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브로큰의 포로 영웅과 극악 감시원 -2편-
두 사람은 포로가 된 뒤 42일 동안 콰자레인 환초도에 구금되어 있다가 일본 본토의 오후나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일본 당국은 적십자사에 통보하는 포로 명단에서 두 사람을 빼버렸는데 이는 명백한 제네바 협약의 위반이었다. 미국에서는 이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잠페리니의 2인 포로는 다시 도쿄 인근의 오모리[大森] 포로 수용소로 옮겼다가 다시 일본 북부에 있는 나오에쓰[直江津] 포로 수용소로 이감되었다.두 사람은 나오에쓰 수용소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 생활을 하게 된다.
잠페리니는 이곳에서 악마라는 단어 외에 달리 표현하기가 적절한 단어가 없을 정도로 잔인한 포로 감시병 와타나베 무쓰히로[渡邊 睦裕]를 또다시 만나게 된다. 잠페리니는 오모리 수용소에서 와타나베와 짧은 만남은 있었지만 깊은 관계는 없었다.
와타나베 무쓰히로
이 인간에 대한 설명을 해보자.
와타나베는 포로들 사이에 버드[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918-2003] 그의 잔인함은 그의 출신 환경이나 성장 과정이 비정상인 것으로 짐작하게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는 않다. 일본의 상류층 가정 출신으로 부유하게 자랐고 좋은 대학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와타나베의 부모는 호텔과 광산을 소유한 부자였다.
그는 그런 부자 부모 사이의 여섯 명 자식 중의 네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에서 잘 큰 와타나베는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여 불문학을 전공하였다. 와타나베는 졸업 후 도메이 통신[同盟 通信]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징집당했다. 군에 입대한 후에 그는 그의 형이 그랬듯이 간부 후보생으로 선발될 줄 알았지만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그의 소속은 포로 수용소를 관리하는 근위 보병 1연대 소속으로 여러 곳의 포로 수용소로 옮겨 다니며 근무하였다. 패전시 계급은 군조[軍曹- 중사]였다가 일본군이 패전 후에 군대를 해산 할 때 간부들을 일률적으로 승진시킨 덕분에 최종 계급은 조장[曹長- 상사]으로 기록되었다.
장교가 될 수 없었던 그의 좌절감과 열등감이 그의 잔인성 발휘에 한 요인이 되었다고 분석되고 있다.
잔인한 와타나베는 매일 포로들을 구타했다. 그에게 맞은 포로들은 고막이 터지거나 목의 기도(氣道)가 파손되거나 이빨이 날아가기도 했었다. 그는 그것도 부족해서 한 포로의 귀를 반쯤 잘라버리기도 하였다.
그는 한 겨울에 훈도시[일본식 팬티]만 입은 한 장교 포로를 땅에 파묻은 드럼통만한 상자에 가두어 놓고 나흘간이나 방치하기도 하였다.
그는 65세가 되는 연로한 포로 한 명을 나무에 묶어두고 16일간 그냥 두기도 하였고 한 포로에게 매일 찾아와서 신고하게 하고 신고할 때마다 얼굴에 핵 펀치를 날렸었다. 와타나베는 핵 펀치를 가격하는 엽기적 폭행을 3주간이나 했었고 맹장염으로 신음하는 포로 환자를 유도로 땅에 패대기치기도 했다.
영화 언브로큰의 포로 수용소
와타나베는 사석에서 사람을 팰 때마다 쾌감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하여튼 그는 가학성 변태 성욕자인지도 모른다. 그는 정서가 극히 불안정한 기분파이기도 했다. 하루는 사람을 패고 다음 날은 두들겨 맞아서 만신창이가 된 희생자에게 캔디를 한 주먹씩 주거나 담배도 몇 갑 씩 던져주기도 하였다.
와타나베는 포로 수용소에서 올림픽 스타의 경력에 기적적인 생존으로 포로들에게 영웅처럼 존대 받는 잠페리니를 지극히 미워하였다. 그의 인기를 시기한 것이었다.
그는 잠페리니에게 통나무를 37분이나 들고 있게 했다가 내려놓자 복부에 훅을 한 방 먹였다. 와타나베는 포로들을 두들겨 팰 때 “게이레이[敬禮]!”구호를 연발하며 포로들을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게 하였다. 이 자에게 무수히 두들겨 맞은 잠페리니는 전후 미국에 돌아와서 비슷한 소리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차렷 자세를 하는 증세를 보였다.
와타나베의 악명은 패전 후 일본에 설치된 맥아더 사령부에서 현상 수배한 전범 40인중 23번째의 인물로 올라가게 하였다. 와타나베는 자신이 수배된 것을 알자 일본 점령 미 군정 기간 동안 깊숙이 잠적했다. 그는 7년간 농장의 인부나 식품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체포를 피해 다녔다. 미군정이 끝나자 그에 대한 수배령도 자동 폐기되었다.
독일은 현재까지도 전쟁 범죄자들을 추격하여 나이 90이 다 된 나치 잔당까지 체포해서 단죄하고 있지만 일본은 인류 보편적 양심과 도덕을 위반한 이들 동족 전범들을 그대로 놔두고 문제 삼지 않았었다.
이렇게 7년간 도망 다니다가 미군정이 종식되자 컴잉 아웃에 성공한 자로 일본 군벌 최대 또라이 장교 쓰지 마사노부[辻 政信]대좌가 있다. 그는 싱가포르나 필리핀의 민간인들과 포로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대형 전범이기도 했었다.그 전범질의 수준이 와타나베 따위와 비교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무거운 헤비급이었으나 미군은 이 인간을 체포하지 못했었다.
쓰지 마사노부 대좌
그는 세상에 나온 뒤에 체포를 피하여 도망 다닌 그간의 기록[潜行 三千里]을 출판하여서 돈도 벌고 그 인기로 중의원까지 되었었다.
일본 민족 전체가 전범 심리가 있었으니 이런 것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위안부 문제에 그처럼 뻔뻔한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도 민족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