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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특집 시리즈-3] 6.25 남침- 국군이 그렇게 무력했었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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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특집 시리즈 -3]

6.25 남침- 국군이 그렇게 무력했었나? -5-



이승만 박사가 행정형인 그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한 것은 그가 미군을 상대로 훌륭한 정치력을 발휘하리라고 기대했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 외교는 귀신, 인사는 등신”이라는 그를 향한 악평에 한 기여를 했을 뿐이었다.


남침이 본격화되자 채총장은 육본이 아니라 의정부 전선에 거의 상주하며 대대장처럼 전투를 지휘했다. 채총장은 그저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적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남발했고 불가능했던 반격까지도 강요했다 .


[의정부 전선에서 장병들을 독려하는 채총장]


그는 이곳에서 빨리 철수하여 한강선에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이범석, 김석원, 김홍일 등 원로의 조언이나 이형근 2사단장이나 유재홍 7사단장등 부하 지휘관들의 강력한 건의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었다.


[다정다감하고 선량한 인물이었으나 국방장관직은 그에게 맞지 않은 직책이었다.]


그런 비현실감속에서 지휘를 하는 채총장을 콘트롤 할 사람은 신성모 국방장관 밖에 없었으나 군 경력이 없었던 신장관에게 그럴 능력은 없었다. 그는 오히려 채총장의 생고집을 두둔하고 나왔다. 국가 최악의 위기 순간에 국군은 최악의 전쟁 아마추어들에게 이끌려 붕괴를 향하여 달려 가고 있었다.


채총장이 의정부 전선에 꼭 내렸어야 했던 판단은 적 공격력의 강함을 알고 아군의 약함을 정확히 아는 것이었다. 손자의 명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知彼知己면 百戰百勝]’였다. 


그때 그가 만약 전술 전략을 조금이라도 알았었다면 적의 기습에 대한 정통적인 대응 전략을 실행했을 것이다.기습당한 부대는 일단 질서있는 철수를 하면서 적이 가진 기습 효과의 우위성을 소멸시키고 부대 전력을 보존하다가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 전술 전략의 전통적인 원칙이다. 


채총장은 적을 지연시키면서 축차적인 철수를 해서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쳤어야 했는데 결국 그의 철수 거부로 반대로 나중에 크게 비난 받은 증원 병력의 축차적인 투입이라는 결과를 가져와서 상황을 극도로 나쁘게 만들었다. 그가 내릴 판단의 중심에는 북한의 전차대를 저지할 아군의 수단이 거의 없다는 절실한 인식이 있어야 했었다. 


남하하는 북한군 전차대


이승만 대통령은 적의 전차대가 남하하고 있다는 첫 보고에 “ 당해낼 수가 없을텐데--”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군인인 채총장은 수단이 없음에도 적 전차를 육탄 공격하라고 명령했었다. 


그가 명령하기 전 이미 동두천 전선에서부터 국군의 특공병들이 적 전차에 뛰어들어 산화하고 있었다. 그런 숭고한 희생들에도 불구하고 적 전차대는 의정부 돌입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황은 육탄 돌격으로 전차 두어 대 부서졌다고 되돌릴 수 없을만큼 나빠져 있었다. 육탄 돌격 그 이상의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었다.


적시에 철수를 하지 않았던 것은 국군이 축차적으로 소멸되었던 큰 이유가 되었다. 채총장은 서울을 내놓고 철수를 할 경우 자기에 대한 엄중한 책임 추궁이나 명예의 실추가 두려웠을 것이었고 이렇게 시간을 끌고 버티면 미군의 지원이 금방 올 것이라는 오판으로 비현실적인 고집을 계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시각각 전황이 불리해지며 병사들의 전사가 속출하는데 그런 판단은 내려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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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철수 결정의 골든 타임을 놓친 사연은 안타깝게 한다. 중국군 사단장을 역임했었고 전투 경험도 풍부한 김홍일 장군은 이때 한직(閑職)에 있어서 전선을 다니며 작전 지도와 격려를 하고 있었다. 김홍일 장군은 한국군 중 사단 규모의 작전을 해본 전략적 식견이 있는 유일한 분이었다.


이 분은 이미 한강 이북 방어는 불가능하고 병력들을 철수하여 한강 이남에 새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었고 1차 철수 부대로서 적당한 부대는 서부 전선의 1사단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1사단은 피해가 적은 부대였었고 1사단의 방어 종심은 서울의 중심부로부터 비교적 길어서 철수의 여유가 있었다. 


김홍일 장군은 1사단을 방문하여 백선엽 사단장과 철수에 합의하고 육본으로 돌아와 채 총장에게 1사단 철수 명령을 강권했다. 그러나 채총장은 우물쭈물 하면서 이의 재가를 피했다


[김홍일 장군]


격분한 김홍일 장군이 전화기를 들어서 시급한 통보를 권해도 채총장은 끝내 이를 회피하였다. 김장군의 확신에 찬 말만 믿고 철수 명령을 기다리던 백선엽 사단장은 대신 서울이 점령당하여 철수로가 막혀 버렸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들었다.


1 사단은 서울 북방 사단 중에서 제일 잘 싸웠었고 사단의 전투력을 그대로 온존했었던 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모든 장비를 버리고 맨 몸으로 한강을 헤엄쳐 철수하여야 했다. 포(砲) 나 차량 같은 중장비를 모두 버린 1사단이 도강 철수 후에 인원 점검을 해보니 사단 병력의 절반인 단 5,000명만 잔존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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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이 악화 되고 있을 때 정말로 아쉬운 또 하나의 인재[人災]가 발생했었다. 채총장의 육군 본부가 범한 최대의 실수중 하나는 철수로의 급소였었고 군수 보급의 요지였었던 한강교를 조기 폭발하게 한 것이었다.


[폭파 된 한강교.  500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차량들이 파괴되었다.]


육본은 급소중의 급소인 한강교를 전혀 관리하지 않았었고 또 폭파의 시기조차 직접 통제하지 못해 큰 비극을 가져왔었다. 한강교 조기 폭파는 사실 한강 이북의 국군이 붕괴시켜버린 실질적인 원인 제공을 한 자살골이었다. 그 폭파는 북한군에게 서울 공략에 일개 군단의 병력을 추가로 투입했을 때에나 거두었을 큰 전과를 안겨주었었다.


적절한 시기의 철수 명령과 한강교의 철저한 통제만 있었다면 서울 이북의 국군 사단 대부분은 한강 인원과 장비를 한강 남안으로 온전히 철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강을 넘을 수 없었던 무기 중에 절대 중요한 105mm 곡사포와 박격포의 부재는 국군의 실질 전투력을 빼앗아 가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북한군은 1950년 7월 1일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고 단 반나절만에 한강을 도강해 버렸다. 포를 잃어버린 것이 결정적인 도강 격퇴의 실패 원인이었다. 무기만 제대로 수습해서 철수했더라도 북한군의 도강은 물론 남하도 어느 정도 지연시켰을 것이다.


여기서 한 일화를 소개한다. 


전황이 암울했었던 남침 초기 맥아더는 벌써 인천 상륙 작전을 구상하고 이를 추진했었다. 그러나 미 합참과 국방성은 인천을 상륙 지점으로 정하는 것에 크게 반대했고 갈등이 계속되던 중에 맥아더와 반대파의 담판 회동이 있었다. 이때 맥아더의 명설득이 주효해서 워싱턴의 반대자들은 더 이상의 이론을 제시하지 못했었다. 


그때 맥아더가 주장했었던 인천 상륙의 큰 이유로 서울을 점령해야 한다는 사실이 있었다. 낙동강에 전개한 북한군에게 오는 보급품의 물류 시스템은 모두 서울을 통과하기 때문에 이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보급이 완전 차단된 적은 대개 항복하기 마련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맥아더가 말하는 서울 통과의 적 보급로 핵심에는 한강에 걸린 한 개의 인도교와 복선인 두 개의 철교등, 세 개의 교량이 있었다. 


6.월 30일 B-29 폭격대의 한강교 폭격


어떻게 보면 상식일수도 있는 요지 중의 요지인 한강의 교량들에 미 고문단이나 육본은 왜 미처 눈을 돌리지를 못했던가? 남침과 동시 최소 일개 중대의 병력만이라도 배치하고 육본과는 비상 전화를 설치해서 이 급소 중의 급소를 관리했다면 심야의 조기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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