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감 넘치는 으~리의 사나이들이 뭉쳤다!
그들의 애국심을 다시 일깨우는 의병의 날
▲1907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한 의병
(사진출처=위키백과)
축제와 연휴가 많았던 ‘가정의 달’ 5월이 지나고,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6월 1일이 ‘의병의 날’이라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의병의 날은 국가의 위기 시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난 의로운 민간병사들, 즉 의병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뜻에서 2010년 5월 제정된 국가기념일입니다. 오늘은 나라를 위해서 뜻을 모았던 의병의 활약상과 의병의 날 행사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역사 속 의병의 활약상
의병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국난 극복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병을 말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에서 희생을 무릅쓰고 군사들을 동원하지만, 민간인의 경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 내 나라, 우리 백성들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앞에 두고 목숨을 초개같이 내던지고 구국의 의지를 불태웠던 의병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의 거룩한 희생 덕분에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아, 많은 의병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때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1907년까지가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입니다. 역사 속에서 눈부시게 활약한 의병들의 모습을 소개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거름강 전투
(사진출처=의령군청)
# 농민·승려 등 임진왜란 당시 전국적으로 활약한 의병
임진왜란은 1592년,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입니다. 일본은 막강한 군사력과 신무기인 조총을 앞세워 우리나라 각 지역을 쉽게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장의 상황이 일본에 유리해지면서, 전직 관료와 사림, 승려들은 농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킵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공동체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길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의병을 조직하는 것은 매우 수월했습니다. 또한 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그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병들은 왜군의 대규모 군대에 맞서 정면으로 충돌하기보다는 매복하거나 기습공격을 하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의병의 활동으로 왜군은 전략상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의병은 직접 전투해 참여해 승리하기도 했지만,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의 사기를 높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는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 한말 국권회복에 앞장섰던 의병부대
(사진출처=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 조선인의 기개를 보여준 구한말 의병운동
임진왜란 이외에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외적과 맞서 싸운 의병은 1895년 을미의병과 1905년 을사, 정미의병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을미의병은 일제의 단발령 및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한 지방 유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항일의병운동입니다. 여기에 일반 농민과 동학 농민군의 세력이 가담하기도 했지요. 이들은 전국 각 지역을 무대로 군사 활동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충주를 비롯한 지방 주요 도시를 공격하는 한편, 친일 관리와 일본인들을 처단했습니다. 을미의병은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그 불씨였던 단발령이 철회되자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병항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자극만 유발되면 언제라도 의병활동을 재기할 수 있는 활화산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본격적으로 집어삼키려는 의도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합니다.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극도에 달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을사의병입니다. 을미의병이 해산된 뒤 은거 중이던 의병장들은 병력을 다시 규합하여 전국적으로 대일항전을 재개했습니다. 을미의병 당시 참여하지 못한 유생과 지사들이 을사의병에 대거 가담했습니다. 이와 같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된 을사의병은 정미의병으로 이어졌습니다.
▲ 한말 의병전쟁을 주도한 의병장들(좌부터 민종식, 최익현, 임병찬)
(사진출처=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일본은 1907년,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며 정미7조약을 체결하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또한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며 무력 저항 세력을 제거하고 나섭니다. 이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여 보다 확대 발전된 의병부대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정미의병입니다. 해산된 군인들의 참여로 정미의병의 무기와 세력은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여러 조직들이 연합하며 활동했습니다. 정미의병에는 상인•공인•노동자•농민 등 전 계층이 항일전에 동참함으로써 항일전쟁의 성격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큽니다.1910년 경술국치 때까지 이어오던 의병활동은 일본의 방해를 피해 점차 남북 만주•연해주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항전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습니다. 결국 의병들은 1920년대 장렬한 항일전을 전개한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한국 최고의 의병 축제, 의병제전
의병의 날 행사인 ‘의병제전’은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휘하 17장령과 의병들을 기리기 위한 축제입니다. 경남 의령군에서 열리는 이 축제는 종전에는 의병의 날에 맞춰 행사를 진행했지만, 농번기를 피해 최근에는 의병 창의일인 4월 22일에 열리고 있습니다. 행사 내용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혼불 채화식, 점화식, 진혼굿, 추모제 등으로 이뤄지며 그 외에도 불꽃축제나 소망등 점등을 통해 의병의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전국민속소싸움대회나, 의병 큰판장기대회 등이 개최되어 축제 관람객들의 참여를 높이며 의병제전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올해 축제는 끝났지만, 의병의 뜻을 기리고 싶은 분이라면 내년 축제에는 꼭 참여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과 애국정신이 더욱 숭고하게 느껴집니다. 의병의 날은 그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