 시원치 않은 상황에 과욕을 부리는 바람에 중공군의 대병력이 다음 5차 전역에서 몰사를 하게 됐다는 점에서 그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실수를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근대 전에서 주요 요소인 보급 또는 병참이라는 문제를 너무도 경시했다.
개전 이래 미군 공습으로 파괴된 중공군의 트럭만 3,400대나 되었다. 그래서 이런 대규모의 전역을 개시하면서 중공군이 아쉬운 대로 찾은 보급 방식은 사람이 끄는 수레 7,500대와 말이 끄는 2,000대의 달구지 동원이었다. 수나라 때 고구려를 친 수양제의 보급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현대의 대군이 대규모 작전을 전개하기에 너무 한심한 병참체계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중공군은 겁 없이 공격 전투에 뛰어 들었다. 적을 우습게 본 교만의 작전 심리학 때문일 것이다. 중공군이 계속해서 한반도로 증강되고 한반도에만 중공군의 숫자가 백만 명이 넘자 조심스러웠던 팽덕회는 드디어 1951년 4월 22일 대공세 펼쳤다. 전선에 투입한 병력만 5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유명한 5차 전역[五次戰役]의막이 올라간 것이다. [한국 쪽에는 중공군의 일차 춘계[春季] 공세라고 부른다.]
이렇게 압도적인 병력의 태풍을 휘몰아치는데 감히 이에 맞설 적군이 있겠는가하는 자만심을 모두 갖게 만들기에 충분한 공격이었다. 더구나 작전 개시 불과 열흘 전 맥아더와 앙앙불락하던 트루먼은 4월11일 맥아더를 해임시켜 버렸다. 팽덕회로 보면 승리를 예견하는 기분 좋은 전조였다.
중공군 5차 전역 - 붉은 화살이 중공군 공격 병력의 규모룰 말해준다.
전략은 서울의 재탈환이 아니라 중부전선에 큰 타격을 입히고 한국을 동서로 양분한 뒤에 남진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희망적인 일차 목표는 모택동이 원했던 대전과 안동선이었다. 이번 작전의 특징은 대부대 이동선과 병참선이 일단 서울 북방에서 비스듬한 하향선을 그으며 남동쪽 한강 상류 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4월 22일 황혼 무렵 38선 전 전선에서 포성이 진동했다. 중공군은 한반도 남부 석권을 노리는 대공세를 발령하였다. 좌익 돌파부대인 제40군이 쾌조의 진격 속도를 보였고 다른 20군, 26군, 27군이 쾌조의 진격을 보여 남한 영토 15킬로 이내까지 진격했다.
서부전선 임진강에서도 중공군은 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한편 63군과 64군은 십 여 개의 임진강 도하점으로 넘어 진격을 개시해 영국군 그로스터 연대의 일개 대대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섬멸해 버렸다. 영국군이 패전한 뒤 동남으로 이동한 이들의 공격으로 한국군 6사단이 사창리에서 큰 손실을 보았다. 반면 한강 하류에서 한국군 1사단을 공격했던 64군은 한국군과 미군의 선방과 미군 73탱크의 화력으로 공격이 돈좌되어 64군 사령관등과 일부 간부들이 해임되는 사태까지 보였다.
영국군 그로스터 연대
전역이 마무리 되는 5월 초, 팽덕회 사령부에서 중공군 간부들 회의가 있었다. 공격의 결과로 의정부, 가평, 춘천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그들의 목표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대량 동원했던 병력 규모에 비하면 그 성과가 기대 이하였다. 이미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유엔군은 아무 생각없이 북상 하다가 호되게 당했던 그 전의 유엔군이 아니었다. 대전- 안동선의 점령은 커녕 유엔군이 질서 있게 철수해 버려 한강 북쪽 일부를 점령하는 정도의 흐지부지한 결과만 얻을 수가 있었다. 이미 이 때 미군과 한국군은 중공군의 전략을 읽어 중공군이 공격해오면 포병 화력으로 최대한 타격을 하면서 질서 있게 후퇴를 했다가적의 보급이 떨어질 때쯤 되면 반격으로 반전하여 공격을 했다.
중공군 간부들은 이렇게 해서 후퇴한 적군들이 일부는 한강 이남에서 반격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공격은 최대의 방어였다. 회의는 다시 한 번의 공격을 하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일차 전역에서 이미 병참 물량을 다 소비했는데도 결과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대규모 전역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발상은 무리였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중공군 간부들은 수의 마술, 즉 병력만 왕창 동원해서 적을 덮치면 적은 무너진다는 잘못된 신념에 헤어 나오지 못했다.
미군 155밀리 롱 톰 장거리포의 포격 - 1951 봄, 서울 북방
5차 전역의 2단계,한국군이 2차 춘계공세라 부르는 이 전투의 목표는 여전히 거창했다. 북한강 이서 지역의 미군 3개 사단, 영국군 터키군의 3개 여단, 한국군 1,6사단을 섬멸하고 제천 단양으로 진격하는 옹골찬 목표가 다시 설정되었다.
팽덕회
작전은 새로이 인민군 제1군단이 배속된 제19집단군이 추가로 동원되어 경기도 고양에서 청평쪽으로 진격하고,한편 제9집단군과 제3집단군, 북한군 일개 집단군이 춘천 일대의 동쪽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그저 병력만 늘이면 다 된다는 전쟁 철학이 다시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1951년 5월 16일 황혼 무렵이었다.
5차 전역 2단계 대공세가 문을 열었다. 한국군에서 이를 2차 춘계 공세라고 부른다. 유엔군의 전선이 여러 곳이 뚫렸지만 중공군 사령부에서 보아도 초장부터 작전이 제대로 되어 가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중공군 간부 중에 지각있는 지휘관들은 한국 중부 전선에 엄청나게 투입했던 병력이 뒤섞이고 엉켜 엉망이 되어 작전 지도가 안되고 항공 공격에 부대가 노출 되는 것을 불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중공군이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대던 인해전술이 그 한계를 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의 진격은 가능했지만 미군과 한국군은 발 빠르게 후퇴해버렸다. 작전이 개시되고 불과 나흘도 안 되어서 9집단군과 3집단군의 사령관 등은 식량 고갈의 위협이 눈앞에 보이자 드디어 팽덕회에게 작전 중지를 건의했다. 팽덕회도 낙심천만이었지만 할 수없이 이의 검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식량이 거의 떨어져 63군 군장이라는 부 숭벽[傳崇碧]조차 뽕나무 잎을 끓인 물을 밥 대신 먹어야 했다.
이때 1개월 전부터 중공군의 틈을 노리고 있던 유엔군은 비로소 일제 반격에 나섰다. 미군은 이들이 지난달 4월 22일 공격을 위한 중공군의 부대 이동을 항공 정찰로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한국군의 정찰대를 투입해 추가 정보를 수집했었다. 그리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던 미군에게 중공군은 제2단계 작전을 전개하면서 허점을 보였다. 좁은 지역에 너무 무리하게 동원하였던 대 병력이라 은폐가 힘들었다. 서부 전선에서 중부 전선으로 긴 행렬의 인간과 우마차의 이동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노출됐다.
수송력의 부족은 길디 긴 손수레와 마차 대열을 서부에서 중부 전선으로 끊임없이 이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속도도 늦고 적재량도 적었으니 수많은 수레가 움직여야 했다. 그러니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섰던 수나라식 수레 부대가 미군의 항공 정찰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다. 작년 30만이나 되는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침투해 들어올 때에는 완전 기도비닉이 이루어져 미군에게 발각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물량이 너무 많았고 시간을 다투었던 이유도 있었다. 또 미군에 대헤서 느슨해진 경계심이 이런 주의성 없는 모습을 노출한 듯하다.
미군은 중공군 후방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부대와 수레의 비스듬한 소시지 행렬을 지켜보다가 차기 작전의 틀을 짰다. 횡으로 길게 늘어진 인원과 물자의 보급선 중 목 부분을 그대로 절단해 한반도의 중공군을 동서로 갈라놓자는 작전이었다. 중국이 무리하게 전개한 작전에서 획득했던 중공군 포로들로부터 이들이 보급은 물론 식량이 큰 부족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군 9군단과 10군단은 적군의 보급이 바닥 날 무렵인 5월 22일 전차 200대를 주축으로 보병과 장갑차들로 이루어진 태스크 포스를 앞세워 번개와 같은 반격에 나섰다. 실로 태풍 같은 화력의 역습이었다.
기갑의 공격은 적의 섬멸을 목표로 하는 포병과 달리 그 기동력으로 적의 급소를 찔러 붕괴 시키는 것을 목표에 둔다. 기록을 보면 이번 반격은 바로 이 원칙에 충실하게 적에게 숨 쉴 여유도 주지 않는 가차 없는 기동과 돌파의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의 성공에는 스피드가 중요하다.
1950년 혜산진에서의 M 4 탱크
10군단장 알몬드는 헬리콥터를 타고 선두에서 전차부대의 돌격을 지휘했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건 전차 부대가 정지하거나 기동이 느리면 그는 지상에 착륙하여 불호령을 내렸다. 무턱 댄 돌격 같아 보였던 태스크 포스의 공격은 그 결실을 거두었다. 200여 대의 전차들이 살갗을 찢고 뼈를 베어버리 듯 대군인 중공군 안으로 마구 뚫고 들어오자 턱없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적의 무지막지한 전차 육박에 중공군은 지휘와 통신 병참의 모든 신경계통과 순환계통이 토막 나서 문자 그대로 기갑부대의 목표인 붕괴 상태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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