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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대학살 - 중공군 대패의 춘계공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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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일이지만 춘천 청평 사이에서 미군 공격을 정면으로 받았던 63군장 부승벽, 60군장 위걸 등도 퇴각하다가 미군 전차부대에 덜미를 잡혀 차를 버리고 산으로 도주했다. 두 군장들은 산 두더지처럼 산길을 타는 고된 후퇴에서도 미군 전차들을 또 만나 공격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도주했다.]

 

 

 

반격의 주역 M26 퍼싱 탱크

  

전격전을 해보지 않았던 중공군에게 이런 빠른 역습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임진강의 그로스터 대대

  

무엇보다도 변변한 대전차 화기가 없었다. 미리 전차의 전진을 방해하는 대화구를 파놓는 다거나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하지도 않았고 대전차 지뢰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전차들의 기동은 아무 방해 없이 쾌속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불안한 조짐이 여기저기서 보이는 중에 한강을 건너 용문산 자락에 방어진지를 공격했던 187사 사령원[사단장] 서신[徐信]은 격렬한 저항에 공격이 돈좌되자 철수를 건의해왔다.

 

중국 측 기록은 이들의 진격을 가로막고 막대한 타격을 안겨준 부대가 한국군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고 있다. 마치 훨씬 더 강한 미군과 싸우다가 철수한 듯이 기록하고 있다. 이들을 용문산 기슭에서 막아낸 부대는 한국군 6사단 19연대였다. 연대는 적의 3개 사단이 공격해 왔지만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싸워서 이들의 공격을 좌절시켰다중국측 기록으로 보아도 한국군 19연대는 대단히 선방했다.

 

6사단 청성부대의 용사들은 선배들이 중공군 2차 춘계공세에서 거둔 승리에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서신이 지휘하는 187사는 그 전에 파주 설마리에서 영국군 그로스터 연대를 공격하여 한 개 대대를 섬멸해버린 부대였다. 그래도 부숭벽의 과단성있는 결정으로 타이밍에 맞게 철수했던 것이 63군을 그런대로 전멸의 위기에서 탈출하게 만들었다.

 

63군과 나란히 병렬해서 한강 상류 쪽 가평과 춘천 사이의 전선을 담당했던 60군의 180사는 한국 전쟁 최악의 운명을 만났다. 공세의 전면에 섰던 13집단군-60군과 63군의 상급부대- 사령관 진강(陳康)이 병을 얻어 후송되었기 때문에 부사령관 왕진산이 이번 5차 전역의 총지휘를 맡았다. 왕진산은 한국 전선에 투입된 지 몇 주밖에 안 되는 신참내기였다. 그는 현대전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우직한 자였다. 미군의 기계화 전투력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었다.

 

그는 미군이 아무리 강해도 서 너 배 되는 병력으로 밀어 누르면 제까짓 것이 버티겠느냐는 수준의 한심한 몽상만 가지고 이 중요한 5차 전역의 일선 사령관으로 투입되었다. 적의 반격이 점점 격렬해지기 시작하자 부상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왕진산은 60군 군장 위걸에게 180사를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미군의 반격으로 속출한 부상병의 후송을 엄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위걸 휘하 180사는 지시에 따라 한강을 건넜다. 180사는 압록강에서부터 열흘 간을 노숙하면서 순도보로만 그 먼 길을 걸어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던 부대였다. 사단장 정기귀[鄭其貴]는 한국군 상식으로 보면 이 중대한 시기에 도저히 일선 지휘관이 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중공군에는 소련군과 같이 정치위원이라는 공산주의 선전과 세뇌, 때로는 지휘관 감시 같은 업무를 맡은 인물들이 있다. 전 소련 수상 후르시초프도 정치 위원 출신이었고 [유명한 스타린그라드 공방전 - 그의 역할이 저격병 영화

에네미 엣 게이트에 나온다.] 중국의 실력자 등소평도 이 정치위원 출신이다. 그런데 이들이 정식으로 군사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일도 없는데도 때로는 부대 일선 지휘관을 할 때가 있다. 중국의 주은래도 대장정 때 군사 경력이 없었음에도 정치위원을 거쳐서 사단장을 했었다.

 

 

 

사단장 주은래

 

하여튼 우리 상식으로이해가 안 되지만 정치위원을 하다가 사단장이 된 정기귀는 성실하고 명령에만 충실한 그런 사람이지 야수적 감각을 발휘 할 줄 아는 정글의 파이터가 아니었다. 이런 형의 간부들은 평소 군대 행정이라는 틀 안에서는 유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야전의 상황에서는 터무니 없는 무능함을 보인다.

 

[러일 전쟁 때 아무 전략도 없이 러시아 발틱 함대를 극동으로 '인솔'하고 왔다가 전멸의 운명을 맞게 했던 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가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신속한 탈출이 필요한 엄연한 상황에서도 히틀러의 미친 사수 명령에 매달려 독일 6군을 소련군의 포위에 내맡겨 스스로 자멸의 길을 가게 만든 파우루스 원수와 같은 사람도 있다.]

 

 

 

독일 파우루스 원수 - 영리해 보이지만 무능해서 부하들을 몰죽음 시켰다.

 

 

정기귀는 일단 힘들게 한강을 건너 반대편 남쪽 강안에 붙었지만 상황이 심각한 것을 깨닫고 22일 군단장 위걸에게 도강 후퇴를 건의했다. 위걸은 13집단 군단장 왕진산에게 품신했으나 거절당했다. 드디어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폭풍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23일 그들의 측면에 느닷없이 미군 전차가 나타나 한바탕 사격만 주고 받다가 철수했다. 바로 이때 정기귀가 철수를 결정하고 상부 명령에 관계없이독단 전횡으로 전군을 이끌고 일단 강을 건너놓고 볼 일이었다.

 

 

 

M26 탱크 보전 합동 공격

 

 

 

전차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대전차 화기가 없는 부대에게 아주 안 좋은 비상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다. 전차가 나왔다는 것은 기갑의 수색 소대가 활동했다는 말이다. 수색소대는 전차의 기동로 확인, 적의 대전차 화력의 유무나 대전차 장애물 발견이 주요 임무이다. 수색 결과 전차 진격에 이상이 없다면 이 전차 수색 소대 뒤에는 전차 중대가 본격적인 돌격을 해온다는 것을 뜻한다.

 

전차가 나타났다는 말을 접한 정기귀의 부하들은 안색이 변했다. 닥쳐올 위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던 것이다. 적의 전차들이 그들의 배후인 한강의 북쪽으로 진출하면 180사는 통채로 포위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강의 상류 쪽에서는 미군이, 하류쪽에서는 한국군이 강을 건너 북진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정기귀는 60군 사령부에 철수를 건의 했으나 60군은 13집단군부사령관 왕진산의 지시에 의해 이 건의는 묵살당하였다. 정기귀의 부하들은 거듭 그에게 23일 야간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 후퇴하기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고지식한 정기귀는 명령 없는 후퇴는 있을 수 없다고 업무에 충실하기를 지시했다.

 

상급의 명령은 지상 명령이다. 상급의 명령은 결코 어기지 못한다.”

 

이 어이없는 하루의 지체가 사단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다음날 24일 미24사단 전차부대는 그들의 배후를 덮쳐들어 성황당 고개에 배치해 놓은 180사 포병대대를 전멸시키고 사단의 퇴로를 차단해 버렸다.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은 60군단은 숨 넘어 가는 다급한 지시를 연달아 내려 보냈다. 단 하루의 지체가 사단 병사 10,000명의 목숨을 결판 낸 것이다. 그날 밤 24일 심야에서 25일 새벽까지 180사가 필사적으로 감행한 때 놓친 도강은 끔찍한 도살 현장을 연출했다.

 

야간임에도 미군기들이 날아와서 조명탄을 던지고 로켓 공격과 기총소사를 하였다. 이미 강북 안에 자리 잡은 한국군과 미군들은 강에 얼씬 거리는 물체들에 대하여 사정없이 포문을 열었다. 날이 샐 무렵 한강 주변에는 죽은 중공군 시체들로 눈을 뜨고 볼 수없는 잔혹한 지옥도를 연출했다. 강을 건너 강북의 산에 붙은 병사들은 그들이 나아갈 북쪽은 미군 24사단의 전차와 보병들에게 차단되고 그리고 26일에는 미군 7사단이 서부를 차단했고 한국군 6사단이 지암리 지구로 진격해서 앞길을 막는 최악의 사지(死地)에 몰려있는 절망적 상황을 발견해야 하였다.

 

180사가 나갈 길을 모두 막아놓고 한국군과 미군은 그날 하루 종일 포위망 안의 중공군들을 섬멸했다. 미군 전차 부대와 보병부대는 골마다 진입하여 민둥산에서 방황하는 180사단의 병사들에게 포화를 퍼부었다. 정기귀는 지휘는 커녕 간부들과 함께 살기 위해 정처 없이 산골 길을 따라 도망 다녀야 했다. 그러나 도주도 한계에 달하자 사단장 정기귀는 사단 사령부 간부들을 모아놓고 앞으로의 살길을 투표로 결정했다.[위기의 부대 지휘관 답지 못한 행위이다.]

 

각자 알아서 도주하자는 결론이 나와 사령부는 해체되어 각자 헤매게 되었다. 정기귀는 산속을 기약 없이 먹지도 못하고 며칠을 헤매다가 미군 전차 부대에게 전차포 사격을 받아 대부분의 요원들이 죽고 그와 정치위원 등의 소수만이 530일에야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60군을 찾아 왔다. 사실 중공군이 미련하게 전개한 5차 전역 2단계는 미군의 대반격을 불러왔고 한반도 중부 한강가에서 공세의 선봉에 섰던 부대는 거의 붕괴되어 버렸다.

 

중부전선에서의 중공군 붕괴를 보자 유엔군은 한국 전선에서 총반격을 명했다. 팽덕회의 대군은 미군과 한국군의 반격을 받고 전 전선에서 맥없이 지리멸렬하게 후퇴해버렸다. 반격의 선봉에 섰던 미군은 말한바와 같이 탱크 부대를 앞세우고 종횡무진으로 중공군을 살육했다. 한국 전쟁에서 전차들이 여러 번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번 반격에서처럼 최고의 위력을 발휘한 일은 없었다.

 

보병을 동반한 전차부대는 중공군의 방어선을 찢고 내부로 뛰어든 뒤 공중에 떠 있던 정찰기로부터 퇴각하는 중공군 부대의 발견을 통보받으면 골짜기 안에라도 서슴치 않고 진입해 전차포와 기관총으로 중공군을 제압하고 또 다음 골짜기나 마을로 이동하여 방황하는 중공군들에게 사정없는 화력을 선물했다. 이에 후속하는 보병화력이 합세했다.

 

 

 

중공군 시체의 더미 - 1950111일, 장진호 진입전 수동에서 미해병 7연대에 대패한 중공군 124사단의 전사자들 사체

 

 

전차가 기동하며 보병을 이렇게 공격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은 전사 연구가들에게 다소 낯설 수도 있다. 전차의 최대 목표는 적의 전차인데 말이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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