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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특집 시리즈 -3 6.25 남침- 국군이 그렇게 무력했었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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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특집 시리즈 -3

6.25 남침- 국군이 그렇게 무력했었나? -6-


지금까지 국군이 서울 북방에서 붕괴 수준의 대패배를 맛보았던 이유들을 인재적 (人災的) 사고라는 시각에서 분석해보았다.


그 시각을 전투의 포탄과 혈흔이 난비하던 현장으로 연장하여 무기의 차원에서 들여다보자.국군 장병들을 방어선에서 밀어 내버린 전투의 주인공들이 있었다. 북한의 T-34 전차 들이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남침 초기 북한의 T-34 전차 부대가 어떤 전투력을 발휘했는가를 상기할만한 역사적 증언이 있다.독일과 이스라엘이 그들의 군사 전략으로 채택했었던 전격전[電擊戰-간접 접근 이론]의 개발자 영국 베이질 리델 하트는 2차 대전 후 유럽의 전쟁을 분석한 저서에 전쟁 초반 독일에게 그런 신속한 승리를 안겨준 주인공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독일의 유럽 정복의 일등 공신은 하늘의 메사슈미트 전투기들도 아니었고 바다의 유보트들도 아니었다.독일에게 거침없는 승리를 선물 해 준 것은 육상의 독일 마르크 전차들이었다.” 

전략 무기로서 탱크가 독일군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주역이었다는 말이다. 


한국 전쟁사를 전차의 눈으로 보면 이 증언이 유럽이 아니라 6.25 남침 시 한반도의 서울 북방에서 정확히 적용 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 할 수가 있다. 유경수의 105 전차 여단 T-34들 김일성 일당이 고대하는 기능을 100% 발휘 했었다.


서울 북방에서 크게 당했던 국군의 간부들은 이렇게 회고하고 했었다.

”북한군에게 전차만 없었어도 해볼 만했다.”

전쟁 전 북한이 소련의 도움으로 빠르게 전력 증강을 하면서 갖춘 무기들 중에 국군에게 가장 두려운 무기들은 국군의 단(短)포신 105mm 포보다도 사거리가 두 배 이상 길고 위력이 큰 122mm 포를 포함한 다량의 포들과 국군이 한 량도 가져 보지도 못한 전차들이었다.


국군은 특히 이 문제들 중에 전차의 존재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고 미국에게 60량의 전차 원조를 요청했으나 돌아온 것은 싸늘한 대답이었다.

“ 산이 많은 한국 지형은 전차 운용에 부적당하다.” 

산이 많다고 하나 한국은 인구 조밀 지역으로서 비록 포장 상태는 안 좋지만 전차 기동이 가능한 도로가 조밀하게 구성되어있고 도시나 교량등의 전술 전략의 목표가 모두 이 도로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북 아프리카나 소련 같은 광활한 대지에서나 가능한 전차 부대의 대 기동전은 불가능하다해도 이 제한된 한반도의 상황에서도 전차들은 얼마든지 전과를 올릴 수가 있었다.


미 고문단은 전차 대신 국군이 장비한 2,36 인치의 로케트 포와 57mm 대전차포가 충분히 북한 T-34를 격파할 수 있으리라고 역설하며 전차 공급의 거부를 확실히 했었다. 


필자는 이 번 글보다 앞선 오산 전투 글에서 북한 105 전차 여단의 유경수가 서울 북방에서 전차를 앞세운 돌격에 국군이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의기양양하여 보전포 합동같은 시간 걸리고 복잡한 전술을 버리고 전차만으로의 돌격하는 작전을 실행했다고 했었다.


전차를 처음 본 국군의 공포는 대단했었다 .전차가 전방 도로에 나타나서 포탄을 퍼부으면 보병들은 진지를 이탈하여 도주하곤 했다. 북 전차가 보병에게 준 피해를 한 사례를 본다면 미아리 북쪽에서 적 전차의 85mm 포탄을 대피하다가 피격당한 1 연대장 함준호 연대장의 전사를 들 수가 있다.


전차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무력감과 괴물 같은 전차를 처음 본 인간 본연의 공포감, 그리고 북 T-34전차가 퍼붓는 화력은 국군 장병들을 본능적으로 전장 이탈을 하게 유도했다. 전차 공격에 놀란 장병들이 적전 이탈, 즉 도망을 쳤으니 군대가 붕괴되지 않을 수가 없다.


비겁해 보일 수도 있던 이 장병들의 전선 이탈 현상은 이해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미군의 기록이 있다. 독일군에서는 전차의 돌격을 당한 보병들이 집단 공황에 빠지는 심리적 현상을 일찍부터 전차 공포증으로 파악해서 분류해 놓았다는 사실이 있다. 영어로 번역한 그 전차 공포증의 이름은 ‘armor fever’이다. [독일 원어는 미상]. 




사상최대 전차 공포증은 1917년 11월 20일.프랑스 캉브레 지역에서 당시 최신 무기인 마크 4 탱크를 500대나 투입했던 영국군의 대공세에 당한 독일군에게서 집단으로 발생했었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괴물같은 영국군 전차가 소낙비같은 기관총탄을 뒤집어쓰면서도 굴러오자 독일 병사들은 혼비백산해서 도주했다.

공동이 캉브레 전투의 미니형인 집단 전차 공포증에 의한 진지 붕괴가 동두천,포천 -서울 가도 여러 곳에서 발생하여 국군 방어선에 파공(破空)들을 만들었다.


이미 전쟁 전부터 북한의 전차가 심각한 위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국군이 미 고문단 말만 믿지 말고 구체적으로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국군은 전차 같은 공격용 무기가 원조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예상도 했을 법한데 거절당한다면 차선책의 협상를 강구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전차의 위력을 미리 알아서 전차 원조를 미국에 요청했었던 국군인데 미국이 거절했다고 그냥 무대책으로 있었다는 것이 유감스럽다.


당시 미국에서 처치곤란이었던 90mm 대전차 직사포를 대신 원조 교섭을 해볼 수도 있었겠으나 이것도 여의치 않았다면 기존 105mm 포에서 발사할 수 있었던 대전차 포탄[HEAT]이라도 넉넉하게 확보하는 교섭이 필요하지 않았었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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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포병에 극소량 공급되었던 이 대전차 포탄으로 포병의 김풍익 소령은 T-34 전차를 격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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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저것도 안 되었다면 눈앞에 닥친 북한 전차에 대비해서 대전차 지뢰의 국내 생산도 아쉬운대로 시도해 보았었다면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 공군 훈련기 건국호에서 투하한 폭탄도 국내 생산이었던 사실을 볼 때 대전차 지뢰의 국내 생산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여튼 북한군의 전차 도입에 미온적인 태도에 군 수뇌부가 너무 대안을 찾는 노력이 전혀 하지 않았었는데 또 대전차 전투 교육이라도 실시하였더라면 전차 공포증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전장에서 무적의 행패를 부린 북의 전차대에 대해서 걱정만 했지 아무 대책도 없었던 것이 유감스럽다.


지금까지 국군이 서울 북방에서 당한 붕괴 수준의 참패에 대한 인재적[人災的]인 원인들을 둘러봤다. 


말을 글 앞으로 돌려서 다시 시작해본다. 그러면 외국의 언론들이나 미군 당국자들이 비웃듯 남침 초반 국군이 그렇게 무력하게 밀리기만 했었던가?


그렇지는 않았다고 역설하는 미국의 전사가가 있다.국군의 초기 대응에 대한 평가 절하의 말들이 주류를 이룬 서방의 전쟁사 기록물들에서 개전 초기 국군이 남침 저지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기술한 역사서가 있다는 말이다. 


그 책은 1962년도에 미국에서 출판 된 ‘이런 종류의 전쟁[This kind of war]'이다.이 책은 한국 전쟁에 관한 부동의 최고 저술로서 지금도 한국 전쟁 연구자들에게 바이블 같은 존재다. 



작가는 시어더 리드 페렌바크다.[1925년 1월12일-2013년 12월 1일]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역사가이고 컬럼니스트다. 평생 20여권의 책을 발간했다. 한국전에 관한 그의 저서는 출판되고 나서 2년 뒤에 한국에 번역되어 출판되었었다. 번역자는 안동민 씨인데 지금 읽어봐도 비할 바 없이 잘 된 군사물 번역이다


그는 한국전 당시 장교로서 참전했었다. 당시의 미군내 시각과 달리 국군에 대해서 안목과 이해가 깊은 점으로 보아 혹시 그가 미 군사 고문단[KMAG]에서 근무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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