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시리즈 -1]
北 소대장이 겪은 오산 죽미령 전투 -4-
남한 침공 계획은 북한군 작전 국장 유성철 중장이 입안했지만 소련군이 그 미숙한 문제점들을 지적하자 무색해진 북한군이 의뢰해서 소련 고문단이 작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련군 고문단장 출신 라주바에프 장군의 보고서에 의하면 중부의 북한군은 홍천을 점령하고 서울 점령 북한군은 수원으로 진격해서 점령한 뒤에 두 부대를 모터 사이클 부대로 ‘연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큰 포위망을 형성하려면 양익 포위 부대 외에도 적어도 1-2개의 추가 사단이 더 필요하다. 서울 북방에 전개되었던 너 덧 개의 국군 사단들이 아무리 상처를 입었다해도 병력을 집중해서 포위망 돌파를 시도한다면 이런 허약한 포위망은 간단히 뚫릴 것이라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전사적으로 이의 의미는 중요하기에 여기에 대해서 자세한 분석 글을 보고자 한다.]
그런 가능성 적은 양익포위의 군사적 이유보다도 북한군의 서울 지연 체류는 정치적인 이유가 짙었었다. 즉 박 선생과 그의 상관들, 그리고 범위를 넓혀보면 위로는 김일성과 그의 측근들까지도 ‘영용(英勇)하신 수령님’이 지휘하는 조선 인민군이 밀고 내려왔다는 복음(福音)만 들리면 남한 인민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리라는 망상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었었다는 가설이 이런 지연을 빚었다는 말이다.
이 망상은 월북한 뒤에 할 일없이 북의 김일성에게 식객 노릇을 하며 세력을 잃어가던 남로당 당수 박헌영이 그에게 주입했었다. 박헌영이 이런 망상을 확신할만한 정치적 자산들이 있었다.1946년 10월 대구 폭동이 있었고 이어서 48년 제주 4.3 폭동이 있었고 또 48년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이 있었다. 모두 남한 정부를 폭력으로서 타도하려는 목표로 발생했었다.
반란 사건 때마다 주모자들은 김 일성이 영도하는 북한군이 남침하고 있다는 허위 정보를 내세워서 폭동을 충동질했었다. 이 폭동의 사건들 뒤에 군경의 수배로 지하로 들어갔지만 남로당의 음모가 큰 역할을 했었다. 남로당은 20만 당원과 30여개의 부속 조직들이 있었다.이런 남로당의 조직과 투쟁 자산은 박 헌영이 김 일성에게 설득의 카드로 내밀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상황은 빠르게 좌익들에게 안 좋은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폭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남로당의 조직들은 이런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남한 경찰들에게 토벌 당하면서 소멸되어갔다. 50년도에 마지막으로 남로당의 핵심인 김상룡, 이주하가 체포 된 뒤에 대규모로 군중이나 폭동의 조직을 동원할 수있는 모든 남로당의 조직 역량은 깨끗이 사라졌다.
더구나 북한의 김일성 통치에 진절머리가 나서 북한을 탈출한 월남자들이 김일성의 진면목에 대해서 남한 국민들에게 그 실상을 모두 알려주어 남한에서 그와 북한 정권, 나아가 공산주의의 인기도 대폭 추락한 상태였다.
이에 더해서 공산 폭동에 연루된 자들에 대한 남한 정부의 가차없는 엄벌 시행도 김일성 군대가 서울을 점령했다고 해서 즉각 떼를 지어 쏟아져 나와 시위를 하거나 선뜻 폭동을 일으킬만한 분위기를 말살하여 진짜 좌익들도 북한군이 직접 자기 지역에 들어오기까지 슬슬 눈치만 보고 있었다.
민족상잔의 6.25 전쟁은 잔인한 김일성과 교활한
박헌영 두 공동정범이 일으켰다.
교활한 박헌영은 남로당이 사멸해가고 있는 남한의 급변 정세를 김일성에게 가능한 한 숨겼을 것이다. 단지 상황이 점점 엄중해지니 빨리 남침을 서둘려야 한다고 재촉은 했을 것이다.[김일성이 중.소의 두 상전들에게 시간이 없다며 남침을 마구 졸랐다는 기록이 있다.]
스탈린과 모택동 상전들은 두 악당들이 찾아와서 침이 마르게 과장했던 남한의 허약성에 속아 넘어갔다. 그래서 완전히 속아 넘어간 두 인간들은 김일성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 인민들의 대대적인 봉기가 있을 것이고 남한은 그저 앉아서 줏을 수 있는 횡재물로만 생각하고 침공을 재가 했다는 이야기다.
앞서 박 선생이 일본제 99식 소총을 서울 침공까지 들고 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4사단 18연대뿐만 아니라 중부 전선의 조선족 부대인 북한군 7사단도 모두 99식 소총을 들고 왔었다. [이렇다면 동해안 쪽에서 침공한 북한군 조선족 5사단이나 서해안 쪽 침공의 조선족 6사단도 99식을 썼을 것이다.] 단, 소대장급 이상에는 38선을 넘기 전부터 따발총과 떼떼 권총이 지급되었었고 편제 공용화기로 소련제 경기관총 DP 41과 소련제 맥심들이 있었다.
소련제 모신 나강 소총
99식 소총은 일본 관동군이 항복하면서 소련군이 압수한 것이었다. 이 수십만 정의 일제 무기가 만주 점령에 앞장섰던 모택동 군에 지급되었는데 실탄도 일본군이 생산하고 보유했던 것이다. 기대했던 남한 인민들의 봉기도 일어나지 않고 생각지도 않게 UN이 북한을 침략자로 규탄하고 미군이 참전하니 박헌영 말만 믿었던 김일성은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소련 고문단을 통해서 모스크바 상전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방향을 물어보자 크레믈린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서둘러서 남한 전역을 다 점령하라는 무리한 명령이 내렸다고 한다. 이 회신을 얻는데도 며칠의 시간이 걸렸었다.
전투가 길어질 것이 확실해지자 일본군이 남겨준 실탄을 사용해야 하는 99식은 군수 보급상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련으로부터 안정적인 탄약의 공급이 가능한 모신 나강으로 소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첫 한강 도강 작전의 임무는 105전차 사단 모터 사이클 연대에 떨어졌다.그러나 105 전차 사단은 국군의 저항으로 이 도강 작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한강 도강 임무는 다시 변경되어 4사단 18연대에 떨어졌다. 공격 명령을 받은 박 선생 부대는 사전 정찰을 통해 국군의 남한 방어선을 면밀 정탐하고 그 날 밤에 척후 향도 소대가 쪽배를 타고 노량진 쪽에서 도강 교두보 확보에 성공하였다.그 다음 날인 7월 2일 오후 4시, 365문의 포사격 지원을 받은 4사단은 영등포 여의도 쪽에서 도강하고 이어서 철교를 통과한 T-34 전차 부대와 영등포를 협동 공격하여 이를 확보하였다.
한강 철교로 도강하는 T-34
- 부역자가 된 역무원과 북한군의 얼룩 무늬 옷이 눈에 띈다.
당시 한강 남안의 국군은 서쪽으로부터 한강 하구를 건너온 북한군 6사단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한강 남쪽에는 동해안 쪽의 8사단과 중부의 6사단을 제외한 국군의 모든 사단의 부대들이 몰려있었다.
그러나 서울 북방 전투에서 인원 피해를 극심하게 입은데다가 한강교 폭파로 1천대가 넘는 전투 물자를 강북에 포기하고 도강한 국군은 싸울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일례로서 동두천 방면에서 적 주력을 막아냈던 7사단은 최대로 참혹한 피해를 입어서 단 4문의 기관총으로만 무장한 1,200명의 병력이었다. 비교적 잘 싸운 1사단도 모든 장비를 버리고 몸만 빠져 나온 5,000명의 병력뿐이었다. 이 전황에 한강 하구로 전차까지 도강시켜 측면 공격해오는 6사단의 공격에 국군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4사단 18연대가 영등포 여의도 방면으로 도강 작전을 하면서 맞붙은 국군 부대는 한강 이북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와해 상태로서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었던 수도 경비 사령부[직후에 수도사단으로 개칭함] 소속 8연대였다. 연대장 서종철 중령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고 선임 대대장 정승화 소령이 대대 병력으로 줄어든 연대를 이끌고 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8연대는 압도적으로 덤비는 북 18연대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수도 사단의 다른 연대인 18연대는 영등포 서쪽에서 북 6사단을 상대로 하는 힘겨운 전투를 하면서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정승화 부대는 대대 병력으로 축소된 부대가 되어 할 수없이 역시 대폭 감소한 국군 18연대의 3 대대로 편입하였다.
3사단 백골 연대 마크
그 후 낙동강 전투를 하면서 재창설 된 연대에 8연대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현재 7사단의 상승 연대가 된다. 국군 18연대는 그 소속을 다시 3사단으로 옮겨 많은 전공을 세웠다 오늘날 6사단 7연대와 같이 국군 최강 연대 타이틀을 다투는 진(眞)백골 부대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니까 국군의 최강 연대와 북한군의 최강 연대인 양 18연대가 한강에서 격돌했다는 이야기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