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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감동이야기] 사랑이 오고가는 위문편지 (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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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오고가는 위문편지


‘국군 감동 이야기 공모전’ 네 번째 이야기는 우수상 수상작 ‘사랑이 오고가는 위문편지’입니다.


글 이대호 

* 수상자의 작품을 칼럼 형식에 맞도록 수정하였습니다. 


2000년 봄, 필승부대 뒷산에는 진달래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연병장에 모인 장병들이 장갑차를 수리하다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골에서 보내 온 굴비를 들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 슬기와 함께 부대장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다. 부대장님을 뵙고 난 후에는 슬기를 위해 헌혈을 해준 장병들도 만났다. 그사이에 3명은 전역을 하고 17명이 남아있었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와 후배 장병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내 딸 이슬기는 골수이식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슬기 친구들이 고사리 손으로 정성껏 쓴 사랑의 위문편지 또한 아마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 전역을 하고 대한민국 어디선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후배 장병들이 보고 싶다. 

1999년 말,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을 앞두고 전 세계가 들썩거렸다. 영국에서는 밀레니엄 기념다리를 만들었고 컴퓨터 관련 회사들은 Y2K대란을 들먹이며 앞장서서 혼돈의 시대가 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당시 슬기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여의도 성모병원에 입원한지 1년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3차 항암치료까지 받았을 때 담당 의사 선생님이 우리 부부를 불렀다.


 “12월 7일 골수 이식수술을 할 계획 입니다. 우선 가족 중에서 혈액형이 같은 분이 있으면 혈액 검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조직 적합성 항원검사를 하여 6개가 일치해야 하는데, 비혈연일 경우 확률이 2만분의 1로 무척 희박합니다. 형제는 몇 명 있습니까?”

“이제 4살 된 아들 한명입니다.”

“형제간 일치 확률은 25%입니다. 너무 어려서 걱정되지만 검사를 해보세요. 그리고 혈소판 수혈을 위한 공여자들도 확보해야 합니다.”


슬기의 치료 때문에 시골에 내려가 있던 늦둥이 막내아들을 데려왔으나 불행히도 조직이 일치하지 않았다. 결국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을 하기로 결정, 20명 이상의 혈소판 공여자를 찾아야만 했다. 

당시 나는 실직 상태였다. 다니던 회사가 IMF 외환 위기로 부도가 났기 때문이었다. 딸 슬기가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10개월 밖에 안 된 때였다. 보다 못한 아내는 늦둥이를 업고 돈을 벌겠다고 보험회사를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설상가상 딸이 급성 골수성 백혈병 판정을 받은 것이다. 하늘이 노래지고 앞이 캄캄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아이를 살려야 했다. 늦둥이는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겼다. 아내는 병원에서 딸 아이 병간호를 하고, 나는 돈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쫓아다녔다. 

혈소판 공여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딸 아이 혈액형인 AB형을 찾는 것도 어려웠지만 무려 1시간 30분동안 성분 헌혈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다들 피하곤했다. 부도난 회사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인천에 살고 있던 친척 2명, 인터넷과 신문을 보고 찾아온 2명, 병원 사회복지과에서 알려준 공여자 3명을 합해도 7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7명도 혈액검사를 해서 혈액 상태가 나쁘면 수혈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여자들은 생리기간을 피해야 하고, 남자들은 전날 담배를 피우거나 가벼운 감기약만 먹어도 수혈에서 제외된다. 고용량 항암제를 투여하고 무균실에서 생활하는 중환자에게 가장 좋은 혈소판을 수혈해야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성모병원 사회복지과에서 급한 호출이 왔다. 필승부대에서 슬기의 혈소판 수혈을 해주겠다고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필승부대라면 내가 1982년부터 3년간 군 생활을 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왜 필승부대에서 슬기에게 수혈을 해주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우연의 일치라 생각하면서도 딸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달음에 부대를 찾아갔다. 부대에서 만난 본부중대장님은 편지 한 장을 내놓았다. 



“따님이 저희 부대장님께 보낸 편지입니다. 부대장님께서 우리 부대를 전역한 아버님의 소원을 들어주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가 건넨 꽃그림 편지지에는 슬기가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글이 적혀 있었다.


 필승부대 사단장님 안녕하십니까?


 ‘이’자 ‘대’자 ‘호’자 의 딸 이슬기입니다. 아빠는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약 3년간 필승부대 포병연대에서 근무하셨다고 합니다. 아빠는 항상 필승부대는 용맹하다며 부대 자랑을 하셨습니다. 군복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계시는데 백두산을 상징하는 숫자 3과 행주산성을 의미하는 숫자 0을 합쳐서 만든 마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지금도 젊은 시절을 국가를 위해 의무를 다한 일이 뿌듯한 모양입니다. 

 작년 5월에 제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에 걸려 저는 지금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관해가 잘되고 치료를 순조롭게 하여 골수이식수술을 남기고 있습니다. 골수이식수술을 하는 과정에서 혈소판 수혈 공여자를 찾아 그때그때 병원에 와서 채혈을 해야 합니다. 저의 혈액형이 AB형인데 우리나라 인구의 14% 정도로 희소합니다. 담배를 피거나 감기약을 먹으면 할 수 없는 등 까다롭기 때문에, 아빠가 열심히 뛰어 다녀도 필요한 인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TV방송에서 ‘내무반’이라는 프로그램에 군인아저씨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아빠의 걱정을 덜어드리고자 편지를 씁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저를 위해 시간을 내달라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단장님 저의 아빠를 도와주십시오. 군인아저씨들의 젊은 혈액이 저에게 필요합니다. 아빠가 직장도 포기하고 저를 살리기 위해 뛰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부대가 가깝다고 하니까 군인 아저씨들을 모시러 가고, 채혈 후에는 모셔다 드릴 것입니다. 저도 병을 이겨내고 훌륭히 커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 하겠습니다. 사단장님 어려운 부탁을 해서 미안합니다.

 아빠가 좋아하는 필승부대에 행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사단장님도 건강하시고 가내 평안하시길 소원합니다. 업무가 바쁘실 텐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999년 11월 30일

                                        여의도성모병원 8층 소아병동에서 이슬기


편지를 읽는 내내 가슴이 울컥거렸다.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못난 부모를 만나서 고생하는 딸아이가 불쌍하고 내 자신이 초라해보였다. 몸도 불편한 아이가 얼마나 걱정을 했으면 나 몰래 부대장님께 편지를 썼을까 싶었다. 


 “저희 부대에서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딸은 자가이식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항암 치료로 혈액 속에 암세포가 적기 때문에 혈액을 증식한 다음, 본인의 몸속에서 조혈모세포를 채혈해 보관합니다. 그런 후에 고용량 항암제로 몸속에 남아있을 암세포를 치료합니다. 이 과정에서 저항력이 제로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무균실에서 1개월 정도 치료를 해야합니다. 그리고 이때 혈소판 자체 생산이 어려워 수혈을 해줘야만 합니다.”


중대장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최대한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혈소판 공여자 때문에 눈앞이 캄캄했는데 긴 어둠 속 터널에서 빠져 나온 것 같았다. 중대장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부대를 나왔다.

항암치료, 특히 골수이식을 하는 환자는 질환 자체만으로 혈소판 감소증이 올 수 있다. 항암 약물치료 후에는 심각한 혈소판 감소증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피부점상출혈, 코피, 혈뇨, 혈변 등의 가벼운 증상부터 내출혈 등 위험한 합병증이 오기도 한다. 이 때 혈소판을 수혈 받아야 출혈 예방과 지혈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공여자로 확정된 사람들은 필요시 성분 헌혈실에서 혈소판만을 선택적으로 뽑아 환자에게 수혈하고, 다른 혈액성분들은 다시 공여자의 몸속으로 되돌려주게 된다. 공여자의 혈소판은 3-4일이면 정상 수치로 회복 되므로 주 2회 정도 채혈을 반복해도 건강에는 지장이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혈소판 헌혈은 2주에 한번으로 권장하고 있다.

부대원 1000여 명 중에서 AB형 혈액형을 가진 병사는 78명이었다. 그중 24명이 병원에 와서 혈액검사를 했고 20명이 검사를 통과했다.

슬기는 무균실에 입원했고 고용량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보호자도 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아내는 보호자 대기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슬기를 보살폈다. 병실에서 필요한 용품들을 준비해야만 했기 때문에 병원을 항상 지켜야만 했다. 

아침 8시 슬기를 채혈한 후 혈소판 수치가 낮으면 공여자를 데려와야 한다. 아내에게 연락이 오면 곧장 부대 선임하사께 전화를 걸어 9시까지 부대로 달려갔다. 공여자인 후배 장병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곤 했다. 공여자가 병사 신분이라 부사관이 항상 대동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부대 측에서는 마다하지 않았다. 공여자 장병들은 여의도 성모병원까지 와서 2시간동안 혈소판 채혈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갔다.

슬기의 혈소판 수치는 시도 때도 없이 낮아지곤 했다. 극도로 지쳐있는 슬기에게 갑작스럽게 수치가 내려가는 일이 잦았다.

12월 중순에는 1주일간 동계훈련이라며 부대에서 연락이 왔다. 생활관 대기자로 2명을 남겨두었지만 원활하지 않을 수 있으니 미리 대비하시라는 배려를 해주었다. 일반인 공여자들과 인천에 사는 매제에게 미리 사정을 이야기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휴일이나 공휴일에도 혈소판 수혈을 받아야 했다. 쉬어야할 장병들의 휴식을 뺏는 것 같아 미안했다. 우리 슬기 때문에 면회도 못 오고, 휴가도 제대로 못 갔을 것이다.

방학을 앞두고 슬기의 학교 담임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슬기에게 혈소판 수혈을 하고 있는 부대 장병들에게 전교생이 위문편지를 쓰기로 했다고 한다. 700여 통의 위문편지가 필승부대로 배달되었다. 고사리 손으로 쓴 편지는 거의 모든 장병들에게 한 통씩 나누어졌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희망이 보이는 연말,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필승부대의 장병들도 학생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정감어린 이야기, 정성어린 고사리 손 편지가 오가면서 그해 겨울 전방의 장병들은 따스한 온기를 느꼈을 것이다. 이 훈훈한 이야기가 알려져 KBS와 MBC에서 취재를 나오기도 했다. 1999년 12월 14일, KBS 9시 뉴스에는 이런 내용이 방송되었다.


(황현정 앵커) “백혈병을 앓고 있는 초등학교 어린이를 위해 군 장병들이 헌혈에 나섰습니다. 장병들의 따뜻한 마음을 초등학교 어린학생들의 위문편지로 보답했습니다. 황상길 기자입니다.”

(황상길 기자) “잊혀져 가던 위문편지가 느닷없이 700여 통이나 날아들었습니다. 장병들의 얼굴에 뿌듯함과 흐믓함이 번집니다. 부천 00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보낸 친구 슬기를 살려준데 대한 감사의 편지입니다. 


...(중략)...


헌신적으로 헌혈에 나선 장병들과 고마움을 잊지 않는 어린이들 사이에서 보은의 위문편지를 통해 따뜻한 우정이 싹트고 있습니다. KBS뉴스 황상길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딸 슬기는 필승부대 장병 20명을 포함한 26명이 44번의 혈소판 수혈을 한 뒤에 점차 회복하기 시작했다. 주말이나 공휴일, 크리스마스와 신정, 설날 연휴에도 장병들이 슬기를 살리기 위해 헌혈에 임했다. 골수이식 수술 후 회복이 늦어져 1개월 정도면 끝날 거라는 예상을 훌쩍 넘겨 100일이 지난 2월 22일, 딸아이는 무균실에서 퇴원했다. 슬기 친구들 몇 명이 병원으로 병문안 왔다. 혈소판을 수혈했던 장병들도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편지를 주고받던 장병들과 슬기 친구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MBC 9시 뉴스데스크에서 이날의 일을 보도 했다.


(이인용 앵커) “작년 말 뉴스데스크는 백혈병에 걸린 초등학교 어린이를 살리기 위해 군인아저씨들이 헌혈에 나섰다는 소식을 전해 드렸습니다. 생명이 위독했던 이 어린이는 상태가 아주 좋아져서 22일 퇴원했습니다. 이승용 기자입니다,” 

(이승용기자) “지난해 초등학교 5학년 슬기는 갑작스런 백혈병 판정을 받고 11월 100일동안 완전 격리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육군 필승부대 장병 20명은 슬기의 혈소판 수혈이 필요할 때마다 달려와 팔을 걷어 올렸습니다. 한차례 헌혈로 피가 모자라 장병들은 두 번 세 번씩 모두 44차례나 슬기에게 피를 나눠줘야 했습니다.

슬기의 얼굴색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22일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피를 나눠준 장병들은 누구보다 슬기의 퇴원이 기쁩니다.


...(중략)...


슬기는 바깥생활에 적응하게 되면 자신을 구해준 필승부대 아저씨들을 가장 먼저 찾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MBC뉴스 이승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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