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중 어머니들의 투쟁
- 죽음, 절망, 노력. 좌절, 인내, 생존
한국전쟁 중 한국의 어머니들은 큰 곤욕을 치뤘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남자들이 나라를 지켜내는 임무에 목숨을 바쳤다면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지켜내는 본능에 목숨을 걸었었다.
여자들은 전쟁의 난리를 피하는 피난의 투쟁에서 - 물리적으로 말한다면 - 나이 어린 자녀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생존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존재였다 .
그러나 한국의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생존보다 그 장애물적인 존재인 자식들의 생존을 위해서 몸을 던졌고, 구해냈고 또 애석하게 좌절하고 세상을 뜨기도 하였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진리라고 증명된 곳이 한국전쟁 중의 한반도였다.
아래 사진들을 통해서 한국 전쟁 중에 한국의 어머니들이 자식을 지켜내는 투쟁을 소개하겠다.
[1.4 후퇴 후인 1951년 2월 오산 부근 마른 수로에서 얼어 죽은 어머니와 자녀들]
위 사진은 한국전쟁의 고전인 페렌바크 저 This kind of war에 수록된 것이다.
[저자가 개전 초반 한국군의 전투에 호평을 했던 글을 이 블로그에 소개했었던 일이 있었다-click!-]
그때 서울에서 소개 명령에 따라 대책없이 한강을 건너갔었던 시민들 중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들과 산을 헤매다가 얼어 죽고 굶어 죽었었다. 얼은 땅에 깔아놓은 멍석을 보니 근처에 민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각박한 민심은 이들 가족을 재워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해가 시작되는 정월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었다. 어머니들은 저승사자처럼 덤벼드는 동장군과도 싸워야 했다. 사진의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의 눈가에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저 세상까지 데려가야 하는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과 슬픔의 고통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직 돌도 안되어 보이는 아기는 마치 봄날의 화사한 햇살 속에 엄마의 품에서 새근새근 잠자는 얼굴을 하고 있다. 엄마와 함께라면 저 세상 가는 길도 즐겁다는 표정이다.
소년 시절 이 사진을 처음보고 가슴에 배어나는 눈물을 주체치 못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촬영자는 UPI 통신의 어윈 트레스 기자인데 인터넷 검색을 아무리 해봐도 윗 사진이 뜨지 않는다. 이 사진은 한국 온라인에 최초로 올려진 사진이 아닌가 한다.
1950 9월 27일, 미 해병 1사단 7연대가 서울 중심부로 파고 들어갈 때 충정로에서 서울역 뒤로 갈라지는 고개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 지금은 이 도로 위로 고가도로가 건설된 뒤 시청으로 가는 서소문로로 연결된다. 지금은 없어진 연초 제조창 건물이 길 맨 끝에 보인다.
이 요지에 북한군은 여러 개의 바리케이트는 물론 대병력을 배치해서 저항했는데 미 해병들은 전차와 포, 전투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방어선을 뚫었다.
이곳을 공격한 미해병 항공대는 살상력이 큰 폭탄 대신 로케트와 기관총만을 사용했었는데도 인근 주민들의 피해가 매우 컸었다. 북한군이 패퇴하고 미군의 공격이 더 이상 없자 숨을 죽이고 있던 주민들이 정신없이 뛰어나와 대피하고 있다.
앞의 여성은 쌀과 냄비를 넣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있고 뒤에서 아기를 업고 달려오는 여성도 보인다. 쌀쌀해지는 날씨에 아기와 덮고 자려고 두꺼운 이불을 포대기로 두르는 재치가 돋보인다. 치열한 전투는 주민들에게 큰 공포의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달려 나오는 두 사람의 필사적인 표정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윗 사진은 미국 맥스 데스포 기자가 촬영한 것이다. 그는 아래 퓨리처 상을 받은 대동강 피난민 사진을 촬영했던 사람으로서 여러 장의 걸작 전쟁 사진을 남겼다.
1950년 12월 5일 다리가 폭파되었는데 위험한 철골을 건너서 한사코 남으로 내려오는 피난민들이 보인다. 잘 보면 한 남자가 아기를 엎은 것이 보인다.
[손자로 보이는 죽은 아기를 싼 포대기를 안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느 할머니]
두번 째 사진을 찍은 맥스 데스포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유엔군 북진 때 사리원 못 미친 곳에서 영국군 아가일 대대원[스코트랜드 대대]의 오인 사격으로 죽은 엄마와 졸지에 엄마를 잃은 비극을 당한 아기들이다.
울고 있는 아기들이 너무 애처롭다. 물없는 농수로에서 어머니가 버선발을 산쪽으로 하고 머리는 길 쪽으로 기대고 숨져있다.
추측해보니 영국군을 보고 놀란 어머니가 사진에 보이는 산 쪽 경사 급한 사면으로 대피하다가 이를 매복으로 잘못 본 영국군이 쏜 총알에 맞고 뒤로 넘어지고 수로로 미끄러져 내려와 숨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를 제대로 봤다면 사격을 하지 않았을 것인데 사면에 나무가 많아서 가려져 있었던듯하다. 큰 아이의 저고리가 엄마와 같이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나뭇가지에 걸려서 벗겨진 것이라면 이 가설이 맞는다. 참 야속하게 느껴지는 사진이다.. 영국군이 조금 더 신중하게 살펴보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
아이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북한군에 징집된 가능성이 제일 크겠지. 당시 코너에 몰린 북한군은 50살이 다 된 주민까지 끌어갔으니까.
아이들의 얼굴과 머리를 보니 오랫동안 씻지를 못했다. 장거리를 걸어서 여기까지 피난길을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인데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다가 이런 비극을 당한 것일까?
비극을 만나 울고 있던 아이들은 위생병이 데리고 갔다고 한다. 이들이 영국군 부대에서 잘 보살핌을 받고 영국까지 갔다는 식의 기대는 픽션에 가깝다. 아마 사리원을 거쳐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평양에서 어디 맡아줄 만한 집안에 맡겨지고 나중에는 북한 고아원으로 보내졌겠지. 그 열악했던 전시 북한 고아원에서 살아남았을까? 잘 살아남아 아버지를 만났으면 하는 기대가 크다.
[낙동강 전선에서 남북이 일진일퇴를 하고 있던 여름에 찍은듯하다.
양장을 한 엄마를 보니 도시에서 찍은 사진이다.]
[엄마를 잃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아기]
가마니 위에 놓은 것을 보니 엄마가 근처에 있는 듯 하지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렵고 배가 고파서 우는 듯하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었으면......
이 사진은 한 영상에서 잘라 온 사진일 것이다. 동영상을 본 기억이 난다. 서울 탈환 작전에서 전투에 휘말린 어머니가 총탄을 맞고 쓰러지자 두 오누이가 어쩔 줄 모르고 우는 장면이다. 동영상에서는 남자 아이는 기절할 듯이 팔팔 뛰면서 엄마를 살려달라고 울고 있었다. 사진 설명은 어머니가 사망했다고 말하고 있다.
[중노동에 시달리는 엄마를 대신해서 동생을 돌보는 언니/누나]
너무 어린 나이에 큰 짐을 지었다. 가난한 시절 우리 한반도 가정의 한 풍경이기도 하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