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 지상군 주둔약사 [ 끝 ] 제5연대 전투단, 제187공수연대 전투단, 제1해병사단
제5연대 전투단은 원래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 전투단으로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 해제에도 참여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주둔군 외에 미국에서 가장 먼저 증원된 부대였다. 1950년 7월 31일 부산에 상륙한 후 낙동강 방어전에서 혈전을 벌이던 8군의 귀중한 예비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했고, 34연대가 연이은 졸전 끝에 해체되자 이후 24사단 예하로 편성되어 맡은 바 임무를 다했다.
[ 1950년 8월 27일 낙동강 전선의 5연대 전투단 야전 치료소 ]
제187공수연대 전투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창설된 제11공수사단 예하연대로 켄터키 주의 포트 켐벨(Fort Campbell)에 주둔 중이던 1950년 8월 1일 전투단을 구성하여 9월 20일 일본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맥아더가 이 부대를 한반도에 투입하여 줄 것을 요구했을 때 내주기 싫어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질 정도로 정예 중의 정예였고 현재도 세계 최강의 공수사단으로 평가되는 제101공수사단에 속해 있다.
[ 제187공수연대는 미군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
187공수연대 전투단은 10월 20일 김일성 체포와 북한군의 퇴로차단을 목표로 순천-숙천 사이에 대규모 공수작전을 수행하면서 멋지게 6.25전쟁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후 1951년 3월 임진강 일대에서 후퇴하는 중공군의 퇴로를 막기 위한 공수작전을 다시 한 번 수행했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유엔군 전체의 전략예비대 역할을 수행하다 1955년 미국으로 귀대했다.
[ 문산 공수작전 당시의 모습 ]
제2차 대전 종전 후 제1해병사단은 축소 편제되어 캘리포니아 주 포트 펜들턴(Fort Pendleton)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증편에 착수하여 육군 7사단과 함께 10군단을 구성하여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 시점까지도 사단 병력은 여전히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작전 중이었는데 7해병연대는 한국으로 이동 중이었고, 5해병연대는 낙동강 방어전투에 임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 제1해병사단은 지금도 최강의 전략 기동부대다 ]
20세기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인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도 이 부대의 명예를 드높였지만 그해 11월부터 12월 사이에 있었던 장진호전투는 미군 전체의 신화로 남아있다. 비록 부대가 재편되는 데 엄청난 시간을 요할 정도로 많은 타격을 입었지만 중공군 수개 군단을 잡아놓고 출혈을 강요해 함경도 방향으로 진출했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의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여 주었다.
[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모습 ]
또한 십여만의 민간인이 흥남부두를 통하여 공산 치하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든 전사를 통틀어 보기 힘든, 그것도 후퇴라는 급박한 순간에 이루어진 놀라운 인도적 작전이었다. 이런 명성으로 인하여 해병 1사단의 장진호전투는 오키나와전투, 이오지마전투와 더불어 미 해병대 역사상 3대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중부, 서부전선을 담당하다 1955년 4월 미국으로 철수했다.
[ 신화가 된 장진호 전투 당시의 모습 ]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미군의 많은 지상군 전투부대가 한국과 인연을 맺었음을 알 수 있다. 행정적으로 군정을 담당하기 위해 잠시 주둔했던 부대도 있었고 엄청난 피를 흘려가며 치열한 전쟁의 한가운데서 맹활약한 부대도 있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상군을 보호하고 도와준 해군, 공군은 물론 비전투부대를 포함한 수많은 여타 부대들도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 현재도 미 지상군은 대한민국 안보의 중요한 조력자이다 ]
미 군정시기에는 1개 군단 예하 3개 사단이 주둔하여 정부 수립 이전까지 행정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담당했고 전쟁이 한창일 때는 1개 야전군, 3개 군단, 해병대 포함 9개 사단(동시 최고 7개 사단이 참전했고 2개 사단은 후방에서 재편)의 거대한 군대가 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해 투입되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미 지상군의 여러 부대들은 굴곡 많았던 우리 현대사의 일부임에는 틀림없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