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시리즈 -3]
6.25 남침- 국군이 그렇게 무력했었나? -7-
미군이 투입된 후 미국의 신문은 한국군의 활동과 상황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 전쟁에서 한국군이 한 역할을 이해한 미국인은 적었고 또 그것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 되었다.
전투 초의 수주일 동안에 극히 미미한 화력의 형편과 간부급의 미약한 훈련 수준으로 인해 서부의 한국군은 대체로 파멸되었다. 대다수의 장병들은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동부의 한국군 각 사단은 처음 모습을 대체로 그대로 지닌 채 반도를 남하하면서 지연 전투를 전개하였다.
아직도 미국 최대 상거래 업체 아마존에서 팔리고 있는 페런바크의 저서
7월초, 미군 장교들은 한국군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한국군 간부들의 사상자 수가 막대했고 또 미군 자체의 장비도 극히 미약했기에 어려운 과업이었다.
그러나 7월 24일까지는 5개 사단을 거느린 2개 한국군 군단이 편성되고 장비를 갖추었다. 그 장비는 그 때도 그러했지만 전쟁의 나머지 기간 전체를 통해서 미군 사단의 장비에 비할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한국군의 포병력과 지원 탱크 병력은 전쟁의 잔여기간을 통해서 보잘 것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 투지는 왕성했다. 1950년 7월을 통해서 한국군 각 부대는 계속 전투를 수행했다. 많은 부대가 훌륭한 전투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것은 사상자 수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전투의 처음 6주일간 미군의 희생자 수는 6천명이었으나 한국군 전사자 부상자, 행방불명자는 7만을 헤아렸다.
미국의 지원이 없었던들 대한민국은 전면 붕괴했을 것이지만 한편 3년 동안의 전쟁에서 병력의 가장 큰 부분을 계속 부담하였던 것은 대한민국이었다.
국군의 단포신 105mm 포 사격
1950년 여름 한국군 희생자의 숫자는 하나의 결정적인 사실을 가리킨다. 승승장구하는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한국군은 여러 번 적에게 결정적인 손실을 입혔다.
당시 미군 장교들은 적의 피해를 한국군의 작전에 의한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한국군 부대들은 전멸의 운명을 무릅쓰면서 북한군의 여러 연대와 심지어 사단까지도 파멸시켰다. 이것은 후일 노획된 북한군의 문서를 통해서 비로소 판명된 것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활약한 국군 기병대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로 후퇴했을 때 미군 장교들은 그 때까지의 괴뢰군 인명 피해를 3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그러나 실지의 북한군 숫자는 북한군 편제 병력의 반에 불과하였다. 그 11개 사단의 총 전투 병력은 7만 명을 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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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앞서 언급된 “전멸의 운명을 무릅쓰면서’의 부대는 서울 북방에서 붕괴해버린 국군 7사단을 말하는 것이며 국군에게 파멸된 북한 연대.사단은 아마도 남침 중에 국군 7연대[충북 동락리]와 17연대 [경북 화령장] 그리고 다시 19연대[경북 영천]에 연타(連打)를 당하고 사단 사령부까지 박살났던 북한군 최약체 사단 15사단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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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글머리에서 소개했던 한강 북방에서 참패한 국군의 한심한 상태를 질타했었던 맥아더의 육군성 보고서의 내용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페렌바크가 국군의 분전에 대해서 높게 평가한 것도 결코 과장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둔다.
서방 세계에 국군의 부정적 이미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전투는 물적으로나 심적으로 아무 준비가 안 되었다가 몇 배 우세한 적 병력에게 당했던 서울 북방 7사단 정면의 전투였었다. 국군이 붕괴 수준의 대 참패를 당했던 것은 이곳은 북한군이 유일한 기갑 부대인 105 전차 여단을 포함한 침공 주력을 집중했던 전선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밖의 전선에서는 국군들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압박에 지연전을 펴가며 축차로 철수를 했을망정 서울 북쪽 전선같이 부대가 붕괴하는 처참한 패배는 당하지는 않았었다.[이 점을 페렌바크가 지적했음에 유의]
북한군은 서울 외의 전선에서도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국군을 공격했었다. 국군 각 1개 사단에 두 배인 2개의 사단을 배치하고 여기에 전차 부대, 하다못해 자주포 부대라도 지원 배치해서 공격했으며 국군이 두려워하던 122mm를 포함한 76mm 포의 포병 화력을 집중 동원했었다.
그리고 중국 내전에서 충분한 전투 경험을 쌓은 조선족 사단들이 38선 전역의 공격에 가담하여 남침의 선두에 섰었다. 조선족 사단 병력은 남침 최전선 배치 선봉 병력의 46%에 달한다. 당시 국군 사단 중에는 사단급의 실전 경험은 커녕 사단급 훈련을 해본 곳이 단 한 개 사단도 없었다.
이런 양적(量的), 질적(質的) 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38선 전 전선의 국군들은 잘 싸웠다. 맨 서쪽 1사단은 북한군을 잘 받아쳤고 한 때는 여유가 있어 의정부 쪽으로 적 측면을 찌르는 역습까지도 계획하기도 하였다. 비록 서울이 함락되고 철수로가 막혀 붕괴 수준으로 후퇴했지만 1사단은 그 후 화력과 병력을 제대로 갖춘 뒤에는 전투력을 발휘해서 다부동 대첩과 평양 점령의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사단을 공격한 북한군 사단 중 6사단은 조선족 사단으로서 국공 내전 때 만주의 심양을 함락시킨 사단이었다.
중부 전선의 6사단은 초전에 가장 잘 싸운 부대였으며 북한군 2사단 선두 연대를 격파하고 비록 수 킬로지만 역습까지 했었다. 이 방면의 양구 쪽에서 공격해온 7사단[안동 점령 후 12사단으로 개칭]은 양자강을 건너 중국 남부로 진격해 들어갔었던 조선족 사단이었다.
그리고 38선의 최우측이며 한반도 동해안 전선에 배치한 8사단도 서울 북방 국군 7사단처럼 단 2개 연대 뿐인 약체 병력으로 힘겨운 전투를 하며 지연전을 했었으나 크게 패한 전투를 하지를 않았었다. 이곳을 공격했었던 조선족 5사단은 국공내전 때 만주국 수도 장춘의 포위전에 참가했었던 부대였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수도권만 빼놓고 국군은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지연전을 하며 철수를 했었지만 서울 북방처럼 사단이 붕괴되어 버리는 대참패를 당하지는 않았다. 국군은 오로지 서울 북방에서만 전투감각 없었던 채총장의 철수 거부와 한강교 조기 폭파로 인해서 사단의 궤멸(潰滅)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했던 것이다.
대참패를 당한 서울 북방의 국군 전투에 대해서도 덧붙일 말이 있다. 이 방면 국군 부대가 비록 북한군의 전차대에게 당해서 도망가는 실수를 여러 번 저질렀지만 이 전선에서 기적적 전투들이 전개되었었다. 북한군 전차들에게 육탄 공격을 가하고 전사한 국군 장병들이 무려 70명에서 100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붕괴된 부대에서는 보기 힘든 역사적 대기록이다.
필자는 이 믿기 어려운 전차 특공 사실을 북한군 측의 기록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비록 적의 기습과 아군의 준비 부족으로 패배하기는 했지만 이 방면 국군 장병들의 질도 그렇게 오합지졸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페렌바크의 글을 인용했던 것은 낙동강까지 지연전을 펴며 철수했던 국군의 혈전들이 세계의 전사는 물론 우리 전사에서조차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었기 때문이다..
국운이 경각에 달해 남한이 적화될 위기의 순간이었던 1950년 그 뜨거운 여름에 국군은 무수한 혈전을 벌여 북한군의 남하를 막았었다. 비록 패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하였던 전투도 있었으나 서울 북방과 같은 졸전을 겪지는 않았었다.
이때 간부들을 포함한 수많은 병력들이 호국의 일선에서 그 목숨을 던졌다. 그 피해의 정도로서 남침 초기 국군의 분전[奮戰]을 가름해보자. 6.25 전쟁의 남침 첫날부터 북한군과 쉼 없었던 전투를 했었던 중부 전선 6사단 7연대 1대대 1 중대장 이대용 장군의 회고를 들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