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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경찰이 공비 소굴에서 만난 어린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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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경찰이 공비 소굴에서 만난 어린 아이


한국의 6.25 전쟁 동안 전선 지역뿐만 아니라 공비들이 준동하는 후방 지역에서도 많은 비극들이 양산되었다. 후방 지역이 겪은 비극의 특징은 총을 맞대고 싸운 당사자들이 전투의 피해를 입었을 뿐더러 그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김일성 부대가 밀고 내려오자 지하에서 나타난 좌익들은 군인 가족과 경찰 가족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부인은 물론 연로한 부모님들과 어린 자식들까지도 죽이는 학살들이 부지기수였다.


적 치하에서 군경들의 가족들과 우익들의 가족들이 애꿎은 고초를 겪은 반면 수복이 되자 좌익 가족들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학살을 저지르고 도망친 악질 좌익들의 형제나 부모들 중의 많은 사람이 학살 유가족들의 보복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유족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좌익 가족들의 수난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적 치하에서 부역을 했던 인간들은 북이나 산으로 도망쳐서 공비가 되었다. 뒤에 남은 좌익 가족들은 경찰과 대한청년단에게 시달렸고 주변에서 백안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끈끈한 가족애는 많은 부역자 가족들을 도망친 좌익 혈육들을 따라 입산하게 해서 공비가 되게 했다.


전투 경찰의 출동



한 기록에 의하면 한국의 공비들이 남한에서 섬멸된 가장 큰 이유는 충분한 식량 조달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제대로 식량을 구하지 못한 공비들은 막판에 식량 도둑질의 강도범 집단으로 전락하였는데 공비들을 기아선상에 몰아넣은 큰 원인은 전투력은 전혀 없으면서 식량은 다량 소비하는 비전투원 가족들이 공비 부대에 너무 많이 합류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들 한국형 가족애[家族愛] 때문에 산에 따라 들어간 가족들까지 공비로서 비참한 죽임을 당하는 일들도 자주 있었다.


이와 관련된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의 일화가 생각난다. 군경의 대토벌중에 은신하던 공비 일가족이 적발되었다. 진짜 공비인 아들은 폐결핵에 걸린 중환자였다. 자식을 따라 입산해서 병수발을 하던 늙은 아버지는 토벌대에게 차라리 아들을 죽여서 아들과 가족들의 고통을 끊어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한국 전투 경찰사에 이런 슬픈 이야기는 무척 많이 나오는데 부부 또는 부자 관계 때문이 아니라 부모를 따라 산에 들어와 생고생을 하는 어린이들의 이야기는 더욱 애절하다. 


그 기막힌 사연을 알려주는 한 일화를 소개한다. 아래 글은 ‘호국 충남 경찰사’에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고 서재호씨가 쓴 것이다. 서재호 씨는 1948년에 경찰에 투신하여 일생을 경찰관으로 보내신 분으로 2012년 작고 하셨다.


지서주임의 직책에 있다가 6.25 전쟁을 만난 서재호 선생은 생사를 넘나드는 여러 전투들을 겪었다. 서재호 씨는 1951년 지리산 지구에 파견된 충남 경찰청 소속 전투 경찰부대 205부대 3중대 1소대장으로 공비 토벌 작전에 출동하였다.


그의 소대는 공비 수색을 하다가 뜻 밖에도 한 아지트에서 공비들인 부모들이 그냥 놔두고 떠난 5-6세 된 어린 아이를 발견하였다. 부모 공비들은 경찰의 추격이 너무 급하자 앞뒤 돌보지 못하고 도망쳐야 할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경찰들은 그런 어린이를 어떻게 못하겠기에 살살 달래서 부모들이 어디로 갔는지만 물었었다. 그랬더니 그 어린이는 천진하게 대답했다.


“꺼먹 개를 잡으러 갔어!.” 


꺼먹 개란 이곳 사투리로서 검은 개를 말한다.공비들은 군경을 개라고 불렀고 군인은 푸른 개, 경찰은 검은 개라고 비칭(卑稱)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이로부터 꺼먹 개라고 불린 경찰들의 기분은 묘했을 것이다. 경찰은 그 어린이를 그냥 놔두고 귀대했다. 며칠 뒤에 같은 곳에 가보니 그 어린애는 보이지 않았다. 공비 부모가 돌아와서 데리고 피신한 것으로 보였다.


최후의 공비 정순덕

  * 공산주의는 커녕 세상살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던 어린 촌부[村婦] 정순덕도 남편을 따라 공비가 된 경우였다.


위의 일화와 같이 가족을 잘못 둔 덕분에 졸지에 산에 끌려 들어가서 공비가 된 어린 아이들이 무척 많았다. 1951년 봄, 전북 경찰 특공대가 전북 순창의 공비 소굴 가마골을 기습했을 때 공비 어린이들을 위한 초등학교[초등학교]까지 발견되었었다. 부모 잘못 둔 덕분에 억지 공비가 되었던 어린이들은 대부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제일 먼저 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비 토벌 군경들은 전투기를 동원한 폭격은 물론 포격도 수시로 해댔었다. 눈이 없는 폭탄이나 포탄들이 사정 가리지 않고 낙하했을 것이고 대피에 동작 느린 어린이나 아이들을 챙기던 부모들이 첫 희생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리산 고산일대를 휩쓴 엄청난 추위에서도 제일 먼저 사망했을 공비도 저항력없는 어린이들이었을 것이다. 


지리산과 그 남도 일대의 공비들이 한창 위세를 부릴 때인 1950년 수복직후에는 일 만 명이 넘었으나 군경의 가차없는 토벌 작전으로 5년 뒤에는 불과 5, 60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가 60년도 초에 완전 섬멸되었었다..


토벌 된 공비들중에 어린이들이 상당히 많았을텐데 산중에서 말없이 죽어간 어린 생명들이라서 별다른 기록도 남기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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