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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봉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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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과 인간 가족 -5 話-]


노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봉사할 따름이다. -2-

 

강 원사가 직업 군인의 길로 들어설 때 국군 부사관들의 처우는 당시 가난했던 한국 경제의 상황을 반영하듯 무척 열악했었다. 앞서 말했듯이 세계 최빈국의 대열에서 헤매이던 한국의 서민들은 '먹는 문제 해결'이 급선무였었다. 부사관으로 군에 있으면 그런대로 생존의 기본인 먹는 문제는 해결이 되었지만—군도 가난해서 힘겹게라도 해줄만한 것은 그 것뿐이었다.

 


[7연대 초대 연대장 민기식 대장]


먹는 것 외에 입고 사는 문제는 최저의 수준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간부들은 모두 부대 부근의 촌락에서 독채 전세도 아닌 셋방을 얻어서 생활하여야 했었다. 자식도 교육시켜야 했었고 늙으신 부모님들도 모셔야 했지만 국가에서 주는 봉급은 그런 것까지 여유있게 해결해주지 못했었다. 당시의 간부들은 내핍과 절약으로 버티어야하는 만성적인 빈곤한 생활에 시달렸다. 

 

고된 근무를 하는 부대는 부사관들의 80%가 전역을 신청했으나 군은 이를 불허했었다. 지금처럼 그 사표를 다 수리해주었다면 그 때 국군은 붕괴했으리라. 현재 시각으로 볼 때 그 무렵의 군의 간부들이 가난을 버티며 군무에 충실했던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더구나 장병들의 근무 여건 역시 최악이었다. 여름에는 필수적인 모기장을 지급하지 못한 부대도 많았었고 겨울에 필수적인 난방 시설도 연료가 없어서 시간제로 가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간부들이 근무할 사무실과 책상들이 필요했었으나 모두에게 이런 기본 시설마저도 부족했었다. 사무실이 없는 부사관들은 행정반 주변 밖의 양지 쪽에 엉거주춤 앉아서 근무해야  할 경우도 많았다.훈련 교보재도 없어서 훈련과 교육이 어거지로 행해지기도 했었다.이런 부족함은 경험많은 부사관들이 융통성을 발휘하거나 몸으로 때워야 했다. 

 

[7연대 1기 서근석씨[46년 2월 입대] -7연대 초대 주임원사]


그런가하면 당시의 장교들의 권한은 지금보다도 훨씬 강한 것이어서 나이 먹은 부사관들이 어리고 덜된 초급 장교들에게 비인간적인 모욕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런 힘든 환경에서 군 생활을 해나가는 부사관들이 살아 남는 수단은 인내와 성실이었다.그저 매사 참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주임 원사 보직 신고식]


강가부 씨는 몸을 던지며 최선을 다했다. 강가부 씨가 성실하게 근무하자 상관들은 그를 인정해주고 순조롭게 진급도 시켜주었다. 그는 7 연대 본부로 온 뒤에 25년간 계속7 연대 본부에서만 근무했었다. 첫 보직은 연대 인사과였지만 여러 과를 거치며 원사로 진급하였다. 국가 경제 발전에 따라 군 간부들에 대한 급여도 획기적으로 향상되어 강가부 씨는 비로서 한숨을 돌리며 가족들과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철원 평야에 세월이 가고 그의 이마에 주름이 늘어가는 초로의 세월, 그는 긴 군대 생활의 황혼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7 연대 주임 원사로 발령받았다.부사관으로서 최고 계급인 원사에 최고 보직인 연대 주임 원사까지 올라간 셈이다.

 

[근속 30년 기념식]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7연대 신병으로 배치되어 철원 땅에 자리를 잡고 7연대의 텃새 삶을 산지 30여 년, 이제는 고향이 된 철원의 풍요로운 평야가 33번째의 수확을 기다리는 벼들이 누렇게 익어 황금 물결을 일렁이는 1999년 10월 31일, 강가부 씨는 퇴역식을 가졌다. 부인과 전역한 선배, 7연대 장병들, 그리고 6사단장- 나중에 국방장관을 지냈고 지금은 주중대사인 김 장수 장군-7연대장 참석하에 전역식을 치렀다. 

 

장기간 국가에 봉사한 그의 공적은 국가는 잊지 않고 보국훈장 광복장의 훈장을 주었다. 이 훈장은 33년 이상 근무에 아무 징계 사항이 없는 퇴직자들에게만 수여하는 값있는 훈장이었다.

 

그리고 강가부 씨는 다음 날부터 평생 입었던 군복을 벗고 평일에도 홀가분한 평상복으로 외출할 수가 있었다.군을 떠나면 대개 친지들과 옛 뿌리가 있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새 삶을 찾아서 서울 같은 대도시로 떠나는 것이 일반 현상이지만 온 몸을 바쳐서 철원의 7연대에만 삶에 몰두했었던 강가부 원사는 철원을 빼놓고는 갈 곳이 없었다. 강가부 씨가 고향인 마산을 떠난 뒤에 형제들도 하나 둘 고향을 떠났기에 그 곳은 어린 시절 가난의 고통만 떠 오로는 먼 타향이었다.

 

상관의 처제와 상관의 부하 관계에서 평생 전우 관계가 된 강가부 씨 부부 


강 가부 씨는 퇴직 전부터 그곳 철원에 은퇴 후 살아갈 터를 틀기로 했었다. 그는 은퇴 전 철원군 동송읍내에 낡은 집을 사서 헐고 새집을  지어놓고 은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은퇴 후에 군인이 겪을 심리적 트라우마를 알고 있었다. 선배들은 그에게 진지하게 말했었다.


 “군 생활에서의 정신 세계를 빨리 청산해라. 그래야 네가 은퇴 후에 살아갈 사회에 고통없이 적응을 할 수가 있다.”

 

은퇴 후의 쓰리고 힘든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선배의 너무나도 진지하고 고마운 충고였다. 오랫동안 충실한 직장 생활을 하면 직장순치증[職場馴致症이라는 병을 겪게 된다. 즉 직장에 길이 들었다가 나이 먹고 직장을 떠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안해진다. 


이것은 동물원의 맹수들을 보면 이해가 쉽게 간다. 백수의 왕 사자도 동물원에 가두어 두고 매일 먹이를 주다보면 사자는 먹이란 인간이 주는 것으로 길이 들어 버린다. 그 사자를 갑자기 아프리카 초원에 방사하면 사자는 초원을 쏘다니며 사냥을 해서 먹을꺼리를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니라 동물원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먹이를 가져다 줄 사람을 기다린다.

 

10여년 전에 바로 철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상당해서 치료를 받고 완치한 두루미를 아무 생각 없이 철원 평야에 방사했더니 그 사이 인간과의 삶에 길이 들은 두루미들은 넓은 휴전선 안으로 날아다니며 먹이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찾아 도로로 나왔다가 차에 치어 죽은 녀석이 있었다. 


바로 오랜 직장 생활을 했던 인간도 이처럼 직장에 길이 들어버려 새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것이다.

 

직장에 순치된 사람이 갑자기 자기의 일부가 되었던 환경이 없어지면 불안해하고 무력감과 소심증에 빠져들다가 그 증세가 심해지면 우울증으로 악화된다. 서구에서는 상당히 심각한 사회 문제로서 이를 ‘은퇴 쇼크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항상 몸담았던 직장만 그리워하고 직장에서 지시에 길든 피동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매사에  능동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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