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시리즈 -1]
北 소대장이 겪은 오산 죽미령 전투 -3-
북한군은 6.25전쟁 전에 국군들과 옹진 반도와 개성 송악산등 여러 곳에서 시비를 걸어 오며 국군의 전투력을 실험했었다. 그 경험으로 북한군은 남조선 ‘괴뢰군’은 자기들보다도 허약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었고 또 그렇게 의도적으로 북한군 병사들을 교육시켰었다.
사실 북한군은 소련으로부터 원하는대로 무기를 지원받아서 전투력이 국군보다 훨씬 우월했었다. 반면 국군은 미군의 비협조로 무장에 있어서 북한군에게 열등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는 한 량도 없는 전차가 북한군에게는 242량이나 있었던 사실이 그 한 사례일 것이다.
전쟁 전 국지전에서 국군이 사거리 짧은 단포신의 105mm 포밖에 없었는데 북한군은 장사정의 122mm포로서 국군을 타격했었다. 이런 장거리포의 존재는 일선 전장의 피아 군병력들이 전투력 차이를 피부로 느끼게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무기의 차이는 있었지만 6.25 전쟁전의 국지전에서 국군이 그렇게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지는 않았었다. 북한군은 병사들의 사기 진작용으로 국군의 상대적 열등함을 그렇게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 선생도 그런 교육을 받아서 남침 전에 국군과의 전투에 자신감을 가졌다고 한다
“ 남조선군들이 우리들 상대가 안 된다고 확신하고 38선을 넘었습니다. ”
그는 미아리 전투에서 18연대가 한번 밀으니까 국군들이 맥없이 무너져서 도망치더라고 하며 그 뒤에 국군이 형편없이 약한 적이라는 사실에 더욱 자신을 가졌다고 말했다.
[6.25 전 여러 도발 전투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국군에게 충격을 준 122mm포]
박 선생의 국군을 경멸하는 말은 내가 듣기에 거북했지만 그 분에게 그런 느낌이 있을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미아리 전선에 육군과 함께 아무 군사 훈련도 받지 못한 서울 시경 경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경찰대는 전투 개시 직후 사상자가 발생하자 모두 공황에 빠져 도주했었다. 박 선생은 그 때의 인상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는 것 같았다.
박 선생은 미아리 전투에서 국군이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었다. 서울 북방의 마지막 방어선을 뚫은 18연대는 서울 시내에 무혈 입성해서 중앙청까지 와서 주둔했다.[박 선생는 이곳을 조선 총독부라고 불렀다. 중앙청이라는 것은 건국 후 남한 정부에서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북한군이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1951년 9월 28일 중앙청을 점령하고 깃발을 거는 해병들]
휴전 후 연출 된 사진임. 실제로는 돔의 꼭대기에 게양
북 4사단 18연대가 여기서 북한기를 올리고 3개월만이다.
박 선생은 중앙청을 점령하고 ‘남조선 해방’이 완료되었다고 생각했다. 상관들이나 동료들과의 평소 대화에서도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즉 북한군은 서울이 전쟁의 최종 목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한은 해방을 목메어 기다리고 있었고 북한의 해방군이 수도를 점령했으니 이제 남한 도처에서 남조선 괴뢰군과 경찰들을 잡아 족치는 인민 봉기가 일어나리라는 기대가 너무도 컸었다.
18연대는 서울시 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명령을 기다렸다.그러나 미군이 참전한다는 소식과 함께 그들에게 내려온 명령은 계속 진격하여 최대한 빨리 부산을 점령하라는 작전 명령이었다.
“뭐가 잘 안 되어 가는 모양이구나.”
박 선생은 일말의 불안감을 느껴지기도 했으나 남한 국군에 대한 우월감이 워낙 컸기에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였다. 이어서 지급 받았던 일제 99식 소총을 모두 소련제 모신 나강 소총으로 교체하는 소동을 거쳤다.
[4사단 18연대가 중국에서 사용했었던 일제 99식 소총]
7월 2일, 4사단 18연대는 남한 진격의 선두에 서서 한강을 도강하라는 명령에 따라 한강을 도강하였다. 당시 남북한 군대가 그렇게 했지만 최강 부대가 공격의 최선봉에 서는 룰이 여기서 적용된다. 일부 조선족 부대인 105여단의 83 기계화 연대[모터 사이클 부대]가 38선 돌파의 선두에 섰었는데 아마 서울 점령 작전에서 4사단 18연대가 더 강한 전투력을 보유했다고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선두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잠깐 이 글의 주제와 약간 거리가 있을지 몰라도 이 무렵의 북한군이 서울에서 사흘간이나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해서 국군에게 철수와 재편성의 시간을 주고 미군의 참전 결단의 여유를 준 사실에 대한 여러 이설들이 많아 여기에 간단히 필자가 분석한 사실들을 밝혀 놓는다.
먼저 오랫동안 한국 전사에 전해 내려온 한 가설을 살펴본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춘천 돌파 후에 측면으로 공격해오는 북한군을 기다려 서울의 국군을 양익 포위(兩翼包圍)하고 한국 정부까지도 사로잡는 작전 목표에 너무 매달려 춘천 방면의 북한군이 측면으로 접근하기를 기다렸다는 설은 이제 분명히 정리 할 시기가 왔다.
첫째, 양익포위해야 할 목표인 국군이 한강 이북에 존재하여야 이 작전이 의미가 있는데 국군은 이미 큰 타격을 입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상태다. 목표 부대가 다 도망했는데 양익포위고 뭐고 할 의미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양익포위를 하려 했다면 그렇게 먼 춘천에 병력을 투입해서 장거리의 넓은 포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장거리 포위는 국군이 탈출할 시간적 여유를 준다. 가설적으로 말한다면 포위망을 더 좁혀 포위 부대를 구리- 청평 사이로 우회 돌진 도강시키는 것이 시간과 거리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볼 수가 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