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중 양양 해변에 좌초한 태국함 -1-
태국은 드물게도 6.25 전쟁 중에 육·해·공 3군을 다 파병한 국가였다. 전쟁 중 한국에서 싸웠던 태국은 11,786 명을 파병했고 이들 중 136명이 전사했다. 태국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빠르게 참전 준비를 했고 북한 침략에 아시아에서 제일 빠르게 반응했었던 국가였다.
여기서는 태국 해군이 한국에 파견했던 두 척의 프리게이트 함 중 한 척이 동해 북한 영해에서 겪었던 조난 사건에 대해서 소개하겠다. 태국 해군이 파견했던 두 척의 전투함은 코르벳 함으로 파라세*와 방파콩이다.
* 태국 대사관 무관실에 문의해본 결과, Prasae라는 함명을 한글로 표기하면 '파라세'가 원명에 가장 근접한 표기라고 하여 이에 따른다.
[태국함 파라세가 영국 해군에 있었을 때 명칭은 베토니였다.]
두 함들은 영국 해군의 소속이었다가 태국 해군에 판매된 것들이었다. 순 톤수 1,000톤의 크기로서 만재 톤수는 1,640톤이었다. 각기 4인치 포를 장비하고 있었고 기본으로 일곱 문의 20mm 기관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원래 잠수함 사냥을 주업으로 삼기도 해서 두 기의 폭뢰 발사 장비도 있었다. 파라세와 방파콩 외 세번째 보조함도 있었다. 시창이라는 작은 배로 667톤 밖에 되지 않았고 두 문의 40mm포와 한 문의 20mm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시창은 일본 해군의 함을 전리품으로 압수한 것을 넘겨받은 것이었다.
[태국 해군에 취역한 파라세]
세 척의 전투함은 민간 지원선인 허타메르카와 함께 1950년 10월 22일 아침 태국을 떠났다. 2주의 항해 끝에 11월 7일 부산 항에 일단 기항했던 함대는 다시 일본 사세보 항으로 출항했다. 11월 10일, 기항지 사세보에서 태국 해군의 전투함들은 정식으로 유엔군의 해군 함대인 미 해군 95 기동 함대에 편입되었다.
태국 함대에 주어진 임무는 북한 해역에서 작전하는 유엔군의 여러 전투함들을 지원하는 유조선이나 탄약 보급함 등과 기타 지원함들을 공산측의 항공기와 잠수함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다른 유엔 참전국들의 해군 함대들과 함께 합동 작전도 주어진 임무 중의 하나였으며 북한 해안을 봉쇄하고 육지의 군사 목표들을 포격하는 임무도 있었다.
1950년 12월 4일 함정 정비와 무장 개선을 한 후 파라세와 방파콩 함은 출동 준비가 완비되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레이더와 소나의 개선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는 한국 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이 대공세를 취해서 남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유엔군의 해군 함대들이 한반도 근해로 출동하였기 때문에 사세보 내항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지키는 함정이 한 척도 없었다. 그래서 태국 함대는 사세보 해군 기지로 들어오는 해협의 초계 임무를 맡아 적 잠수함의 침투를 사전에 발견하고 격침한다는 경계 임무를 무리없이 잘 수행했다.
두 태국 함은 이 임무를 완료하고 이어 북한 해역으로 파견되었다. 두 함은 동해안 강원도 장전항과 양양항 사이를 초계하며 적 목표들에게 포격을 가하는 작전을 했다.
1951년 1월 6일 15:30.
통상의 해안 포격 작전을 하던 중에 미 구축함 USS 잉글리쉬가 다른 임무 수행차 해역을 떠나면서 태국함 파라세와 방파콩 두 함들에게 다음 날의 포격을 위한 정찰을 명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해상에 눈보라가 밀려왔고 물결도 높았다. 두 함은 추위 속에서 한국 동해안을 따라 4마일의 간격을 두고 초계를 계속하였다. 거친 폭풍과 눈보라로 뒤덮인 시계 제로의 상황은 원래 레이더에 문제가 있던 파라세를 예정 항로를 벗어나 점점 해안선으로 향하게 하였다.
1월 7일 아침 07:30,
선두에서 달리던 파라세는 강원도 양양 부근 기사문리 앞 바다에서 모래톱에 좌초되고 말았다. 바로 해변이 수십 미터의 지척에 있는 곳이었다. 조난 지점은 전선에서 100km 후방으로서 북한 땅이었다.
좌초한 파라세
함저[艦底]가 모래 해저를 긁다가 좌초되고 말았던 것이다. 함은 함수를 60도 각도로 육지로 향해놓고 거친 파도에 씻기며 정지해있었다. 눈은 폭설로 바뀌어 시야를 완전히 가리었고 진한 안개까지 몰려온 이 곳 해상의 온도는 섭씨 영하 17도나 되었다. 동료함 방파콩이 최대로 접근하여 11명이 탄 구조 보트를 내렸다. 그러나 험한 파도가 보트를 덮쳐 6명을 해상으로 휩쓸어 버렸다. 모두 헤엄쳐 보트로 돌아왔지만 한 명만이 실종되었다. 차르트 무앙함이라는 부사관이었다.
같은 기동 함대의 미군 함들이 현장으로 달려와 지원 태세를 갖추었다. 구축함 엔디코트와 만체스터, 구조함 볼스터,그리고 오후에 합류한 상륙정 운반함 컴스턱들이었다.
현장으로 날아온 최초의 헬리콥터는 존 손튼이 조종하는 헬기였다. 헬기에 탑승한 무선사는 파라세에 승함한 미 해군 연락 장교와 교신에 성공했고 연락 장교는 인근의 구조함 볼스터로 가서 구조 전문 장교 더드리 중위를 파라세로 데려 오도록 요청하였다. 볼스터는 이미 파라세에 구조 보트를 파견했으나 파도에 침몰하면서 승조원들은 익사했다.
조종사 손튼은 파라세의 미군 연락 장교에게 내륙 1.5km지점 능선에 북한군들이 파견되어서 잠복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북한군의 출현은 이 극한의 날씨에 연합군 함대에 파라세의 구조와 전투를 같이 해야 하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