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포로들 - 중공군은 북한군에 비하면 미군 포로들을 비교적 인도적으로 대해 주었었다.
운산에서 중공군에게 한방 먹은 뒤 중공군의 실제 참전 병력을 알게된 미군 수뇌부는 한국군이 보기에 참 이해하기 힘든 작전을 전개했다. 한국군 미군뿐만 아니라 모든 유엔 부대를 몽땅 전선에서 빼서 오던 길을 돌려 변변한 전투 한 번 없이 평양도 내주고 삼팔선으로 철수를 해버린 것이다. 다 된 통일의 앞에서 전투도 없이 그저 한 없이 후퇴를 거듭해야하는 국군 장교들은 비감한 생각에 눈물까지 흘렸지만 병권을 한손에 쥔 미군이 하는 짓이니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할 여유가 없었다.
후퇴를 거듭하던 유엔군은 서울 북방에 이르러 진을 쳤지만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이 방어선을 압도적인 병력을 퍼부어서 공격했다. 서울 점령을 위해서 중공군이 벌인 전역[戰役]이 제3차 전역[三次 戰役]이다. 한국과 유엔군은 또 다시 서울을 내놓고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후퇴했다. 미군이 운산에서 한판 깨지고 난 뒤 제대로 된 전투도 없는 일사천리의 후퇴였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서울로 들어와 김일성의 북한군이 그 작년, 9월 28일 내쫓겼던 서울을 다시 차지하였다.
서울을 재점령한 중공군과 북한군
일사천리의 남하 진격을 한 중공군의 진격은 하여튼 세계가 경이의 눈으로 지켜보며 탄복했다. 이는 중공군의 압도적인 승리였으며 태평양과 유럽에서 두 강대국 일본과 독일을 한꺼번에 상대해서 대승리를 거두었던 미국의 꼴사나운 패퇴였다. 미군이 상대했던 일본군이나 독일군과는 질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빈약한 무장의 중공군이 미군을 격퇴시키고 추격까지 해서 서울을 점령하자 중국에 대한 평가는 하늘같이 솟아올랐다.
미국의 체면은 말 할 수없이 구겨졌고 국제적인 조소가 나왔다. 더구나 미군의 볼품 없었던 퇴각을 시작할 무렵부터 언론에 미군들이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해 염전 사상이 전군에 확대되어 전투력이 말이 아닐 정도로 저하 되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가 되었다. 반면 이승만 이하 한국의 정부 관리들은 미군이 싸우지도 않고 철수를 거듭하다가 수도까지 내준 상황에 대해서 미군의 처사에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전투 한 번 없이 기약 없는 남행열차를 탄 듯한 이해 할 수 없는 미군의 무작정 후퇴에 대한 이면 분석을 해본다. 지금에 와서 미군의 대후퇴는 병참과 보급에 취약한 중공군을 병참선을 연장할 만큼 연장하게 해놓고 공중 공격에 노출시켜 중공군을 약화시킨 뒤 공격하겠다는 전략 때문에 이렇게 후퇴했다는 뒷말을 전하고 있다. 인생을 마감하는 나이 70대에 자신이 평생 쌓아온 명장으로서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싸움을 해버린 맥아더의 분노한 심리 상태가 이 후퇴 전략의 기본에 깔려있었다.
미군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잠입해 들어와 잠복할 때까지 정보수집에 미흡하다가 중공군 포로가 다수 획득되면서 그제서야 반도 참전 중공군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대승리가 필요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중공군의 완전한 대량 섬멸이었다. 그 정도의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중공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군사적 판단도 유엔군 내에 이미 확립된 상황이었다. 그는 새로 나타난 이 중공군이 숫자는 많았지만 가진 화력이 단지 기본적인 보병 화기뿐이고 보급도 엉망이라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비록 자신의 부대가 자만의 대가로 두 번이나 두들겨 맞았으나 기습이 아니라 적당한 장소에서 정면으로 맞붙으면 중공군은 미군의 상대가 전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맥아더는 중공군 수십만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하는 대섬멸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모택동의 부대이기도 한 이 중공군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버티는 장기전에 능하다고 파악했다.
더구나 사람들의 바다 중국은 수 십만이고 수 백만이고 아무리 사람들이 죽어도 인적자원은 물 붓듯이 제공할 수 있으니 추스릴 수도 없는 괴멸적인 타격을 줘 압록강 밖으로 내쫓고 든든한 방어선을 쳐서 다시는 한반도에 얼씬 거리지 않게 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말해서 일차 세계 대전 때의 탄넨부르그 대회전이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소련 군을 대파했던 초기 바바로사 작전같은 포위 섬멸전을 꿈꾸고 있었다.
독일이 166개 사단을 동원하여 소련을 친 바바로사 작전.
한꺼번에 60만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기도 했다.
이 정도로 타격을 주고 방어선을 튼튼히 하면 중공군은 다시는 한반도를 넘보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지휘했던 유엔군과 한국군의 병력 규모는 단지 20만의 병력으로 전쟁을 시작했던 북한군을 상대로 전쟁을 하기 위한 규모였다. 거기에 30만이라고 하는 병력이 새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 미군 병력 증파와 더해 대만군 5만 명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대만군이란 장개석 군대를 말하는데 모택동 군에 대만으로 볼품없이 쫓겨 갔지만 대만에 자리를 잡은 뒤 훈련에 힘쓰고 군 장비 개선에도 노력한 끝에 상당히 향상된 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더해서 맥아더는 한반도와 중국 국경지대, 중공군이 침투하기 좋은 국경 산간 지대에는 원자로에서 나온 방사능 재를 뿌려서 인원의 통과를 불가능하게 만들 예정이었다. 이것만 아니라 만주를 폭격해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중·소의 철도망과 도로망을 모두 폭격할 계획도 세우고 일부 중국 연안 지역에 대만군으로 하여금 상륙 공격을하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보면 중국과의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것인데 이 정도의 계획을 세운만큼 맥아더는 투지에 불타있었다. 물론 워싱턴과 협상 카드로 과하게 내세운 것도 있을 것이다. 요청한 병력이 증파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중공군의 대병력을 맞아 섬멸해버릴 넓은 평야 지대가 필요했다. 그가 결전의 장소로 삼은 곳은 한강과 금강 사이의 넒은 평야지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맥아더와 리지웨이[오른쪽에서 세번째]
이 지역은 주요 인구 밀집지역으로서 중공군으로서 반드시 욕심을 낼만한 가치가 있었고, 이 지역은 중국에서 북한을 거쳐 일선에 오는 보급은 대부분 서울을 거쳐 한강을 도하하여야만 가능하다는 취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적의 보급로를 최대한 미군 항공 공격에 노출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긴 거리까지 후퇴할 필요가 있었다.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은 맥아더 전략의 항상 주요 근간이었다. 그러나 보급로 연장을 하는 것은 다음의 문제였고 병력 보강을 위한 시간 벌기와 중공군 섬멸을 위한 전장 선택이 더 큰 변수였던 것이다.
그런 중요한 판단에 한국민의 통일 염원은 미군 수뇌부에 눈에는 안 보였을 것이다. 미군의 사기가 너무 저하되어서 전력이 극히 약해졌다는 소문이 났던 것은 미군 정보 당국이 중공군에게 죽음을 안겨 줄 전장으로 유인할 목적으로 언론 플레이를 해놓은 결과였다. [언론의 이런 거짓 소문 전략은 미군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다. 심리전의 일환인 이런 기만 전략은 미군이 60년대 말 월남 고원지대 케산 기지가 고립되자 더 많은 월맹군을 이곳에 집결시켜 항공력으로 전멸시켜 버리기 위해서 마치 이곳이 제2의 디엔 비에 푸가 될 듯이 위와 꼭 같은 심리전을 전개했지만 케산 기지를 포위했었던 월맹군은 덫에 걸리지 않고 철수해버렸다. 미군은 이런 언론 플레이의 심리전을 걸프전에서도 써먹었다.]
미 해병대와 월남군이 77일간 버틴 케산 공방전
이 심리전이 얼마나 감쪽같았는지 의정부에서 사고사 했던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한국 전선에 온 매튜 리지웨이 중장도 그 소문을 믿고 한국에 왔다가 사실과 다름을 알고 매우 놀랐다는 기록을 남기기까지 했다. 여기까지가 남하 전략에 대한 맥아더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적은 워싱턴에서 나타났다. 맥아더가 계획한 자신의 마지막 전쟁은 내부로 부터의 반대에 의해서 좌절을 겪어야했다. 워싱턴의 합참과 육군성은 물론이고 국방성까지도 그의 증파 요구와 중국에 대한 확전을 차단하고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먼저 미군이 청천강 이북에서 큰 타격을 입고 일사천리로 후퇴하자 미국 내에 반전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이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전투를 비싼 세금을 낭비해 가며 계속할 이유도 없고 남의 나라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을 무가치하게 죽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있었던 트루먼 대통령은 별로 안 좋은 상황으로 흘러가는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할 실정이었다. 더구나 그는 평소 거만하고 항명을 밥 먹듯 하는 맥아더에 안 좋은 감정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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