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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감동이야기 공모전]제2연평해전에서 멈춰버린 시계와 소말리아 아덴만의 꿈 (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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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평해전에서 멈춰버린 시계와 소말리아 아덴만의 꿈 


‘국군 감동 이야기 공모전’ 다섯 번째 이야기는 우수상 수상작 ‘제2연평해전에서 멈춰버린 시계와 소말리아 아덴만의 꿈’입니다.


글 박종균 (상사, 청해부대 17진)


* 수상자의 작품을 칼럼 형식에 맞도록 수정하였습니다. 


나는 IMF 경제위기로 인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해군 부사관에 입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입대 전 나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다. 내 이름을 걸고, 내 생각을 중심으로 날카로운 펜 끝으로 창작에 몰두하는 출판사 사장 겸 전업 작가였다. 물론 전업 작가라는 것이  시대적 상황과 여건에 비춰볼 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만 18년 6개월의 나이에 어느 누구의 지도나 도움 없이 장편소설 ‘프로젝트 천문도’라는 책을 출간했던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자부심과 자만심으로 가득 했었다. 

어쩔 수 없는 경제위기 상황으로 꿈을 접어야했지만, 언젠가는 전업 작가로서 출판계의 중심에서 경영과 창작생활을 함께 펼쳐보겠다는 것이 내 소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해군 부사관에 입대한 것이 내 인생 최대의 오판이었다는 사실을 불과 1년 만에 깨닫게 되었다. 




‘해군 전탐부사관’. 거대한 군함의 항해 및 해상작전 전문가, 다양한 전장 환경에 대한 전술교리를 숙지하고 지휘관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권고하고 보좌하는 역할. 막연하긴 했지만 해군 부사관에게 주어진 임무로서는 가장 화려한 프로필이 분명했다. 나는 그 점에 이끌려 전탐부사관이 되었다. 


하지만 매일 꿈과 상상 속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 군함 위의 해상작전 전문가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크나 큰 괴리감 속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해군 부사관 계약기간 4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함정근무를 시작한지 6개월 만에 문제 사병으로 낙인찍혀 쫓기다시피 육상 전출명령을 받았다. 육상근무를 하면서도 해군 전탐부사관의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 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문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해군본부 주관 진중문예창작 시, 수필, 소설분야 공모전’. 함정근무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침몰중인 상선 선원들을 구조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단편소설 ‘만월(滿月)’이라는 작품을 써 이 공모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의외의 결과가 발표됐다. 2000년 해군본부 진중문예창작 소설부문 최우수상 수상. 군인으로서 화려하진 않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담아낼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후 주변에서 나를 보는 시선은 180도 달라졌다. 칭찬과 격려가 끊이지 않았다. 내 속에서도 패러다임의 변화,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다. 


‘굳이 전업 작가를 선택하지 않더라도, 군인으로서 내 글을 쓸 수 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구나’ 


입대 이후 소극적이기만 했던 스스로에게서 긍정적인 요소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후부터는 전탐부사관의 임무에도 충실하게 임할 수 있었다. 소설 한 권을 두 시간 만에 읽어내던 능력을 임무에 활용한 것이다. 해상작전 전술교리나 교범을 소설책 읽듯 짧은 시간 안에 독파해 이해해나갔다. 

머릿속에서 해상작전 개념을 정립한 뒤 곧 실제에 활용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당시 진중문예창작상 수상을 계기로 친분을 쌓게 된 사령관님을 찾아가 당시 해군에서 전장 환경이 가장 까다롭다는 서해 지역, 2함대 함정근무를 강력히 요청 드렸다. 결국 나는 2함대의 함정으로 배속되었다. 이후에도 나는 문예창작능력과 해상 작전 전문가로서 자질을 인정받아 중사로 진급까지 했다. 그리고 2002년 3월, 2함대 고속정 참수리 365호정 전탐장이란 직책을 부여 받았다. 


2002년 6월 29일, 한·일 월드컵 4강전 한국과 터키와의 3,4위 결정전이 예정된 날이었다.  언론매체에서는 연일 대한민국의 월드컵 열기를 집중 조명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 연평도. 해군 고속정 전진기지에는 연평도 어선 조업통제 지원 차 출항을 준비하는 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참수리 357호정은 홋줄로 계류되어 있었다. 박동혁 수병은 내게 장난을 걸어왔다. 천안함 근무 시절, 붙임성이 좋았던 그를 나는 ‘대머리 독수리’라고 부르며 놀리곤 했다. 오늘 조업통제 이후 맛있는 것을 사달라며 그는 내게 환하게 웃었다. 잠시 후 고속정이 출항했다. 그 모습이 박동혁 수병을 본 내 마지막 기억이다. 


그 날의 연평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바다는 매끈하게 다져놓은 청동 거울같이 잔잔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차분한 하루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조업통제가 이루어지던 때, 북한 등산곶·육도 경비정이 어선들을 앞세워 NLL을 넘어왔다. 이와 함께 시작된 제2연평해전. 멀리서 치솟는 불꽃과 함께 몇 초 뒤 공기를 찢는 천둥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북한 경비정의 치밀하게 사전 계획된 함포 조준사격이었다. 통신망을 통해 편대장의 다급한 교전상황과 피해상황이 전해졌다. 


‘아군에 대한 북한함정의 피습, 참수리 357호정 기동 불가, 아군 인명 피해 다수 발생’ 


내 머릿속에는 여러 해상작전 지식들이 맴돌았다. 하지만 ‘해상작전 전문가’로서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그때 편대장의 전투 배치 지시와 기본 진형 유지 지시가 전달되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내 행동을 기다리는 많은 동료들의 시선과 마주쳤다. 조타실의 기관장, 조타장, 전탐병, 그리고 함교에서 전장상황을 파악하여 기동 권고를 기다리고 있는 정장과 부장이 있었다. 실전 해상전투 경험은 전무했지만, 일일이 전술교범을 펼쳐가며 적용 가능 여부를 하나하나 확인해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등산곶 경비정과 아군 고속정 교전이 시작된 장소와 적 함정의 기동과 주포 사거리 등 모든 자료들을 머릿속에서 계산해, 함교 고속정 정장에게 권고 침로와 각종 전투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참수리 365호정은 최대 속력으로 참혹한 교전 현장으로 내달렸다. 참수리 357호정 주변에서 살육을 자행하는 등산곶 경비정과 함포 교전 가능거리를 외쳤다. 


“등산곶 경비정거리 3000, 2000, 적정기동 고려 전포사격 가능토록 CPA1500으로 권고하겠음. 권고 침로 250도” 


변침과 동시에 참수리가 보유한 모든 포문이 일제히 등산곶 경비정을 향해 불을 뿜었다. 무수히 많은 포탄이 등산곶 경비정을 순식간에 화염 속으로 몰아넣었다. 

함포를 계속 쏘아대느라 장전된 포탄이 고갈되어 탄약 재장전이 필요했다. 잔잔한 바다 위에 ‘폭, 폭, 폭’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물줄기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등산곶 경비정과 함께 NLL을 침범한 육도 경비정의 조준된 함포탄이 수면에 착탄되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자 거짓말처럼 긴장감이나 두려움이 사라졌다. 내가 있는 조타실 주변은 최근 함정 수리기간에 방탄필름이 부착되었다. 그래서일까. (내 착각이었을 수 있지만) 북한 함정에서 쏘아대는 함포도 거뜬히 막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 새벽까지 함께 했던 전우들의 붉은 피를 목격했을 때 북한 함정에 백배, 천배 더한 응징을 하겠다는 생각밖에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함정 안이라 물러설 공간도 없었다. 아무리 방탄필름이 조타실을 감싸고 있다고는 하지만 다른 동료 전우들이 걱정되었다. 


일단 적 함포 사거리보다 우리 함포 사거리가 앞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 사격 거리에서 적 함정과 평행하게 기동하도록 권고했다. 만약 당시 내 생각이 전혀 달랐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북한 함정과 충돌 기동을 권고했다면? 나는, 또 동료 전우들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는 제2연평해전에 참전해 전투유공이라는 전과를 세웠지만, 내 인생은 그 순간 이후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버렸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날 내 인생은 마침표를 찍었다. 연평도 전진기지로 돌아왔을 때, 나는 정신적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2연평해전에서 스러진 전우가 그토록 살아가고 싶었던 오늘의 무게감을 느끼게 되었다. 오늘과 내일로 이어지는 하루하루의 시간에 대해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 의문을 갖지 말고 스스로 최선을 다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제2연평해전 이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개인과 부대 발전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했다. 해군 전탐부사관으로서 최고가 되려고 노력했다. 언제 세상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내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긍정적이고 밝게 생활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한동안 미뤄뒀던 대학 진학도 결정했다. 

교육사령부에서 근무할 때에도 나는 교육교재를 그대로 읽어주는 교관이 아닌 내 지식과 직접 느낀 경험들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머릿속으로 한 편의 영상을 보듯 강의를 준비했고 호응도 좋았다. 이제 나는 당당히 내 직업 만족한다고 외치게 되었다. 


내게 주어진 생명이 다하는 순간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만약 또다시 북한이 도발해온다면 가장 선두에서 싸울 것을 다짐한다.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게 지금 내가 존재하는 최소한의 소임이자,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대한민국 국군의 한 사람으로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해 머나 먼 소말리아 아덴만 해역에 와 있다. 대한민국 국적의 상선과 선원들을 보호하는 ‘자랑스러운 국가대표’ 청해부대 17진의 부대원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앞으로 나는 바다에 대한 내 경험과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대학교수가 되고자 한다. 


제2연평해전에서 멈춰버린 시계를 계기로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그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군복무에 임하고 학업에도 매진하였다. 덕분에 매학기 성적 우수장학생, 육군 부사관학교 주관 학록장학생 선발 등 영광스런 순간도 많이 가졌다. 그리고 얼마 전 ‘2015학년도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항해학과 석사과정’에 합격해 내 새로운 꿈에 한 단계 더 다가섰다. 


제2연평해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편대장이 지금은 소말리아해역 호송전대 전대장으로 근무하며 내게는 아낌없는 조언과 조력자 역할을 해주고 있다. 청해부대 17진, 대조영함 근무는 내가 가진 모든 역량과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이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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