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계곡에 돌진한 전차대 -1-
[중공군이 한미 보전조에 궤멸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식현리 국사봉 계곡[밥재 계곡]
- 입구에서 본 모습이다.]
임진강은 고랑포를 지날 때까지 서쪽으로 흐르다가 장파리라는 곳에서 방향을 급격히 남쪽으로 틀어서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간다.
이 임진강이 고랑포를 지나기 전의 유역은 6.25 사변 중 여러 번 피아의 도강 지점이 되었었고 1968년 1.21일 사태 때는 김 신조 부대가 침투했던 곳이기도 하다.아마도 서울 근접의 통로의 중심 통과지이고 수심이 깊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이 부분의 유역을 북쪽에 두고 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낮고 언덕이라고 하기는 약간 높은 산맥이 2키로 정도 임진강을 따라 달리고 있다.
이 임진강을 따라가는 낮은 구릉 지대와 그 남쪽에 우뚝 솟은 파평산의 사이에 폭이 2km가 넘는 평야 지대가 있다.평야라기보다는 여의도 보다 좀 더 큰 개활지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곳은 파주시 적성면 식현리라는 지역이다.
식현리 일대 지도 -격전장은 원안이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곳에서 1951년 4월 23일 천지가 진동하는 포성과 소나기 같은 기관총 소리가 어우러져 여기저기에 머리를 내민 봄 진달래 꽃들을 뒤흔들었었다. 미 전차 중대와 한국 보병 중대가 선도한 공격이 불꽃을 튕긴 것이다.
나중에 식현리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임진강을 건너 맘놓고 진격해오던 중공군들은 역습해온 한미 보전조의 화력 앞에서 몰죽음을 당했다. 이 식현리 전투를 자세히 살펴본다.
중공군이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유엔군을 분쇄하고 남한의 절반 정도를 먹어 치우겠다고 춘계 공세의 대포문을 연 것은 1951년 4월 22일이었다. [유명한 중공군의 5차 전역이다.]
[한반도 전쟁에서 무수히 죽은 중공군 병사의 일인. 고지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동료들이 머리 밑에 배낭을 고여주고 철수한 것을 보니 한참동안 고통스러워 하다가 숨을 거둔 것 같다. 파리가 덤벼들고 있다. 피아를 떠나 측은한 생각을 금하기 어려운 사진이다.]
임진강 식현리에서 동쪽 언덕 하나를 넘으면 적성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이 지역의 설마리 계곡에서 임진강을 도강한 중공군은 영 연방군을 급습해서 그로스터 연대의 일개 대대를 섬멸했다.
[이 중공군 사단은 서신이 지휘하는 187사[사단]로서 용문산을 공격했었다. 용문산 전투에서 한국군 6사단에게 대패하고 패주했다.]
춘계 공세 초기 영국군과 한국군 한 개 사단이 피해를 입었지만 유엔군은 질서 있게 철수했었다. 그러나 이 전투 초기, 한미군의 보전조[步戰組]가 임진강을 건너온 중공군을 반격해서 궤멸시킨 것이 식현리 전투다. 중공군 공세 시작 불과 하루 만에 반격을 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 지역의 서부 전선에는 한국군 1사단 15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4월 22일 중공군의 공세에 옆의 영국군 여단이 후퇴할 때 한국군도 중공군 1개 연대의 공격을 받고 남쪽 후방으로 후퇴하였다.
그 옆 적성 방면은 중공군 사단 병력이 공격했는데 이 식현리 지역은 측면 방어 성격의 소규모 조공 부대가 배치되었다.
[73탱크 대대 어깨 패치]
15연대에 배속된 미군 탱크 부대는 M46 신형 탱크로 장비 교체를 한 73 탱크 대대 C중대였다.미군 전차 중대장은 국군 15연대장에게 당장 반격하자고 제안했다. 정찰기의 정찰에 의해서 이 식현리 지역의 적 병력은 별 볼일이 없고 지형도 전차가 공격하기 좋은 지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서 판단했던 것 같다.
게다가 방심한 중공군이 식현리 개활지에 넓게 전개되어 접근했던 것이 전차 공격을 결심하게 했을 것이다. 한국군 1사단 15연대는 보병 일개 중대를 제공했다.
[식현리 공격의 주인공 M46 패턴 탱크]
공격에 나선 C중대는 한 개 소대 5량의 전차로 구성된 전차 4개 소대와 중대장 전차 1량, 그리고 포병 FO가 탑승한 전차 1량, 합계 22량의 전차들로 구성되어 있다.
1951년 4월 23일 감행한 공격에서 중공군 500명이 사살되어 식현리에 전개했던 중공군의 공세가 돈좌되었다. 노획한 공용화기만 12정이었으니 대대 병력 규모가 섬멸했다는 전과 보고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한미군은 식현리에서 보전조 공격으로 얻은 국부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대병력으로 몰려온 중공군들에게 밀려서 26일까지 수색으로 철수하며 지연전을 실시해야 했다.
나중에 수색 근교 화전리에서 반격을 개시한 유엔군은 중공군과 북한군을 격파하고 다시 임진강을 수복하고 북으로 한참을 북상하여 영토를 확보했다.
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춘계 공세를 개시할 때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는 서울을 닷새 내로 완전 점령할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전선과는 달리 서부 전선에서는 한미 유엔군의 저항이 워낙 거세서 서울 점령을 포기했다. 이 실패로 서울 공격을 지휘했던 중공군 64군 사령관과 수뇌 간부들이 문책 인사되었다.
이런 중공군의 서울 점령 좌절에 전투 초반부터 과감한 반격으로 나간 식현리 공격의 결과도 어느 정도 기여를 했으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