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시리즈 -1]
北 소대장이 겪은 오산 죽미령 전투 -1-
1950년 6월 25일, 크게 오산한 김일성은 동족상쟁의 남침을 감행했다. 그와 그의 일당, 그리고 그 뒤에서 침략의 후견인 노릇을 했었던 스탈린이나 모택동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은 재빨리 참전 결정을 내리고 공중 폭격에 이어 육군 병력을 파견하였다.
남침 열흘 뒤에 미군이 파견한 보병과 포병 540명의 혼성 부대는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오산 전투의 패배는 미국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했었다. 생긴 지 몇 년 안 된 아시아 신생국의 군대에 세계 최강의 군대가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사실은 미국 국방사에 창피한 오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
오산시 유엔군 초전비
현재 오산 현지나 우리 국방 전사에도 아깝게 희생당한 미군들을 추모하는 분위기를 배경으로 두고 오산 전투를 그저 아깝게 패배한 전투로만 인식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런 감성의 차원으로만 볼 전투가 아니었었다. 전사나 전략을 공부하는 후학(後學)을 위해서도 이 전투는 냉철하게 분석해보아야 한다.
오산에서 미군을 격파한 부대는 3류 신생국의 엉성한 부대가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국공(國共)내전을 3년간이나 겪으면서 단련된 조선족 강병들로 편성된 북한군 최강 연대였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정예 부대가 전개한 미군 보다 무려 여섯 배나 많은 대병력을 동원해서 미군을 공격해왔다. 게다가 사단 작전이나 지원하는 규모의 1개 전차 연대 35량의 전차대가 직접 공격에 참여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전투는 애초부터 “대군(大軍)의 적 앞에 전략의 묘수(妙手)없다”는 병법의 금언이 적용되는 가망 없는 전투였었다.
방어했던 미군을 보자. 어쩔 수 없는 급박한 상황과 시간에 쫓겨 군대를 투입한 미군은 사전에 정보 분석도, 전투 준비도 할 충분한 여유가 없었다. 아무리 세계 최강국의 군대라지만 이날 오산 전투는 미군이 해서는 안 되는 전투였었다.
오산 전투에서 바주카 포를 조준하는 스미스 특임 부대원 Robert L. Witzig
이 상황에서 장병들은 막연히 미군의 강함과 북한군의 약함을 상대적으로 과잉 비교하고 전투에 말려들게 되었었다. 이 점에서 미군 측의 오산 전투 패배 원인에는 경적필패(輕敵必敗)라는 이차적인 금언이 적용되는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다.
오산 전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북한군 측의 이야기도 들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전투에 참여하였던 북한 최강연대 4사단 18연대 북한군 소대장의 회고를 통해서 오산 전투의 이면(裏面)를 조명해보기로 한다. 아래는 북한군 소대장으로서 전투에 참가했던 분의 회고담이다.
10년 전 중국을 방문했다가 유명한 역사학 교수이었던 박ㅇㅇ 선생을 뵈올 수가 있었다. 술을 좋아하시던 그 분과 두어 번 술자리를 가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분은 안면이 익어지자 자기가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바짝 흥미가 돌아 귀를 기우렸다. 오산 전투는 여러 번 나눈 그 분과의 대화에서 나왔던 일화였다.
박 선생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도 잘 알려진 분이시다. 그래서였을까? 박 선생은 6.25 전쟁에 참전했던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는 것을 극구 사양하였었다. 몇 년 전에 북한군 최강 연대에 대한 글을 내 블로그에 소개했었는데 그 분의 신분은 사업가인 김 모씨로 할 수밖에 없었다. 독자 분들에게 미안했는데 이번에는 성씨(姓氏)만은 제대로 밝히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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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화룡현에서 태어난 박 선생은 해방 후 만주 지역을 석권한 모택동 군에 입대하게 된 것이 이런 극적인 인생 역정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해방 후 구 만주 지역[현 동북지역]에 밀어닥친 국공 내전에 모택동 군에 참전해서 싸운 조선족 동포들은 무려 5-6만 명이나 되었다.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간 후에 모택동은 조선인들만으로 부대들을 구성해서 북한으로 보냈다. 조선족 부대의 북한 파견 배경에는 남침을 꿈꾸던 김일성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
1949년 10월 장개석을 대만으로 축출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38선에 전개해서 남침에 앞장 선 북한군 부대 중 46%가 전투 경험 풍부한 조선족 부대들이었다. 38선 오른쪽 동해안에서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침략의 요지에는 전부 북한군 사단으로 둔갑한 이들 조선족 부대가 배치되었었다.
동해안에서 국군 8사단과 전투를 했던 북한군 5사단이 있다. 사단장은 김창덕이다.[마 상철로 기록한 책도 있다].이 부대는 모택동 부대로서 장춘 포위 작전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단이었다.
또 중부 전선에 전개했던 7사단이 있고 사단장은 전우였다. 이 사단은 양자강을 도강하였던 부대였는데 사단장 전우는 남침 2주도 안되어 전과 부족을 이유로 조선족 장군 중 제일 먼저 숙청되었다.
* 국방 전사는 이 7사단의 명칭을 12사단으로 기록하고 있어 무척 혼란스럽다. 이 사단에 정치 장교로 참전했었던 조선족 간부의 말에 의하면 이 사단은 7사단으로 참전했다가 안동 점령 후에 안동 부대라는 명예 칭호를 받고 12사단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남침 초기에는 사단 명칭이 분명 7사단인데 오래 전의 전사 출판물(7사단)과 현재의 전사 출판물(12사단)은 같은 사단을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으니 전사 연구소 측에서 어느 정도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에 서울을 공격했었던 부대다. 연대 단위로 쪼개진 두 개의 조선족 부대가 4사단의 18연대와 105전차 여단의 모터사이클 부대가 서울 침공의 선두에 섰었다. 이 부대들은 뒤에 다시 설명한다.
제일 서쪽 개성을 점령하고 급속히 남하한 북한군 6사단이 있다. 사단장은 방 호산이다. 이 사단은 중국 심양 공략전에서 전공을 세운 부대였다. 6 사단은 비어있는 서해안을 따라 급속 기동, 목포를 점령하고 마산까지 진출해서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위협하던 부대였다.
* 중국의 전사가들은 6사단을 북한군 사단 중에 가장 잘 싸웠던 정예 사단으로 평가하고 사단장 방 호산을 한국 전쟁 제일의 명장으로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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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호산
박 선생의 부대는 모택동의 인민 해방군 47군(군단) 3개 사(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족 군인들을 모두 차출 편성해서 북한에 보낸 부대였다. 중국 인민 해방군 47군은 1947년 만주 돈화에서 창설하여 국공 내전에서 먼 내지(內地)인 중경까지 진격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정예 부대였다. 47군은 모택동 군중에서 실전을 가장 많이 겪은 풍부한 전투 경력의 군(군단)이기도 하였고 조선족 병사들이 제일 많았던 군단이기도 했다. 이 47군의 젊은 조선족 병사들은 전투 때마다 같은 부대 한족(漢族) 병사들이 입을 벌리게 하는 용감한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대부분 동포 부모들의 교육열이 높아 초등학교 교육은 마쳤었고 한글의 우수성 덕분에 비교적 문자 해득력이 높아 군사 교육을 잘 습득할 수 있었던 것도 원인이겠지만 먼 이국의 개척지를 찾아갔던 도전적인 가족사가 이들의 용맹성 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 예로서 나중에 국방상이 된 임표의 경위 부대가 모두 조선족이었다고 한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