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 해상 교전
"제1연평해전'
2015년 6월 15일은 제1연평해전 14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제1연평해전은 서해 NLL을 침범했던 북한군과 맞서 우리 해군이 대승을 거둔 사건으로 서해 수호 역사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 해군이 북한과의 해상 전투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호전적인 북한의 도발
사건은 1999년 6월 7일, 북한 경비정 3~7척이 연평도 해상에서 북측 어선 보호 명목으로 북방한계선을 3~9km 가량 침범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몇 시간씩 한국 영해에 머물며 우리 측 반응을 살피는 북한 경비정에 대응해 우리 해군은 교전규칙과 국제법에 의거, 고속정을 출동시키고 퇴거 조치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해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우리 고속정에 대해 충돌 작전을 벌이며 도발했습니다.
우리 해군의 ‘밀어내기 작전’ 돌입
며칠 뒤인 6월 11일, 북한 경비정 4척이 3시 36분부터 13시 40분까지 북방한계선 남쪽 13.9km까지 침범하곤 대한민국 고속정을 향해 충돌을 시도했습니다. 우리 해군은 이에 대응해 ‘함미 충돌에 의한 밀어내기 작전’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북한 경비정 또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북방한계선을 계속 침범하면서 우리 고속정과 충돌하려했고, 우리 고속정은 빠른 기동력으로 충돌을 회피하는 한편, 다른 고속정들과 포위 기동으로 북측 경비정에 대응했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 해군의 고속정 4척이 경미한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 경비정 2척을 대파하고 2척을 손상시키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제1연평해전의 발발
그러나 북한의 도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6월 15일 8시 55분, 7척의 북한 경비정은 또다시 북방한계선을 침범했습니다. 북한은 다시 충돌 작전을 실시했고, 우리 고속정 역시 ‘함미 충돌에 의한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였습니다. 남북이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다 9시 28분 돌연 북한이 선제 사격을 가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이 선제 공격함에 따라 우리 고속정도 즉각 대응사격을 하였고, 9시 42분까지 총 14분간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북한은 어뢰정 1척 격침, 어뢰정 1척과 경비정 4척이 대파했으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 해군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북한 해군에게 침몰 함정의 인명구조와 피해 함정 예인을 유도하도록 하기 위해 사격을 중단했습니다. 또한 우리 함정의 안전을 확보하고 확전을 방지하기 위해 경비함정들을 남하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우리 해군의 피해는 고속정 5척의 경미한 손상과 9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는 등의 피해를 입는데 그쳤습니다. 제1연평해전은 북한 해군의 선제 기습사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적을 완전하게 제압해 해군의 전투력과 자신감을 확고히 다질 수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당시 남북한 민간교류 확대와 대북 지원정책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북한의 호전적인 성향과 ‘한반도 적화통일’이라는 대남 기본 노선에 변화가 없음을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영역를 넓히고자 북방한계선을 폐기하려던 북한의 꾸준한 도발에 대해 우리 해군은 교전규칙에 따라 침착하게 대응, 북측을 격퇴시킴으로써 우리 군사력의 질적 우위를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제1연평해전은 6.25 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간 해상 교전에서 우리 해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는 것에 가장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오전에 열린 ‘제1연평해전 승리 16주년 기념행사’에서 정호섭 해군참모총장은 “제1연평해전은 철저한 준비와 지휘부의 단호한 결단, 그리고 현장 부대의 용맹함이 만들어낸 쾌거였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또 해군 각급 부대에서는 기념식을 열고 ‘조국의 바다와 NLL은 우리가 사수한다’, ‘적의 도발 장소가 적의 무덤이 되도록 현장에서 격멸한다’ 등의 결의문을 낭독하며 전의를 다지기도 했습니다.제1연평해전 이후 16년, 지금 이 시간에도 NLL 철벽 수호는 계속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