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 시리즈 -1
北 소대장이 겪은 오산 죽미령 전투 -5-
18연대가 도강한 다음 105 전차 연대가 한강 철교를 타고 넘어와 영등포 공격에 합세하였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국군은 영등포를 버리고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박 선생 부대는 영등포를 점령하고 계속 전진 이틀 만에 안양을 통과해서 수원에 도착했다. 국방 전사에는 영등포 수원 구간에서 국군의 저항이 있어서 수원 북문에서 국군이 설치한 지뢰에 북 T-34 전차 두 대가 나가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박 선생은 이 구간에서 자기 부대는 비교적 별 전투없이 통과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7월 5일 북한군 부대는 수원을 뒤로하고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이곳까지는 소련제 트럭을 이용한 차량 행군이었다. 부대는 이미 전방 정찰로 적이 오산 북방에 방어선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북한군이 미군과 전투를 치루고 나서야 오산 방어 부대가 미군임을 알게 되었다는 설이 우세하나 박 선생은 전투 개시 전 이미 전방의 적이 미군임을 알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미군의 출현에 북한군의 지휘부는 물론 박 선생도 크게 긴장했다. 그러나 주저할 수가 없었다. 7월 5일 아침 식사 후 보병 부대보다 먼저 105 전차 여단-이 때는 서울 점령의 공로로 105 전차 사단으로 명칭이 승격 변경되었었다.- 소속 107연대 T-34 전차들이 앞서서 디젤 연기를 뿌리며 국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병들이 행군 개시하기 몇 시간이나 앞선 전차대 단독으로의 돌진이었다.
남침하는 T-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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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설명을 해본다.
전차들이 진격할 때는 먼저 차량이나 장갑차에 승차한 수색대가 먼저 전방에 파견되고 이어서 전차가 진격한다. 그 뒤를 기계화 보병과 포병이 속행한다. 이런 보전포의 합동 공격이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교리화되어 있는데 이날 105 전차 사단장 유경수가 보인 전차 단독 돌격은 조금 이색적이다. 여기에 배경이 있었다.
유경수는 원래 산골 소년으로 배움도 별로 없었다가 직업도 없었다. 그러다가 은행 강도 출신이며 무식한 최 현[본명 최 득권 -인민 무력부장까지 되었으나 끝내 그 쉬운 한글도 깨우치지 못한 돌머리였다.]의 빨치산 부대에 합류했었다. 최현 부대는 김 일성 부대와는 다른 독립 부대 였는데 나이가 열 살이나 연상인데도 여러 가지로 역량이 부족했던 최현은 김 일성의 부대에 편입했었다 그는 현재 북한 김정은이 신임하는 일등 졸개 최용해의 아버지다.
원 안이 유경수다 그 오른쪽 뾰족한 턱을 한 사람은 김 일성의 당번병 출신 오진우다.
유경수 보다 두 살 아래인 오진우는 인민 무력부장을 오래 했고 천수를 다했다.
유경수는 빨치산 생활을 하면서 김일성의 신임을 얻고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총도 잘 쏘고 용감하기는 했으나 유경수는 전차같은 첨단 무기의 운용 교리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랬던 그는 김일성의 배려로 전차 여단장이 되어 38선을 돌파 작전을 지휘했었다. 처음에는 전차와 보병과 포병과 연합하여 진격해왔으나 그들은 곧 대전차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미숙한 국군들이 멀리서라도 전차만 보이면 전차 공포증이 발동하여 그대로 붕괴되어 분산 도주하는 현상이 있슴을 알아차렸다.
국군이 보유한 2,36인치 로케트 포나 57mm 대전차 포들이 적 전차 파괴에 아무 쓸모없음을 알게 된 것도 전차 공포증의 한 원인이리라 생각된다.
국군이 북 전차들에게 사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57mm 포
유 경수와 참모들은 국군의 전면에 전차부터 돌격시키고 보병들은 뒤를 따르는 전술을 변경하여 큰 재미를 보았다.
그 한 사례가 1950년 6월 28일 의정부에서 출발하여 광릉 국립 수목원을 통과해서 서울 잠입에 성공한 보병 승차 전차 두 대에 기겁을 한 국군이 시가전 한 번 없이 서울을 포기하고 철수한 상황일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105 전차 여단장 유 경수는 이날 보병들 보다 앞서서 전차들을 출발시켰던 것이다. 유경수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전차 돌격 전술은 7월 18일 대전 공격 때도 발휘되었는데 30량이 대전 시내에 난입하여 마구 휘젓고 다녀 미군을 흔들어대는 공포감을 조성하기는 성공하였으나 이중 15-20량이 파괴되었다. 그의 대량의 전차 단독 투입 전술은 다부동 야간 공격 때도 발휘되었으나 완전 대패하고 전차만 13량이 파괴되었다. 유경수는 이후 전차만으로 돌격하는 우직한 전술을 포기하였다.전차 손실이 너무 많아 할래야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천 상륙 작전 후 유경수는 전차를 타고 북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조치원에서 길이 막히자 전차를 버리고 산을 타고서 북으로 도주했다.그는 1958년 11월 9일,동해안 방면의 북한군 1 집단군 사령관으로 재직시 칼빈 소총을 들고 사냥을 나갔다가 찝차 뒷 좌석에 있던 부관의 칼빈 오발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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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로 전차 중대가 출발하였으나 오산 북방의 적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어서 전차 연대의 주력이 출발하였다. 그래도 전방의 미군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서울 북방의 국군들이라면 막강한 전차들이 자신들의 전선을 저렇게 관통당한 상황이 생긴다면 벌써 다 도망쳤을 것이다.
박 선생은 서울 북방의 전투 경험으로 국군의 전투력는 낮게 보았으나 미군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차 돌격에도 겁을 먹지 않고 저렇게 버티고 있다면 과연 세계 최강국 군대답게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것 같기도 했고 뭔가 숨겨둔 가공할 신무기가 등장할 것 같기도 하였다.드디어 보병들에게 죽미령 고지 점령의 공격 명령이 내렸다.
“전차로 밀어도 미군들이 꼼짝도 안하는 거야 ! 그래 우리가 올라갔지!“
18 연대는 고지를 향하며 돌격해 올라갔다. 18연대는 3개 대대였는데 2대대가 예비로 남고 1대대와 3대대의 2개 대대가 죽미령 양 쪽에서 공격해갔다. 그의 부대는 사격을 하면서 미군 방어선을 육박하였고 우측[서쪽]에 붙은 중대 하나가 더 큰 원을 그리며 미군의 배후로 침투하려고 하자 미군 방어선에 혼란함이 보이더니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박 선생 소대는 이 기회를 잡아 공격의 속도를 높여서 빠르게 돌격을 했다. 능선에 올라가 보니 미군은 다 도망치고 없었다. 전리품을 다량 획득했고 부근을 수색해서 아직도 도망가지 못한 미군 포로들도 여러 명을 붙잡았다. 특히 귀중한 전투 자산인 트럭을 수십 대를 노획해서 그 후에 긴요하게 사용했다고 말을 한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