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과 인간 가족 -6話-]
원사의 길을 가려는 원사의 아들 -2-
우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전방 6사단으로 발령이 나서 가족들이 모두 6사단 7연대가 있는 철원으로 이사를 왔다.우현이 확실하게 군인을 인생 진로로 삼아야겠다고 결정한 시기는 사춘기를 지나가던 고 1때였다고 한다.
군인의 자식이 아버지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하는 것은 역시 군인인 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이다.아버지가 고된 직업에 불만을 가지고 항상 투덜대거나 전업의 기회를 찾는다면 아들은 결코 그런 아버지의 길을 가지 않는다.
조 원사가 언젠가 가족 상황 묻는 나에게 아들 자랑을 하면서 자투리처럼 이렇게 대답을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나야 국가가 너무 고맙지요. 덕분에 대학교도 졸업했고 가정도 가졌고 원사도 되었으니까요.”
한마디로 직업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인데 모르긴 몰라도 그의 직업관이 은연중에 아들의 인성 형성에 투영되어 우현이가 힘들지만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기로 한 듯하다.
우현은 이 꿈을 어머니에게 먼저 말했고 이어서 아버지에게 밝혔을 때 부모님들의 반응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똑똑한 아들에게 무한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로서 좀 더 큰 포부를 기대 할 수도 있었고 자기가 걸어온 부사관의 길이 험난하고 힘든 길이기에 순수한 부정(父情)에서 좀 더 편안한 길을 가도록 권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현이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몇 차례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자 아버지는 할 수 없이 허락을 했다.
“네가 아버지의 길을 따라오겠다면 각오 단단히 하고 열심히 준비해라.”
우현은 군인의 길을 가기로 인생의 길을 결정한 뒤에 주변을 돌아봤다.우현이 다니는 철원의 고등학교에는 군인 자녀들이 많았었다.우현은 자연 이들과 어울리다가 자기와 같이 아버지를 따라서 군인의 길을 가려는 학생들이 제법 많음을 알았다.
그런 친구 중에 우현의 친구가 있었다. 이영주라는 여학생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좋지만 튀는 짓도 잘하는 좀 괴짜였다. 우현과 같이 군인이 꿈인 영주는 학교 인근 7 연대 장세혁 연대장에게 편지를 해서 군인의 길을 가려는 동급생과 같이 동아리를 만들려고 하니 도와주실 수 있을지 물어보는 당돌함을 보였다.
장세혁 연대장의 도와주겠다는 친절한 답신에 영주는 8명의 친구를 모아 동아리를 만들었다. 남자가 절반, 여자가 절반인 혼성 동아리였다. 영주가 동아리 조장이 되고 우현은 차석이 되었다.
'에멜무지'로 동아리 회원들이 7연대를 방문해서 진로 상담을 하고 촬영을 했다. 좌측 뒤는 멘토 역할을 하는 정훈과장 장상영 대위 오른쪽은 여학생들의 진로 상담을 해준 1대대 정훈장교 이상희 중위.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는 동아리 조장은 중앙 [화이팅 글짜 아래], 우현은 장대위 앞
동아리 이름은 조장이 지었는데 그 이름이 아주 독특하다 .
‘에멜무지로’였다.무슨 서양의 영웅 이름인가 했는데 순수한 한글 이름이란다. 사전을 찾아보니 정말 이런 단어가 수록되어 있었다.
“결과를 꼭 바라지 않고 헛일하는 셈치고 시험 삼아 해본다”는 말이다. 아마 경상도 방언이었다가 통상어의 반열에 오른 단어 같다. 비슷한 경우로 전라도 사투리였다가 통상어가 된 ‘거시기’가 있다.
우현에게 왜 이런 괴상한 이름을 동아리 이름으로 지었느냐고 물으니 조장이 이 동아리가 평생을 조국을 위해서 한 몸을 받쳐야 하는 군인의 길을 가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모인 것이니 근사한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하면서 위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즉 군인이라면 국민에게 헌신 할 수 있는 마음 가짐과 투철한 봉사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작명했다는 것이다.[!] 거창한 각오도 대단하지만 작명하는 기발한 그 아이디어에 한국 젊은이들의 창의력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에멜무지로 동아리는 매주 목요일마다 미팅을 가지고 정보도 교환하고 앞으로 수행할 계획도 논의했었다. 주말을 이용하여 전쟁기념관도 방문하고 행사가 있으면 인근 7연대를 방문하기로 하여 장비도 구경하고 생활관도 구경하면서 앞으로 갈 세계를 미리 알아보기도 하였다. 동아리 회원들이 모두 3학년이 되고 도저히 동아리 활동을 할 수가 없어서 현재는 동아리 활동은 드문드문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회원들의 졸업 전에 곧 배턴을 넘겨줄 후배 동아리가 생길 것이라고 한다.
대화를 해보니 우현은 말을 조리 있게 하면서 차분한 태도를 흩트리지 않고 있다. 어린 녀석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인간 관계의 싹수가 있는 젊은이는 장교로 임관하여 정보나 정훈이나 헌병 병과를 가면 능력을 잘 발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왜 장교로 임관하지 않고 부사관을 고집하느냐고 물었다.
우현은 잘라 말한다.
어렵게 장교로 임관했다가 소령 정도에서 극심한 진급 경쟁에서 탈락하고 군을 떠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자기는 그렇게 중도에 좌절하지 않고 아버지처럼 오랫동안 국가에 봉사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장교라는 직책에 대해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다.
우현의 계산은 극히 현실적이고 냉철한 진로 판단이었다. 보니 참 세상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현과의 대화에서 국군 부사관들의 처우와 질이 그간 꾸준히 개선되면서 그 사회적 위치도 대폭 향상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앞서 소개한 강가부 원사가 1965년 부사관의 길을 가겠다고 결정하게 만든 배경이 배고픔에서 벗어나겠다고 하는 절박한 것이었으나 50년이 지난 2015년의 젊은이가 부사관의 길로 가겠다는 것은 냉정하게 계산한 뒤에 내린 순수한 야심적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니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인생을 출발하려는 젊은이로부터 부사관의 지위는 물론 국군의 전력 향상과 국가의 발전등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부사관들은 군의 척추라고 할 수가 있다 .실전 상황에서 경험많은 부사관의 전장 지휘가 전투력의 근간임을 볼 때 이런 젊은이들이 동아리를 만들어 부사관을 지망하는 것을 보면 군의 앞날에 극히 밝은 기대를 가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