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과 인간 가족 -5 話]
노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봉사할 따름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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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전쟁의 참화와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고 있던 1965년, 경남 마산 근처 빈곤한 농촌에서 살던 한 젊은이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였다. 6주간의 배고픈 기본 훈련을 끝내고 고된 후반기 기관총 주특기 교육까지 이수한 이 젊은 이등병은 중부 전선의 6사단 7연대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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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부대를 자부하는 6사단 7연대 압록강 진격 기념식 날]
6사단 7연대는 6.25 전쟁 때 춘천 전투, 동락리 전투, 음성 전투, 낙동강 신령 전투들에서 대승을 했었고 평북 초산을 점령하고 압록강에 최초로 도착했었던 부대로서 초산 부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연대원들에게 국군 최강 연대라는 소속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있는 부대였다.
이곳 7연대 교육대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던 젊은이에게 인생의 전기가 되는 한 기회가 찾아왔다. 1군 하사관 학교에서 하사관 후보생들을 모집하고 있으니 지원할 사람은 빨리 지원하라는 명령이었다.
젊은이는 고민하였다.
다섯 남매의 맞이인 그의 집은 가난했었고 그의 어깨는 무거웠다. 가난때문에 대학을 갈 수가 없었던 그가 갈 수 있었던 사회의 순탄한 길은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그 무렵의 젊은이들도 가져보았을 야망이니 푸른 꿈이니 하는 열정의 명구(名句)들은 힘든 현실을 몸으로 겪고 있었던 그에게는 꿈같이 호사스런 소리들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고민하던 그는 훈련소를 거치면서 자신이 군대 생활에 괜찮게 적응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싹트고 있었다. 당시 힘들고 박봉으로 인기가 없었던 직업 군인의 길이었지만 그 길이 가슴에 크게 클로즈 업 되고 있는 것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직업 군인이 되면 최소한 굶을 염려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고민하던 그가 일생의 큰 결단을 내리게 만들었다.
“오갈데 없는 나에게 내민 이 국가의 손을 붙잡고 나의 숙명을 정면 돌파 해보자 !”
그는 1군 하사관 학교 선발 시험에 합격했고 다음해 1월 입교했다. 1군 하사관 학교는 사회인들은 잘 모르는 기관이었지만 창군 이래 다수의 인재들을 육성해낸 명문 군 교육 기관이었다. 이곳을 졸업하고 군의 각 부대에 배치되어 국군 지휘와 행정의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수많은 부사관 인재들이 남긴 공적이 이를 증명한다.
인간 개조소라는 별명으로 불린 1군 하사관 학교는 엄격한 교육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낙오자들에 대한 가차없는 체벌을 동반한 교육들이 후보생들을 인내의 극한까지 몰고 가며 밤낮없이 단련시켰었다. 식사 시간을 딱 3분만 주고 이 시간 내에 직각 식사로 식사를 끝내는 규칙도 있었다. 내무 생활 역시 군기가 센 교육 기관답게 잠시의 한 눈도 팔 여유를 주지 않았었다.
마산의 젊은이는 힘든 훈련을 무사히 다 마치고 1966년 5월 강인하게 단련된 육군 하사로 변신하여 1 군 하사관 학교를 수료하였다. 그리고 6사단 7연대로 보내진 그는 분대장으로 첫 보직을 시작하였다. 그때 6사단은 경기도 가평에 주둔하고 있었다. 6사단은 66년 9월 가을이 깃드는 강원도 철원으로 이동하였다. 따뜻한 남쪽 바다 마산의 젋은이는 철베리아라는 별명이 있는 추운 북쪽 철원에서 다부지게 인생을 개척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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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부 원사]
그는 이곳 철원 7연대에서 죽도록 노력하여 부사관 최고 직급인 주임 원사가 되었고 가정을 가졌으며 자식을 두었다. 이제 철원은 그가 떠날 수없는 고향이 되었고 최강 명문 7연대는 그가 일생을 보낸 집이 되었다. 1965년에 입대한 그는 7연대에서 33년을 보내고 1997년 퇴역 하였다.당시 직급은 7연대의 주임 원사였었다.
현재 72세의 그는 철원에서 살며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초산 전우회 회장인 그는 강가부 [姜嘉夫] 퇴역 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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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교민 초청으로 미국 방문을 했을 때]
이름이 너무 특이해서 사람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오랫동안 그를 기억한다고 한다. 나도 7연대 카페에 자주 나오는 강가부라는 ID를 보고 70년대 한국에서 어린이들에게 유명했던 아동 만화의 주인공 강가딘이라는 강아지를 연상했었다. 그러나 한자 이름을 보고 바로 일본식 작명임을 알아보았다. 출생지가 일본이 아닌가 물었더니 “맞습니다. 나고야에서 태어났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의 부모는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일본식 이름이 맞다는 것이었다.
강가부 씨가 태어나던 그 때는 창씨개명이 강요되던 때였었다.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받던 비인간적인 차별과 모욕이 자식들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쓸개를 씹는 기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지은 경우가 많았었다. 가부[嘉夫]라는 이름은 일본 발음으로 요시오라는 이름이다.
강가부 원사는 분대장 소대 선임하사를 거쳐 중대 행보관 직책에 이르기까지 일선 부대에 근무하며 20대를 다 보내고 29살에 상사가 되었다.30이 조금 넘어 1974년에 7연대 본부로 올라와 연대 인사과에서 참모 업무를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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