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 싸운 바다의 사나이, 이태영 해군 중령
바다에 목숨을 바친 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바로, 고(姑) 이태영 중령입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함과 뛰어난 작전 수행 능력을 발휘해 지금까지 많은 해군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과감한 통솔력, 각별한 전우애로 빛나던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진정한 군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한 이태영 중령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대한민국 해군의 네 번째 전투함, 704함(지리산함)
704함(지리산함)은 우리 해군에서 가장 역사가 짧은 군함입니다. 하지만 짧은 역사에 비해 704함 이 세운 공은 그 어떤 함정보다 더 위대합니다. 1950년 7월 25일 미국 하와이에서 진해항으로 온 704함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바로 통영상륙작전이었습니다. 당시 북한군에게 통영까지 내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는데요. 704함은 최일선에서 적군에 맞서 활약하며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엔군의 군함이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원사격을 할 때 704함은 해안가 바로 앞에서 3인치 포사격을 하며 상륙작전을 적극 지원했다고 합니다. 이를 본 유엔군과 우리 해군 관계자들은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을 인용해 704함을 ‘고추함(Hot Pepper Ship)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위험을 무릅쓴 해안 사격으로 적극 혁혁한 공을 세운 704함을 이끈 함장이 바로 이태영 중령입니다.
바다에 뛰어든 사나이
1927년 11월, 서울 마포에서 태어난 이태영 중령은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해 1946년 12월 임관했습니다. 1949년 8월 그는 첩보부대 파견대장으로, 납북된 미군 고문관의 전용보트를 되찾기 위한 몽금포기습작전에 참가했습니다. 이 작전에서 그는 북한군 경비정 1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제704함, 즉 지리산함의 함장을 맡아 서해봉쇄작전, 동해경비작전 등 주요 작전들에 참가해 해상 요충지역 확보에 기여했습니다.
성공적인 작전 수행 끝에 온 비극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 24일. 이태영 중령은 동해안봉쇄작전을 위해 704함을 이끌고 원산해역으로 출항했습니다. 이때 원산 영흥만을 경비하던 한국과 유엔군 함정들은 적 해안포의 치열한 공격이 시작되자 대부분 안전지역으로 이동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704함은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돌진, 적의 포진지를 제압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틀 뒤인 12월 26일, 이태영 중령은 북한군이 야음을 틈타 기뢰와 각종 보급품을 원산항으로 운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날은 폭설과 풍랑이 심한 날이었음에도 그는 해안으로 함정을 신속하게 접근시켜 적의 보급소를 파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렇게 임무를 완수한 704함은 폭설과 풍랑을 헤치며 귀항 도중 그만 북한군이 설치한 기뢰와 접촉해 이태영 중령 이하 승조원 57명이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태영 중령은 당시 704함 함장을 이임하고 곧 특수작전 지휘관으로 투입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후임 함장이 부임하기 전 마지막 작전을 떠나면서 그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 지리산함 장병들과 성탄절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며 기쁨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전우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던 이태영 중령은 결국 그가 그토록 아끼던 승조원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태영 중령의 공을 치하하며 그에게 1계급 특진을 추서하고 화랑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는 현재 현충원 19묘역 5판 25호에 안장되어 있으며,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승조원 57위 중 31위는 19번 묘역에, 7위는 21번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시신을 찾지 못한 나머지 19위는 위패로 모셔져 있습니다.
704함과 이태영 중령, 승조원들의 활약상은 지금까지도 우리 해군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 조국이 지금처럼 번영하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들께서도 오늘만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태영 중령과 704함의 승조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