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시리즈 -3]
6.25 남침- 국군이 그렇게 무력했었나? -8 -
일부 전문가들은 김종오 대장이 지휘하던 6사단을 6.25 남침에서 가장 잘 싸운 사단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6사단 연대 중에 제일 잘 싸운 7연대의 찬란한 무공은 연대원들로 하여금 국군 최강 연대로서 자부심을 갖게 하고 있다.
7연대의 대대 중에서 전투의 달인 김용배 대대장이 지휘했었고 춘천 전투 승리와 압록강 진격의 주인공인 1대대의 무공은 더욱 눈부시다. 1대대는 비록 상부의 지시로 작전상 철수는 한 일이 있어도 한 번도 북한군에 패배하지는 않았던 최정예 대대였었다.
6사단 –국방장관 검열. 1949년
1대대장 김용배 대대장의 신임하던 부하였으며 1중대장으로서 압록강에 대대 최선두 중대로서 진격했었던 1 중대장 이대용 장군은 그의 글에서 많은 전우들이 여러 혈전을 겪으며 어떻게 산화했는가를 남기고 있다.
먼저 그가 지휘하였던 1대대 1중대의 사례를 들어본다. 남침 개시 때 북한군에 맞섰던 그의 중대 3명의 소대장중 2명은 몇 주 뒤에 모두 전사하고 한 명은 중상을 입어[중상 장교는 후에 중부 전선에서 전사] 전선에서 물러났다.
낙동강 전선의 김종오 6사단장[우]과 임부택 7연대장[좌]
이대용 중대장도 음성 전투에서 복부에 포탄 파열상을 입고 부산 육군 병원에서 한 달간이나 입원해야 했었다.중대장 소대장이 모두 없어진 1중대에 10기생 도진환 소위가 부임해서 임시 중대장직을 맡았으나 격렬한 전투 상황은 그의 생명을 단숨에 앗아갔다.
부대를 지휘할 장교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어 지휘관들이 소진(消盡)되어 버리고 상부에서는 후임자를 보내줄 여유가 없자 중대 인사계였던 이한직 상사가 중대 지휘를 맡았으나 그 역시 점촌 전투에서 전사했다. 다행히 중대장 이대용 대위가 병원에서 돌아와 중대 지휘를 맡았기에 바로 다가온 북한군의 9월 공세를 경북 신녕의 화산 전투에서 막아낼 수가 있었다.
이대용 장군의 대대장 시절- 1952년
1 대대의 1 중대 형편만 이런 것이 아니었다. 2중대장 오윤석 중위는 경북 신녕에서 치열의 극을 당한 전투로 전쟁 공포증에 빠져 전선을 이탈했었다. 후임으로 온 박인권 중위는 잘 싸웠으나 다음해 2월 반격 북진 때 총격으로 팔이 절단되어 후송되었다. 음성 전투의 영웅 3 중대장 김명익 대위도 총상을 입고 두어 달 입원했다가 북진 때야 중대장직으로 복귀하였다
최강 연대의 최고 정예대대인 1대대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부대대장 신현묵 소령은 초산에서 후퇴하던 중에 중공군의 기습으로 연대가 파괴되었을 때 실종되었고 김용배 대대장은 다음 해에 7사단 연대장으로 전임되었지만 부임 열흘 만에 전사하였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국전 초기 제일 잘 싸운 대대의 간부들 대부분이 전장의 화염 속에서 이슬처럼 모두 소진되어 버렸던 사실로서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고전하기도 했고 패하기도 했었던 국군의 다른 대대 피해는 과연 어떻겠는가를 알 수가 있다. 단적이지만 예로 들은 6사단 7연대의 경우만 해도 앞에서 인용했었던 페렌바크의 글이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니라 오해의 장막에 가려진 진실을 알려 주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이 사실을 말해준 이대용 대위는 추가적인 일화를 이야기 해준다. 그는 먼저 그의 동기생들인 육사 7기생들 중에 전사자 70%가 개전 3개월 동안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이대용 장군은 6.25 전투 중에 첫 3개월 전투가 그 후에 있었던 전투들 강도(强度)의 서 너 배에 해당한다고 말해주었었다. 전쟁 1 년 뒤에 대대장으로서 중공군과 전투를 계속했던 이대용 장군은 이 무렵의 전투들은 남침 초기의 치열했던 전투들에 비하면 전투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었다.
이렇게 초전의 전투가 치열했었고 수많은 호국의 혼으로 진 영웅들이 많았음에도 경황이 없었던 대한민국이 훈장 제도를 제정한 것은 1950년 10월 28일 이었다.
추후에 훈장 추서가 있었지만 전쟁의 진행과 어수선한 분위기와 무질서했던 군대 행정 때문에 제대로 훈포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했었다. 이대용 장군은 김일성 승용차를 노획하고 압록강에 최초로 도착한 무공을
세운 중대의 중대장으로서 아무런 훈장을 받지를 받지 못했다.
자신이야 그렇다치더라도 문경 전투에서 전사한 자기 휘하 한도선 중위에 대한 미안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비할 데없이 용감했었던 한도선 중위는 이북에서 혈혈단신으로 피난 내려 온 장교였었다. 한도선 중위는 춘천 전투와 원주 남쪽 신림 고개 등에서 훈장 수여 대상의 큰 전공을 세웠으나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런 훈장을 받지 못하고 현충원에 영면하고 있는 것이 항상 안타까웠었다.
몇 년 전 이 장군과 전우들이 한도선 중위를 포함해서 후배 전사자들에 대한 훈장 추서를 건의 했는데 해당 부처에서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전후 추서 신청 특별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 안했으면 예외를 인정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그 관계 부서의 인간이 사석에서 했다는 이야기가 더욱 이대용 장군의 가슴을 저미게 했다.
“ 그 정도로 훈장들을 타 갔으면 됐지 뭘 더 타갈려고 안달 하는가”하는 말이다.
그 부서나 발언자는 남침 초기에 국군의 피해가 집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장군은 자기가 직접 싸웠던 한국전 초전에서 고전한 국군에게 보인 서방 언론들의 부정적 평가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었다. 적어도 중부 전선에서 싸웠던 6사단 7연대는 한번도 그런 망가진 전투를 하지 않았으니 해당 사항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자기 전우들이 엄청난 피로서 한반도를 점철하며 지켜낸 이 조국에서 훈장 제도 없을 때 관심도 없이 사라져간 선배들에 대해서 보이는 후배들의 무심하고 냉정한 태도는 가슴 아프게 슬프다고 말했었다.
전후 60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이제 21세기가 되었다. 미국이나 서방국의 언론들은 한 때 서울 북방에서 졸전을 했었던 국군에 대한 혹평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다. 60년대 월남에 파병되었던 맹호, 백마, 청룡 부대들이 놀랄만큼 짤 싸워서 국군의 이미지를 일신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주한 미군들은 국군들이 아주 군기도 강하고 전투력도 강한 부대로 인식하고 있다. 그 한 예로서 미군에 파견된 카투사[KATUSA]장병들이 최상의 호평을 받으며 근무하고 있는 사실이 보여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힘든 6.25 초전의 교훈은 우리 국군의 유전자에 각인 되어있을 것이다. 모두의 귀에 너무 익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네 글자다.
이 네 글자에 더해서 한마디만 더 추가하고 싶다.
‘남과 협조는 하되 믿지는 말자. 국방은 국민 스스로가 하여야 한다.’
미군이 탄생시켰고 미군의 간접 지휘를 받았으며 미군에 의해서 유지되던 당시의 국군은 미국의 지도를 너무 믿었었고 너무 의지했었다. 결국 미국의 도움으로 국가를 지켜냈지만 조금이라도 군 지휘부가 자주적인 사고 방식으로 북한의 의도를 경계하고 능력이 닿는 대로 전쟁 준비를 했더라면 국가가 그렇게 위기에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고 서울 북방에서 그런 참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우리 장병들이나 미군들이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