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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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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 해군 창설의 주역, 손원일 제독(출처 : 국방일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해양의 중요성이란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일찍부터 이 사실을 깨닫고 대한민국 해군 창설과 발전에 온 힘을 쏟았던 선각자가 있습니다. 바로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의 업적과 후세에 남긴 숭고한 정신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손원일 제독의 이름을 딴 우리 해군의 214급 잠수함 ‘손원일함’(출처 : 국방일보)


독립운동가 손정도의 아들


손원일 제독은 1909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손정도 선생입니다. 손정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장(지금의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김구·여운형 선생과 함께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했습니다. 이렇듯 강직하고 올곧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손제독 역시 일찍부터 애국심이 남달랐습니다. 바다에 조국의 미래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일제 치하에서도 상해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을 수료한 후 손제독은 외국 상선의 선원이 되어 5대양을 누볐습니다. 이 즈음 부친인 손정도 선생이 49세의 이른 나이에 임종을 맞았습니다.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과 과로로 생긴 위궤양이 원인이었습니다. 후일 손제독은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심히 슬퍼했다고 전합니다.


▲ 6·25전쟁 중이던 1951년,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사열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손원일 제독(출처 : 국방일보)


해군·해병대 창설의 주역


광복 후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 창설에 매진했습니다. 광복이 되자마자 상해에서 귀국한 그는 가산을 털어 ‘해사대’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80여 명의 젊은이를 모집한 그는 어렵사리 미 군정청의 허락을 받아 새롭게 공식 조직으로 출범시킵니다. 이것이 우리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입니다. 1945년 11월 11일 11시,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해방병단은 창단식을 가졌습니다. ‘해군은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손제독은 ‘선비 사(士)’자 두 개가 포개지는 때를 창단일로 잡았다고 전합니다.

해방병단 창설 후 한 달 뒤 손원일 제독은 사관후보생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병사들은 모였으나 이들을 이끌 장교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전국에서 모인 90명의 청년들을 뽑아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손원일 제독은 해병병단 시절 조함창(造艦廠)을 만들었습니다. 일본군이 운영하던 진해의 수리공장을 재가동시켜 군함을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1947년 이곳에서 만들어진 첫 배가 바로 ‘충무공정(PG-313)'입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PC-701) 


“해군 창설은 나라에서 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한 것입니다. 아무 예산도 없었습니다. 바다에는 전투함 한 척 없었고 사관생도들은 일본 군복을 고쳐 입었습니다. 신발은 고무신이나 미군 구두를 신어 ‘신사’ 해군이 아니라 사실상 거지꼴이었습니다.”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는 당시 우리 해군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렇듯 열악한 조건에서 손제독은 전투함을 구하고자 물심양면 노력했습니다. 군 장병 모금으로 1만 5,000달러를 모았고, 나라에서 4만 5,000달러의 예산을 지원받아 드디어 미국으로부터 첫 전투함을 구입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백두산함(PC-701)’입니다. 백두산함은 부산 앞바다에서 북한군 600여 명을 태운 수송선을 격침하는 등 6·25전쟁에서 큰 활약을 보였습니다. 또한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해병대의 필요성을 느낀 손원일 제독은 1949년 4월 15일 380명의 병력으로 대한민국 해병대를 창설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삼가 이 몸을 바치나이다’


해군과 해병대를 창설하고 우리 군 최초의 군함·전투함을 마련한 손원일 제독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라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손제독은 해군참모총장 재임 중 전사편찬실, 해군음악대 등을 발족시키며 군 조직체계를 마련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마치 해군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해군 창설과 발전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 지난해 11월 11일, 해군 창설 70주년을 맞아 손원일 제독 동상을 참배하고 있는 해군 지휘관 및 장병들

(출처 : 국방일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삼가 이 몸을 바치나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창군 표어입니다.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유학하며 나라 없는 설움을 견뎌내야 했던 손제독이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담아낸 말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표어대로 조국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손원일 제독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미국 해군 제독이 답례품으로 뭘 원하느냐고 묻자 “전투함(Warship)을 달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또한 손제독은 6·25전쟁 발발 후 원산 앞바다에서 우리 해군 함정이 적 기뢰에 침몰해 전사자 5명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 그들의 유품을 안고 밤새 펑펑 울었을 정도로 부하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지휘관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 제독의 업적과 일화를 살펴보았습니다. 손제독은 1980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후배 장병들에게 ‘나라 없는 서러움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는 내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주길 간절히 바란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눈을 감는 최후의 순간까지 조국의 안위를 걱정했던, 진정한 군인 중의 군인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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