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동고동락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1537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전설, 김경천 선생

$
0
0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전설, 김경천 선생


▲ 김경천 선생

(출처 : 국방일보)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160105&parent_no=8&bbs_id=BBSMSTR_000000000125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목숨을 내던지는 위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숙연한 마음과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낍니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런 위인들이 있었습니다.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들 말입니다. 오늘은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험난한 타국에서 무장 독립투쟁에 힘쓴 김경천 선생의 일대기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인 집안에서 키운 참군인의 꿈


김경천 선생은 1888년 6월 5일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김광서. 부친·숙부·증조부가 병조판서까지 지낸 무인 집안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고자 했으며, 평소 나폴레옹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결국 김 선생은 1909년 한국인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3기로 입학했습니다. 1911년 졸업한 김경천 선생은 동경 제1사단에서 기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19년 동경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2·8독립선언을 계기로 선생은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큰 뜻을 가슴 속에 품게 된 것입니다. 병가를 내고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육사 후배인 이청천(후일 지청천 장군), 이응준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 활동이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김경천 선생은 만주로 망명을 결심했습니다. 후일 조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만주·러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힘을 키워 무장 독립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 김경천 선생

(출처 : 위키피디아)



남만주 3천, 항일투쟁을 맹세하다


1919년 6월 6일 김경천 선생은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이들은 현역 군인 신분이라 당시 국내에서는 물론 일본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망명은 3·1운동 이후 수많은 한인 청년들이 만주로 망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주에서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하던 김경천 선생은 이청천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이들은 이곳 학교에서 ‘구한국군관학교’ 출신인 신팔균을 만나 조국을 위한 투쟁에 나설 것을 맹세했습니다. 이때 세 사람은 하늘 천(天)자가 붙은 별호를 나눠가지며 ‘동천’ 신팔균, ‘경천’ 김광서, ‘청천’ 지석규(이청천)라 지칭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남만주 3천’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김경천 선생은 ‘광서’라는 본명 대신 경천이라는 새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의기투합한 세 사람은 국경지역에서 제2의 3·1운동을 일으킨다는 목표를 품고 각지로 흩어집니다. 신동천은 남만주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이청천은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향했으며, 김경천 선생은 무기 구입을 위해 노령(露領 : 시베리아 일대)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백마를 타고 시베리아를 달린 ‘경천 김장군’


노령으로 향하던 김경천 선생은 당시 독립운동 활동이 활발했던 북간도를 중간 기착지로 정했습니다. 이곳에서 동지들을 모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선생은 다시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러시아로 망명한 김경천 선생은 수청지역의 ‘창해청년단’에서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며 마적 소탕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시베리아의 ‘김장군’으로 이름을 알린 김경천 선생은 1921년 연해주에서 조직된 통합 빨치산 부대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김경천 선생은 ‘고려의병대’의 지도자로서 당시 혁명 내전 중이던 러시아 적군(赤軍:러시아 공산혁명군)과 연합, 백군(白軍)·일본군 연합과 싸웠습니다. 제정 러시아파인 백군은 당시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1922년 김경천 선생은 이들과 여러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했습니다. 이후 선생은 ‘대한혁명단’ 사령관,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 등을 맡으며,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22년 12월 말 정세가 바뀌었습니다. 적군은 동맹군으로 싸웠던 한인 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했습니다. 김경천 선생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선생은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는 등 재기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후 김 선생은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는 등 여러 활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1937년 김경천 선생은 스탈린에 의해 한인 강제 이주 정책이 실시되기 직전, 간첩 혐의로 소련에 체포되었습니다. 2년 반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그는 카자흐공화국 코민테른 집단농장에서 채소 작업원으로 일하던 중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또 다시 간첩죄가 적용된 것입니다. 8년 금고형을 받고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하던 중 선생은 1942년 소련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고된 옥살이와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선생은 그해 1월 14일 54세를 일기로 숨졌습니다. 그가 묻힌 정확한 장소는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1998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경천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지금까지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명장 김경천 선생의 일대기를 살펴봤습니다. 김경천 선생은 타고난 무인으로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타국에서 투쟁을 펼친 위인(偉人)입니다. 그는 그렇게 꿈꾸던 광복의 순간을 불과 몇 년 앞두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숭고한 투쟁은 항일 독립운동의 ‘전설’이자 ‘역사’로 남아 지금까지도 큰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1537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