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시리즈 -2]
北의 뻔뻔한 억지“억류한 국군 포로는 한 명도 없다?” -2-
포로들의 배고픔과 질병에 대한 공포를 교묘히 알고 그 허점을 파고 든 북한군 정치 장교의 음흉한 술책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치 장교들의 ‘사상 교육‘이 아닌 ‘모병 선전’ 시간이 끝나고 나서 국군 포로들은 모두 삼삼오오로 모여 앉아 북한군 지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60년만에 북한을 탈출하여 돌아온 국군포로
뜻 밖에도 북한군 지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여기에서 배고픔과 발진티프스로 죽는 것보다는 인민군에 입대하여 일단 살고 봐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논들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북한군에 지원을 하고 포로 수용소의 지옥을 떠나간 국군 포로들이 많았었다.
정치 장교들의 교묘한 설득에 박 선생조차 한때 휘청거리기도 하였다.
“그렇다 이대로 여기에 있으면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북한군에 입대하면 차별없이 대우해주고 배불리 먹여준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의 처지로서는 나도 북한군에 입대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민하던 박 선생은 곧 이성을 찾았다.
먼 미래를 생각하면 그것은 안 되는 일이었다. 남한에는 부모도 있고 자신은 미래가 보장된 의과 대학의 학생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북한군에 편입하여 졸병 생활을 한다면 높아져봤자 얼마나 높아질 것인가? 신분 상승을 위해서 장교가 되는 방법이 유일하지만 틀림없이 국군 포로들에게는 이 길이 봉쇄되었을 것이었다.
“죽더라도 버티어 보자!”
박 선생은 이를 악물고 버티어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박 선생 주변 전우(戰友) 중에 이 유혹에 굴복한 사람이 있었다. 박 선생과 같은 대구 의대 일년 선배인 백씨라는 분은 정치 장교의 유혹 직후에 무척이나 흔들렸다. 며칠 뒤에 박 선생을 만난 그는 북한군에 지원하겠다는 결심을 털어 놓았다.
그는 놀라는 박 선생에게 말했다.
“ 이 곳이 어떻게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습니까? 하루에 적을 때는 20명 많을 때는 50여명이 죽어 나가는데 내가 끝까지 살 수 있을까요? 나도 곧 죽을 것 같습니다.“
놀란 박 선생은 백씨를 만나 다시 설득했다. 그러나 그 설득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이 벽동 포로 수용소에 이대로 있으면 산다는 보장도 없다. 더 이상 죽음을 벗어나겠다는 그의 본능으로 결집된 결심을 어떻게 말려 볼 수가 없었다.
말리는 박 선생에게 결심을 바꿀 수가 없다고 고집을 피우던 백씨는 부탁의 말을 했다.
“ 박 형이 살아서 집에 간다면 내 집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경북 대학 병원의 남쪽 교회가 있는 골목 길---“
그는 상세하게 자신의 집을 가르쳐 주었다. 그를 설득하기를 단념한 박 선생은 머릿 속에서 그 길만은 외우고 또 외웠다. 10여 일이 지났을까 ?그가 백씨를 만나러 갔더니 자리에 없었다. 물어보니까 벌써 북한군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박 선생이 포로 교환이 되고 대구에 있는 집에 돌아 온 후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백 씨의 집이었다. 백 씨가 그때 자기에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신혼의 아내가 있었고 귀여운 딸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있었다.
박 선생이 백 씨의 소식을 전했을 때 온 집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그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박 선생은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울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그는 도망치듯 백씨의 집을 뛰쳐 나왔다.
귀환하는 국군 포로들
박 선생은 지금도 가끔 백씨와 그 가족을 생각해본다고 말한다. 그때 북한군 정치 장교가 학습이라는 이름의 술책으로 그를 북한군에 입대시키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의대를 자기와 같이 대구에서 개업을 한 의사가 되어있지 않는가 하는 그리움을 묻힌다.
박 선생과 같이 입대했다가 포로가 되었던 대구 의대 동창들이 여러 명이 있었다. 그러나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포로 수용소에서 죽었거나 백씨와 같이 북한군에 강제 입대되어 돌아오지 많았던 것이다. 북한은 유능한 의료인으로 좋은 인생을 살아갔을 대구의 젊은이들의 운명을 모두 박살내버린 것이다.
중공군 포로들
그는 무려 33개월의 긴 세월을 포로로서 고통스런 생활을 했다.포로 교환에 따라 반기던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국가는 그의 희생을 외면했다. 남해의 외딴 섬 용초도에 격리되어 조사와 교육을 받고 전방 7사단에 보내져 남은 기간의 군복무를 하여야 했다. 그는 무려 4년이나 지각 편입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정형 외과 의사가 되었다.
북한군은 왜 이렇게 적군이었던 남한의 국군 포로들의 북한군 편입에 공을 들였을까 ? 북한의 절실한 필요가 있어서였다. 남한보다 인구가 훨씬 작았던 북한군의 6.25 전쟁 도발 이후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렸다.
전투 병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유엔군이나 국군에 비해서 차량도 턱없이 부족했던 수송 분야와 건설 수리등의 공병 분야나 방공이나 해안 감시 분야에 다수의 인력이 필요했었던
북한은 혈안이 되어 그 확보에 열을 올렸었다. 1950년 9월에 지리산 부근에서 전투 경찰에게 붙잡힌 북한군은 나이가 50대가 다 된 사람이었다. 만포진 부근에서 살던 그는 정식으로 영장을 받고 군에 끌려와서 훈련을 받고 남쪽 전선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북한은 늙은이만 끌어오지 않았었다.낙동강 전선에서 포로로 붙잡힌 북한군 포로들은 10대가 많았었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작전에서 미군에게 투항한 북한 소년병
북한군은 그렇게 무리한 방법을 써도 인력이 부족하자 남한의 의용군들을 강제로 징집해서 총알받이로 내보냈었다. 의용군 징집은 서울 점령 열흘 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 인력 부족은 초기부터 심각해지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국군 포로들이야 말로 이런 인력의 부족을 메꾸어 줄 중요한 자산들이었으니 북한 당국이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포로 수용소를 떠나 북한군에 편입하는 순간부터 국군 포로는 제네바 협정이 규정하는 포로가 아니라 귀순자로서 취급된다. 그래서 북한은 교활한 방법으로 포로들을 죽음에 몰아넣고 강제로 북한군으로 편입시킨 뒤 포로는 한 명도 없다고 억지를 썼던 것이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