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명 충돌사 [ 3 ]
오리엔트의 몰락 (BC 31 악티움 해전)
* 동: 이집트 (패)
* 서: 로마 (승)
로마의 권력자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후계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암투가 발생했고, 최종적으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결국 내전을 막기 위해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와 로마제국의 서부를, 안토니우스가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분할 통치하기로 교통정리를 하면서 충돌을 피했다. 한편으로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안토니우스가 결혼을 하여 혈연관계를 맺는 등의 방법으로 양측은 화해의 노력 또한 아끼지 않았다.
[ 제2차 3두 정치 당시의 로마 분할도.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
그러나 하나의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결국 그들은 로마의 패권을 놓고 마지막 대결을 벌이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이혼 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여 옥타비아누스와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 후, 제국의 패권을 건 마지막 숙명의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이들이 자웅을 겨룬 곳이 그리스 북서부 안부라키아 만 앞의 악티움(Actium)이다.
[ 영화 속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
로마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내전이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를 대표한다면, 이집트와 연합하여 대항한 안토니우스는 오리엔트지역을 발판으로 했기에 동서양의 충돌이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해상 결전을 고집한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에 따르는데, 양 진영은 각각 500척 이상의 함선과 10만여 명의 병사를 동원했다. 이 전투는 옥타비아누스의 부장 아그리파가 바람의 방향을 계산한 전술로 기선을 제압하면서 승부가 갈렸다.
[ 이집트와 로마의 대결이었지만 악티움 해전은 내전의 성격이 크다 ]
이로써 수천 년 역사를 간직한 오리엔트의 마지막 왕국인 이집트는 종말을 고했다. 옥타비아누스의 1인 독제 체제가 성립된 로마에서는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에게 군사권과 통치권을 주고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의 칭호 아우구스투스를 부여했다. 생존해 있는 동안 내내 부인했지만 그는 사실상 로마의 초대황제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결국 로마의 전성기는 동서간의 대결을 승리로 이끌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서양문명을 구해내다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
* 동: 훈 (패)
* 서: 로마 (승)
동아시아 역사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사기(史記)’에 흉노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훈(Hun)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만일 흉노와 훈족이 동일하다는 가정이 옳다면, 한 무제 이후 50여 년에 걸쳐 한과 흉노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벌인 혈투는 세계 역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한에 밀린 훈족이 갑자기 나타난 곳은 게르만의 발원지인 코카서스였다.
[ 훈(흉노)족은 유라시아 역사를 크게 바꾼 동인이었다 ]
훈족의 압박으로 게르만은 로마 영내로 대이동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몰려든 게르만들은 이후 로마(서로마)를 시키면서 유럽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처럼 유럽 반대편에서 있었던 흉노와 한의 전쟁은 수백 년 후 유럽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동인(動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훈족 일부는 코카서스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쪽으로 이동을 계속하여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기도 하였다.
[ 아틸라는 현재의 프랑스 파리 인근까지 진격하였던 당대의 황제였다 ]
그 중 5세기 전반, 트란실바니아를 본거지로 동으로는 카스피 해에서 서로는 라인 강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아틸라(Atilla)가 이끄는 일파가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동로마를 위협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고 오늘날 프랑스인 갈리아까지 침입했는데, 700년 후 등장한 칭기즈칸의 몽골도 이곳까지는 진출해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동서양 충돌사에서 동양이 서양을 최대로 밀어붙였던 사건이었다.
[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패하여 로마를 정복에는 실패하였다 ]
이 거침없는 훈족의 진격으로부터 서양 세계를 지켜낸 이는 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Flavius Aetius)였다. 그는 451년 로마군과 게르만 제부족의 연합군을 이끌고 북프랑스의 카탈라우눔(Catalaunum) 평야에서 이들의 진격을 물리치면서 로마를 수호하였다. 이 전투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동서문명 충돌사에서 서양의 문명을 구해낸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