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시리즈 -1]
北 소대장이 겪은 오산 죽미령 전투 -2-
북한 이동 명령이 내렸을 때 47군은 호남성 서부 산악지대에서 국민당 낙오 부대 소탕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지역이 넓고 교통이 불편해서 명령 전달에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47군 소속의 전 조선족 병사들이 당시 군 사령부가 있던 대용에 집결했던 때는 남부 호남성에 춘색이 완연한 1950년 3월이었다.
이곳에 모인 조선족 장병들은 47군 139사 출신800명,140사 출시 1,800명 141사 출신 2,800명으로 총 5,400명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조선독립단'이란 명칭의 임시 부대로 편성되었다. 단장에는 140사에서 영장[營長-대대장]을 했던 장교덕이 임명되었다.
조선족 장병들에게 공식으로 내려진 이동 명령의 이유는 조선으로 가서 전쟁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 간 중국 혁명을 위해서 수고했으니 고향인 동북 지방[만주]에 가서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모택동
[그는 김 일성의 침공을 위한 인적 전투 자산 절반을 공급한 과오가 있다.]
그러나 간부들은 북한으로의 이동을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전쟁 동안 모택동 군대가 넓은 중국 대륙에서 너무도 쉽게 장개석군을 격파하고 공산 혁명을 달성해가자 조선족 병사들 사이에 중국 혁명이 완성되면 우리도 한반도로 가서 미국이 '점령'하고 있는 남조선을 해방하자는 여론들이 팽배해 있있다.
그런 인식들이 있었으니 북한 이동에 대해서 조선족 간부들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영웅심으로 형성된 '남조선 해방'의 객기는 김일성에게 교묘하게 이용되어 수많은 조선족 젊은이들이 침략의 총알받이로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직 살찌기 전의 김일성
[1946년 촬영. 현재 국군 해병대의 돌격형 머리와 비슷하다.
이 헤어스타일은 소련군 사이에 유행했으며 북한 사람은 닷푼[5부]머리라고 불렀다.]
조선 독립단은 중국인 전우들의 환송을 받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들은 장교덕의 인솔로 며칠간 천리 길을 걸어 중국 중부의 무한(武漢)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조선족 병사들은 모두 기차들에 올라탔다. 기차가 쉬며 가며 하루 넘게 달려서 압록강 건너 북한 땅에 들어섰다. 평북 정주에 도착하자 전원 하차 명령이 내렸다. 북한군 장군 김광협이 참모들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광협은 민족 보위상 최용건의 직계였으나 전쟁 중에 단계적으로 숙청되었다. 비슷한 운명을 간 대표적 직계로 포천 방면에서 남침한 2 사단장 이영호가 있다.김일성의 대선배 최용건은 자기 수족이 다 잘리고 외톨이가 된 말년에는 늘상 김일성의 욕을 해대다가 중국인 부인 왕옥환에게 “저 놈 밑에 살지 말고 네 고향 중국에 가서 살라.”고 유언하고 죽었다.
민족 보위상 최용건
[오산학교 재학시 교장 조만식 선생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으나 중국으로 가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 곳 정주에서 일주일 동안 북한군 편입을 위한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먼저 5천 4백 명의 입북 부대원들을 대상으로 개별 심사가 있었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던 상이 병사들과 고령의 병사들, 그리고 무능하다고 판정된 병사들 상당수가 중국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남은 병력 중 3,000명으로 북한군 4사단 18 연대가 편성되고 남은 병력 1,000명은 독립 대대로 편성되어서 105 전차 여단의 83 기계화 연대[모터사이클 부대]에 편입되었다. 조선족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두 연대는 서울 침공의 최선봉에 서게 된다.
4 사단장은 모택동 군에서 사단장을 지냈던 이권무였다. 나중에 숙청된 무정(武亭), 북한 1 군단장, 김웅[金 雄]과 같이 모택동 군의 조선인 간부 선두 주자였다.
105전차 여단장은 빨치산 최현의 졸개로 빨치산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김일성의 심복이 된 유경수였다. 재편성한 부대에게 병사들이 중국에서 사용했던 일제 99식 소총이 다시 지급되었었다. 이 소총들은 따로 운송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까지 부대를 인솔하고 왔던 장교덕이 대좌 계급을 받고 연대장이 되었고 만주국 경찰 경위 출신 송덕만이 참모장이 되었다. [송덕만은 전후 남포에 주둔하게 된 4사단장이 되었으나 여자 문제로 트집을 잡혀 숙청되었다.] 중국 해방군에서부터 패장[소대장]이었던 박 선생은 소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북한군 4사단 18연대가 된 조선족 부대는 대동강 남쪽 황해도 송림 제철소로 이동해서 주둔했다. 조선족 부대인 18연대는 북한 땅에 들어와서도 북한군의 조선족 부대중에 최강 연대라는 명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북한군 민족 보위상 최용건이 공식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연대원들이 북한군의 체제와 대우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자 북한군 고위층에서 이 부대를 해체해 버리고 부대원들은 다른 부대로 분산 배치해버리자는 의견이 나왔었는데 민족 보위상 최용건은 ‘남조선 해방’을 위해서 그 최강 부대 전투력 보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18연대를 직접 찾아와 전쟁이 곧 발발할 것을 암시하며 말썽부리지 말고 그때가서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하라는 격려까지 해주었다.
18연대는 그들보다 나이도 서 너 살 어리고 전투 경력도 없는 북한 징집병들을 조선군이라고 경멸하며 적대했었는데 이현상은 사단장이나 연대장급의 고위층에도 퍼져있어 김일성계나 소련계들과의 알력이 심했다. 이런 알력은 전후 모두 중국계[연안파]가 숙청당하게 된 말미를 제공하게 된다.
송림 제철소에 주둔하고 있던 4시딘 18연대는 침공 열흘 전에 38선으로 이동해서 동두천 38선 북쪽에 전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엄청난 포병 화력의 발사와 동시 작전명 '폭풍'의 남한 침공 적전이 개시되었다. 38선 돌파의 선봉는 105전차 여단의 전차와 모터 사이클 부대가 선도했으나 의정부 북쪽 교외에서 진격에 제동이 걸렸다. 국군의 수도사단과 2사단이 증파되었기 때문이다.
[점령후 의정부로 들어오는 105 전차여단]
모터 사이클 연대의 진격이 막히자 후속하던 18연대가 선두로 나서서 의정부 전선을 돌파하였다.의정부 전선을 돌파한 18연대는 그 기세로 국군이 서울 최후 전선으로서 구축한 미아리 전선까지 밀어 부쳤다. 18연대의 맹렬한 공격에 막심한 피해를 입은 미아리 방어선도 그대로 뚫리고 말았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