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 엔진을 통해 본 냉전시대 [ 6 ] 무기냐 과학이냐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현대 로켓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오베르트(Hermann Oberth)나 도른베르거(Walter Dornberger)도 그랬지만 소련 로켓의 아버지인 코롤레프도 처음부터 미사일이라는 무기를 목적으로 해서 로켓을 연구하였던 사람은 아니었다. 초기 로켓과학자들 대부분은 우주를 탐사하는 인공위성의 발사체로 로켓을 연구하였던 사람들이었다.
[ 우주개척사의 거성들인 폰 브라운, 오베르트, 도른베르거 ]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이 분야는 특히 엄청난 자금 지원이 필요한 분야여서 과학자들의 순수한 동기와 열정만으로 연구를 계속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V2의 경우나 ICBM처럼 역설적으로 로켓을 무기화하려는 국가적인 지원이 있을 때나 개발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돈을 대는 정책 당국은 당장의 성과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우주 개발에 대해서 당연히 관심 밖이었다.
[ 페네뮌데에서 실험 중인 A-4(V2) 로켓 ]
특히 냉전 초기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을 최대한 멀리서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로서만 로켓을 고려하고 있었고 과학자들에게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로켓을 개발하도록 지원하였던 것이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이러한 냉엄한 현실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무기 개발에 우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순수한 열정을 지녔던 그들이 우주개발에 대한 꿈까지 버렸던 것은 아니었다.
[ 1930년대 초반 독일우주여행협회에서 로켓 실험 중인 폰 브라운 ]
코롤레프도 그런 과학자들 중 하나였다. 비록 당국의 명령으로 미사일을 개발하고는 있었지만 그 또한 자기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R-7 로켓을 이용하면 꿈에 그리던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였다. 때문에 서방이 소련의 ICBM 보유를 인정하지 않아 약이 올라있는 소련의 권력층을 잘만 설득하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소련의 우주 개발을 선도하였던 코롤레프, 쿠차토프, 케르디쉬 ]
결국 흐루시초프는 코롤레프의 의견대로 인공위성을 쏘아보라고 승낙을 하였는데 최근 밝혀진 이야기에 따르면 흐루시초프는 인공위성이라는 물건 자체의 가치를 제대로 몰라 막상 효과에 대해서는 그리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흐루시초프의 이런 결심은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새로운 경쟁 즉, 국력을 올인하여 무한정 달려간 인류사의 거대한 진보였던 문 레이스(Moon Race)의 시작이 된다.
[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는 스페이스 레이스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
1957년 10월 5일, 코롤레프는 R-7을 인공위성 발사체 용도로 개량한 R-7A 로켓에 무선송신장치를 장비한 80kg의 조그만 실험용 위성인 스푸트니크(Sputnik) 1호를 탑재하여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소련은 인류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비록 ICBM의 성능을 과시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코롤레프는 소련 당국을 설득하여 어려서부터 그가 꾸어왔던 꿈을 실현하였던 것이었다.
[ 인류 역사에 새로운 길을 개척한 스푸트니크 1호 ]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 성공은 이를 앞장서서 주도한 코롤레프는 물론 인공위성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소련 당국도 상상하지 못한 대변혁을 역사에 몰고 왔다. 그리고 코롤레프의 예측대로 서방은 인공위성이라는 과학적 성과보다 소련이 진짜로 ICBM을 먼저 가졌다는 사실에 놀라 순식간 공포에 빠지게 되었다. ( 계속 )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