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를 죽자고 거부한 ‘아버지’ 경찰 -1-
6.25남침 전인 1949년과 1950년 사이, 북한은 38선상의 긴장도 조성시키고 국군의 전투력를 점검할 목적 등으로 무장한 공비 부대를 열 번이나 남파시켰다.
1950년 6.25 남침 서너 달 전인 1950년 3월, 마지막이며 또 가장 규모가 컸었던 무장 공비 부대를 춘천 동쪽으로 남파되었다.
[경찰이 압수한 적색분자들의 죽창을 지키고 있다.]
6.25 직전 파견된 마지막 남파 부대의 규모는 500여명으로서 조선족 출신인 김무현이 지휘하고 있었다. 이 부대는 당시 국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엉성하게 경비하고 있던 38선을 손쉽게 뚫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목표는 당시 지리산에 남아 있던 공비들과 합세하여 남침 전에 교란전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이 부대의 소탕을 명받은 부대는 서정철 대령이 지휘하는 7사단 8연대였다. 이 연대 소속 중대장으로 공비 토벌에 동원되었었던 이대용 장군의 회고다. 남하하던 공비들은 강원도 홍천군으로 침투했다. 이대용 중대는 예상 침투로를 차단하고 호를 구축했다. 그 날 늦은 오후 홍천 경찰서에서 행정 경찰들로 급조한 일개 소대 병력이 지원 나왔다.
[6.25남침 다음 날, 급박한 포천 전선으로 출동하는 서울시경 경찰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이들 대다수가 전사했다.]
경위가 지휘하는 경찰 소대는 99식 총 무장에 각양각색의 복색에다가 어수선해서 한 눈에 보아도 오합지졸의 부대였다. 단지 긴 총신의 38식 총을 맨 소대장인 경위는 인물도 좋고 똑똑해 보였다. 이대용 중대장은 경찰 소대를 방어선 앞에 수십 미터 높이의 작은 독립 고지로 내보냈다. 전투력에 별로 신뢰가 가지 않으니 전초 기능이나 하라는 생각에서 보낸 것이다.
경찰들은 야전 삽이 없었으니 참호 같은 것은 파지도 않고 밤을 맞았다. 오합지졸의 경찰 부대가 그 작은 독립고지를 지킨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 챈 공비 부대가 그날 밤 자정 무렵에 기습해왔다.
기습의 효과는 놀라웠다. 경찰들은 변변한 대응사격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산산히 흩어져서 이대용 중대 방어선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이대용 중대가 빠르게 반격하자 공비들은 순순히 고지를 내주고 물러났다.
고지를 되찾자 이대용 중대장은 경찰 소대장에게 앞 고지로 되돌아가 야간 침투에 대비한 경계 근무를 계속하라고 부탁했다. 경찰 소대장은 부하 병력을 이끌고 다시 그 독립 고지로 되돌아갔다.
이제 다 배치가 끝났겠지 하고 왼쪽을 바라본 이대용 중대장은 깜짝 놀랐다. 이대용 중대장의 중대장 참호에서 10미터 떨어진 교통호에 경찰관 한 명이 자기 부대를 따라가지 않고 웅크리고 있었다.
이대용 중대장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하는 거요? 앞으로 나가란 말요.“
그러나 그 경찰은 못 들은 척하며 탄전을 폈다. 화가 난 연락병과 교육계가 뛰쳐나가 그 한심한 경찰관에게 윽박질렀다.
[보급도 나아지고 훈련도 어느 정도 되었던 전쟁 후반의 지방 전투 경찰]
험한 말이 나왔다.
“이 새끼야. 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명령에 불복종하는 거야?”
“비겁한 자식. 네 놈은 총살이야 ”
그러나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부답이었다. 두 병사가 밀어내다가 안 되니까 그의 머리 끄댕이까지 잡고 끌어냈는데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말해도 그가 꼼짝을 하지 않자 폭력이 행사되기 시작 했다. 무수한 주먹질과 군화발의 발차기가 그 경찰의 몸에 난발했다. 구타가 심해지자 그 한심한 경찰은 총을 가슴에 안고 엎어져 버렸다. 급소를 최소로 노출하는 자세인데 그런 자세에도 무수한 주먹질과 발길질은 계속되었다.
경찰인 그에게 그토록 호된 구타가 가해진 것은 그의 한심한 정신 자세도 문제였었지만 그간 군과 경찰의 사이가 안 좋았었던 배경이 있었다. 국방 경비대 시절 미군은 경비대 성격을 오산하여 경찰의 보조 부대 정도로 설정하고 대우 면에서 경찰과 여러 차이를 두었었다.
이런 무리한 정책은 경찰로 하여금 군을 하시하는 우월감을 가지게 했었고 군은 이런 경찰에 대해서 증오감을 품었었다. 이런 반목은 군이 정식으로 출범한 건국 후에도 계속 되었다. 이대용 중대장도 다른 간부들처럼 경찰에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중에 뜻밖에 전투를 거부해대는 경찰의 비겁함에 화가 나서 두 부하가 경찰을 두들겨 패는 것을 모른 체했다.
[제주도 경찰들이 체포한 제주도 공비들.]
두 병사의 구타에도 그 경찰은 꼼짝하지 않았다. 두 병사가 여러 번 그 비겁 경찰을 호 밖으로 끌어 내봐도 그 경찰은 필사적으로 다시 참호로 기어 내려와 원위치 해버렸다. 그러면서도 그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것이 더 얄밉게 보였던 것 같다. 두 병사들은 패고 패다가 지쳐서 씩씩대며 욕만 해댔다.
그런 폭력이 거의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대용 중대장은 너무 패면 그 경찰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야. 그만 하고. 이리 와.”하고 명령했다.
그 비겁 경찰은 밤새 엎드린 자세로 그대로 있었다. 예상했었던 공비 부대는 밤새 공격해오지 않았다.중대가 강하게 지키고 있는 이곳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우회한 것으로 추측 되었다.
[지리산에서 통비[通匪]분자들을 체포해서 연행해 가는 전투경찰]
날이 훤하게 새고 아무 이상이 없자 그 겁쟁이 경찰이 꼼지락 거리더니 일어나 앉았다. 이대용 중대장은 그가 마흔 살이 넘는 중늙은임에 놀랐다. 두들겨 맞아서 여기저기 부어터진 얼굴인데도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전방 독립 고지에 있는 자기 부대로 걸어갔다.
해가 훤하게 뜨자 아침 식사가 마련 되었다. 이대용 중대장은 앞 고지의 경찰 소대장에게 아침식사를 같이 하자고 초대했다. 식사를 하면서 소대장 경위에게 어젯밤 죽자고 후방 참호에서 버티던 중늙은이 경찰에 대해서 물어봤다. 소대장 경위는 그가 홍천 경찰서 형사계장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그의 계급은 경사이었을 것이다.
경위는 창피한지 얼굴을 숙이고 말했다.
“그 사람 원래 겁이 많아요.”
더해서 그 경찰의 비겁 행동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한 이유를 말했다.
“자식들도 많아요.”
경찰들은 그날 오후 연대 명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그 경찰의 지난 저녁 행동을 군법으로 평가한다면 명령 불복종에 적전 비겁 행위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였었다.
[전쟁 중의 이대용 중대장]
이대용 중대장은 그 늙은 경찰이 태생상 겁 많은 성격으로 공비들의 총격을 당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다는 결심까지 겹쳐 전쟁 공포증의 쇼크 상태에 빠진 것으로 짐작했다.
김무현 무대는 국군 토벌에 의해서 거의 소멸되어 버리고 김무현은 태백산맥으로 잠적해버렸다. 그 후 6.25 침공이 벌어질 때까지 더 이상의 공비 부대 침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