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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피격 5주기] 가슴에 묻은 그대들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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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국민을 위한 

당신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2010년 3월 26일.. 

천청병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TV를 보고 또 보고...


무사 생환을 온 마음으로 기원하고... 


일면식도 없지만 

우리 장병들이 하나, 둘 태극기를 덮고 뭍으로 올라올 때마다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온 나라, 온 국민이 슬픔과 분노, 비탄에 빠졌던 그 날... 

그 날을 기억하십니까? 

 


3월 26일은 천안함 피격 5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천안함 용사 46명과 한주호 준위를 기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천안함 가족은 소원합니다.
"내 아들은 잊어도 좋지만, 천안함이 주는 교훈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2015년 올해는 정부가 주관하는마지막 추모 주기입니다. 

사이버 추모관 '100만 헌화(참배) 운동'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사이버 추모관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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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병영멘토링] 진로, 취업, 창업.. 우리 장병들의 고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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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청년위원회-한국경제신문이 함께하는

"찾아가는 병영멘토링"현장!



지난 3월 13일 금요일.

육군 제3사단(백골부대, 강원도 철원)에서 2015년 제1차 '찾아가는 병영멘토링' 이 개최되었습니다. 


'찾아가는 병영멘토링'은 멘토들이 우리 장병들을 직접 찾아가서 전역 후 진로에 대한 상담과 취업·창업 등에 대한 상담을 해주고 장병들의 꿈 찾기 및 일자리 지원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위해 준비된 행사입니다.


1차 병영멘토링을 시작으로 2015년 한 해 동안 총 6회에 걸쳐 실시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동고동락 지기가 이번 1차 멘토링 현장에 함께 따라갔습니다. 


서울 출발 후 달리고 달려 도착한 철원, 백골부대에서 우렁찬 군악대 연주가 멘토님들을 반겨주었습니다. 



사단 본부 건물로 들어가자,

백골 사단에 왔음을 한눈에 확인시켜주는 무시무시한 상징물이 있습니다. 뜨아아!!! 



6.25전쟁 당시 죽어서 백골이 되겠다는 각오로 최일선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백골부대의 정신과 전사자 명부를 볼 수 있었는데요. 그 희생정신에 저절로 숙연해졌습니다.  



드디어 오늘 멘토링이 진행될 3사단 22연대 2대대로 왔습니다. 생활관 전면에 걸린 문구들이 무시무시합니다. 

"멸북통일, 백골사단", "쳐부수자 북괴군"

이렇게 강하게 각오를 다지면서 국토 방위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겠죠? 



오늘 병영멘토링에 참여하게 될 병사들이 청년위원회의 '청년버스' 앞에 모였습니다. 

날씨도 좋고 장병들을 위한 행사가 있어서 그런지 장병들 모두 더 없이 밝은 표정들입니다.



오늘 찾아와 준 멘토들과의 기념 촬영을 위해서 옆에 있는 전우의 베레모도 봐주고 



청년버스를 배경으로 장병들, 청년위원회 위원장(신용한 위원장)님, 멘토님들이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화이팅!! 



이 날 멘토링은 총 2부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는데요. 

1부에서는 신나는 공연과 멘토 특강이,

2부에서는 생활관으로 이동해서 장병들이 관심을 가진 분야별로 개별 멘토링이 준비되었습니다. 


자, 1부가 진행될 장소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2015년 '찾아가는 병영멘토링'의 시작을 선언하신 청년위원회 신용한 위원장님의 힘찬 격려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늘 찾아가는 병영멘토링을 시작하면서 대한민국 최초로 38선을 넘은 백골부대와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그 어떤 부대보다 씩씩하고 늠름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합니다. ..... 앞으로 활짝 펼쳐질 인생이 오니 지금의 2년을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길 바랍니다..(중략)... 다 같이 화이팅할까요?  백골, 백골 화이팅!!!! " 




힘찬 화이팅의 기운을 이어서 분위기를 뜨겁게 달궈줄 전자현악연주단 '바이올렛'의 축하 공연이 있었습니다.  



늘씬 늘씬, 미모의 바이올렛에 반한 장병들! 

그 중 한 장병이 열심히 사진 찍던 동고동락 지기 카메라를 향해 브이!를 해줬네요. 센스쟁이!!  



뒷 사람에게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기둥에 밀착한 채로 바이올렛의 공연에 집중한 장병의 뒷모습!! 

얼마나 집중했는지 느껴지시죠?



바이올렛의 입담과, 훌륭한 연주에 신난 장병들 


바이올렛의 앨범을 득템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나간 장병들 우렁차게 경례를 합니다. 

추웅성!!!!  #)(ㄲ%*^_$$#*@ 입니다!!!. 


우리 장병들 정말 신나고 즐거워 보이죠? 



이렇게 한 껏 흥을 돋워준 바이올렛의 공연이 끝이 나고 

다음 순서, 멘토 강연이 이어집니다. 

첫번째 강연자는 청년장사꾼으로 유명한 '김윤규 위원(청소년위원회 위원 위촉)'입니다.  


처음에 김윤규 멘토님이 등장하셨을 때 장병들의 반응은

 '누구지??' 


김윤규 위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년장사꾼 김윤규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비슷한 나이 29살입니다. 예비역 5년차이고 현재 대학에서 4학년 2학기를 다니고 있습니다. 친한 친구 5명과 창업을 해서 현재 연매출 30억 정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우와아~~!!!! "


장병들의 눈빛이 물음표에서 호기심과 관심, 동경으로 바뀌고, 점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병들의 초롱초롱한 눈빛!! 보이시죠??  


"여러분은 아마도 아까 공연해주신 분들 처럼 여자 강연자를 바랬을 텐데, 남자인 저도!!! 군 부대로 오는게 힘들었습니다. 저는 논산 훈련소 29연대 조교 출신입니다. 저는 군대에서(?) 복식호흡을 배웠습니다."


(조교 말투 흉내에 장병들이 쓰러집니다. 훈련소에서의 고통과 아픔(?)이 생각나서였을까요? ㅋ)


"군대에서 배운 복식호흡을 저는 장사에 써먹었습니다. 손님들을 끌 때 배에 힘이 꽉찬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는게 훨씬 더 잘 먹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사실 책이라곤 만화책도 안 봤었는데, 선임이 억지로 읽으라고 해서 읽기 시작했고 결국 진중문고 150권을 읽고 전역할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시간을 쪼개서 책읽는 습관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여러분들이 한번쯤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질문을 던지러 왔습니다. 여기서의 생활이 답답하고 싫겠지만 전역하는 그 순간, 아무도 여러분을 터치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전역 후에 아버지도 날 터치할 수 없었고 장사도, 결혼도 다 제가 결정했습니다. 곧 있으면 제 아이가 세상에 나옵니다."


(29살 젊은 나이에, 나이다운 패기, 우렁찬 목소리, 30억 매출, 사랑스런 아이까지 다 가진 이 분!!~ 멋지다! )


"전역 후에는 다 스스로 결정하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군대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답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남이 나를 통제하는 시간은 전역 후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앞으로의 시간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전역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사회의 룰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게 없고, 사회의 룰에 따르다 보면 내 적성과 별 상관없는 어떤 회사에 들어갈 거고 결혼도 할거고, 계속 다니다 보면 어떤 직책에 올라갈 거고 뒤늦게 적성에 안맞다는 것을 깨달아도 회사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못 나옵니다. 책임져야 할 처자식이 있잖아요. 그러다보면 나는 점점 우울해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 장병들 점점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ㅠ.ㅠ )


"그 우울한 시간을 10년 앞당기면 바로 군대에 있는 이 시간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 여러분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십시오. 그 생각들이 모여 사회에 나오면 분명 도움이 됩니다. 저는 조교생활을 하면서 온갖 훈련병을 다 만났습니다. 이제 사람을 만나면 대충 봐도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될 정도 입니다. 지금 창업 파트너 중 2명을 군대에서 만났습니다. 사회에서는 나와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힘들지만, 군대에서 2년을 보내면 함께 지낸 사람들 중 나와의 관계가 어떤지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생각을 바꾸세요. 여기서의 시간은 썩히는 시간이 아닙니다.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시간입니다. 밖에서는 못하는 것을 안에서 먼저 하십시오. 그 시간들이 쌓이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언젠간 터집니다....." 


같이 장사를 하는 청년들의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군에서의 시간을 사회에서의 주체적인 삶을 위한 준비시간으로 삼아, 책도 많이 읽고 사람도 사귀고 나에 대해 고민하는 소중한 시간으로 만들라는 김윤규 멘토님의 강연은 저에게도 큰 감동이었습니다. 



패기넘치는 첫번째 멘토의 강연이 끝나고 다음으로는 대학내일의 신익태 대표님의 두번째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에 대해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청년들과 함께 해오신 멘토님께서 이런 말씀으로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언젠가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할 것으로 예상되어 대부분의 학교가 휴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태풍이 비켜갔습니다. 우리나라로 오지 않았어요. 그날 누군가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태풍은 좋겠다. 진로가 정해져있어서...."" 

대부분의 우리 장병들과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잠시 차분해진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최근의 경매를 통해 구했다는 걸그룹 친필싸인 CD를 걸고 가위바위보를 합니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가 진행되는 동안 재치있는 멘토님의 입담에 장병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멘토님은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부분 대학을 갔다. 

대학을 가면 소녀시대 같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근데 대학을 가도 소녀시대를 못 만났다. 이 때 인생의 쓴맛을 보고 백골부대에 입대했다. 이병부터 병장까지 시간이 휘리릭 지나갔고, 전역을하고 복학까지 했더니 이제 학교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전역자의 현재, 미래 모습이다.  


하지만 군대에서 생각을 한 사람은 다르다. 

사실 2년동안 할 수 있는 건 삽질과 생각!!! 

생각하는 시간이, 고민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누구나 가는 군대라면 할 건 꼭 하자. 생각하자. 

2년을 참고, 버티고, **버티면서 '나'에 대해서 생각하자!  


위험에 빠진 나를 구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지금 할 수 있는 나의 경험을 꼭 만들자. 

군에서 했던 것 중에 사회에 나가서 쓸 수 있는 것과 쓸 수 없는 것을 구분 해야 한다. 

자격증, *고생, 진중문고, 혹한기 훈련, **선임!! 이 경험들은 사회에 나가서 꼭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지금 열심히 하는 것, 주어진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라. 허황된 계획을 세우지 마라!! 


귀에 쏙쏙 들어오고 유익한 멘토님의 강연이 마무리 되고 

드디어 2부 순서. 분야별 멘토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장병들은 각자 취업, 창업, 진로, 사회적 기업, 해외진출, 금융 등 사전에 관심이 있었던 분야로 흩어져서 분야별 멘토님들을 만나 궁금했던 점, 고민되는 점들에 대해 상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는 장병들이 모여 고민을 나누고, 



사회적 기업에 관심이 많았던 장병들이 다양한 활동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금융 분야에 관심이 많은 장병들을 위한 멘토링도, 


해외 진출에 관한 다양한 질문과 고민도 해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창업진흥원에서 마련한 설명서를 보면서 창업에 대한 꿈도 키워봅니다. 



이렇게 분야별로 멘토님들과의 상담이 끝나고, 열띤 표정으로 생활관을 나오신 멘토님들께 오늘 멘토링의 감상을 여쭤봤더니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던 장병들의 반응에 놀랐고,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다, 오늘 함께 나눈 시간이 우리 장병들의 답답한 가슴이 뚫어주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따뜻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장병들의 열정을 보고, 오늘 함께 했던 동고동락 지기의 가슴도 뜨거워졌습니다. 


국방부와 청년위원회, 한국경제신문은 지난 3월 18일에 '찾아가는 병영멘토링'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이번 업무협약을 통해 부대순회 멘토링 뿐만 아니라 벤처기업 현장탐방, 직업 체험훈련, 전역예정 장병 취업박람회 등의 업무를 상호 지원하고 협력할 계획입니다. 



오늘 우리 멘토님들의 강연 내용처럼

지금 이 시간이 우리의 청년들, 우리 장병들이 진로를 정하고, 밀고, 나아가는데 밑거름이 되길 기원합니다.  

국군 장병 여러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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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단 상사가 전방으로 간 까닭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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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단 상사가 전방으로 간 까닭은? -4-


아버지의 격려에 양원사는 직업 군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공수 특전단 부사관 모집 시험에 합격하고 1990년 초에 입교하여 6개월간의 힘든 교육을 받고 그 해 9월에 임관했다. 하사로 임관하자 대견해하는 아버지 모습을 보고 그는 본인의 선택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임관 후 양원사는 특전사(김포)에 배치되어 10년 동안 최선을 근무했고 공중 점프만 82회나 해서 점프 마스터의 명예도 얻었다. 진급도 제 코스를 밟아서 한 번도 동기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근무에 충실하면서도 봉급을 아껴, 나이드실수록 농사일에도 한계를 느끼실 부모님께 수시로 송금하고 챙겨드렸다.



직업 군인의 길을 걸어온 양원사 


그는 특전단 근무 중에 부대원들을 인간적으로 이끄는 자기 식의 리더십을 발달시켰는데 그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꿰뚫어보고 그 본질을 리더십의 근본으로 삼는' 리더십의 철학을 젊은 시절 현장에서 터득했던 것이다. 


양원사는 결혼도 옛날식으로 부모가 추천한 규수와 하게 되었는데, 그가 상사로 진급했던 2000년 어느 날, 아버지께 연락이 왔다.  


“ 너도 결혼해야지. 내 친구들 딸 중에 참한 애기가 하나있더라. 선 한번 봐라”


아버지 친구 중에 6.25 전쟁에 참전하셨던 국가유공자가 한 분 계신데 그 분의 딸이 괜찮다는 것이었다. 양원사는 아버지의 권유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시골로 내려가 선을 봤고, 첫 눈에 맘에 들었다. 알고보니 자기 중학교 1년 후배였다. 두 사람은 만난지 불과 4개월 만에 결혼하고 김포 특전단 부근에 신혼집을 꾸렸다.


가정이 생기고 첫 아이가 생겼지만 상사인 양원사는 앞날의 진로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는 상사로서 높은 위치의 부사관이 되었으나 그것은 특전단에서 점점 운신의 폭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고 자신도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았다. 부지런한 그는 그것이 싫었다.


양원사는 몇 달 간 고민 끝에 보다 넓은 보병 부대로 전출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근무하던 특전사의 위치는 사실 서울이서 편한 도시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보병 부대로 가면 이 생활을 접어야 했다. 과연 그것을 안사람이 들어줄지 고민하다가 부인과 여러 번 대화 끝에 서울을 떠나도 괜찮다는 동의를 받았다. 


그러자 어디로 가느냐가 다음의 문제였다. 어느 날 양원사의 마음에 떠오르는 지역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자주 들었던 강원도 서북쪽 지역. 바로, 아버지가 2사단 장병으로 싸우다가 부상을 입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이 가슴 속에서 자꾸만 양원사를 불렀다. 양원사는 결심을 굳히고 이 지역 중에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6사단으로 전출을 신청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는 2002년 6사단으로 전출을 와서 사단 수색대대에 중대 행보관으로 부임했다. 가족은 철원군 동송읍에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는데 6사단은 부대가 교대로 철책선 바로 밑 GOP에서 근무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는 1년을 후방에서 보내고 6개월은 전방에 투입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 DMZ인 전방에 투입되면 한 달에 한 번밖에 가족을 보지 못한다. 지금은 2004년에 7연대 3대대 원사로 전임하여 잘 근무하고 있다.


양원사는 전방 철원의 생활에 마음을 붙이고 있고 7연대의 생활에도 마음이 들어 앞으로 정년이 올 때까지 이 곳 6사단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말한다.  


부대원들과 함께



그는 정년이 될 때까지 군에서 직업 군인의 길을 가고 군 생활을 끝내면 고향 순천 고향으로 낙향해서 부모를 모시며 살겠다는 꿈을 피력한다. 아버지는 50대에 보훈병원에서 6개의 수류탄 파편을 제거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상태가 더 안 좋아져 지팡이에 의지하고 겨우 걷는다고 한다.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서 고작 일 년에 두 어 번 밖에 고향부모를 찾아뵙지 못했는데 늦게라도 부모님에게 효도해야지요. 그때까지 잘 사셔야하는데 걱정도 됩니다."


그의 일생에서 중요한 고비에서 아버지는 세 번의 중요한 역할을 해주셨다. 직업 군인의 길을 택할 때, 배우자를 찾았을 때, 그리고 전방으로 올 때다. 그를 격려해서 군인의 길로 내보낸 아버지 곁으로 그는 다시 돌아갈 것이었다. 연어의 귀향 본능이 생각나는 가족의 인생 스토리다.



낳아주고 인도해준 평생의 사부, 아버지와 함께.


리더십이라는 것은 태권도나 리듬체조처럼 노력해서 얻어지기도 하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나고 가정과 학교에서 훈육받고 사회에서 연마해서 스스로 형성하는 인격의 표현이기도 하다. 부모라는 두 글자로 표현되는 가정에서의 어려운 삶을 극복하면서 다져진 끈끈한 가족애, 가정으로부터의 훈육은 자식들의 인격과 그리고 그의 리더십에서 중요한 토대가 된다. 양원사는 가족, 그 중에서도 부모 역할의 중요성을 몸으로 겪어서 체득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가족애의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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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 유해 인도식 개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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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 유해 인도식 개최 


오늘 3월 20일 오전10시. 인천공항에서는 양측 유해송환 대표단 및 주요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중국군 유해 인도식이 개최되었습니다. 오늘 행사는매년 발굴되는 중국군 유해를 청명절(4월 5일) 이전에 중국 측에 송환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2014년 3월,  최초로 중국군 유해 437구를 중국 측에 송환한 이후 두번째 인도식입니다. 이번에는 지난 1년 동안 발굴된 중국군 유해 68구가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요. 그 순간을 동고동락 지기가 전해드립니다. 


입관식을 마친 중국군 유해를 중국군에게 인도하는 순간입니다. 

검은색 제복의 우리 군 의장대가 관을 들고 중국군 의장대 앞에 섭니다.   


차분하고 경건한 표정의 중국군이 선배님들의 관을 인도받습니다. 



우리 군과 중국 군 대표가 '중국군 유해 인도서'에 서명을 하고 악수를 나눕니다. 

(좌측이 중국 대표, 우측이 우리 군 대표입니다.) 


중국군의 추모행사가 시작됩니다. 

이미 백골이 되어 가벼워진 관을 무겁고, 경건한 마음으로 안고 추모행사 위치로 이동 중인 중국군 의장대의 모습입니다.  



관 하나하나에 중국 국기를 덮고, 


경례로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숙한 추모행사가 끝나고 


드디어 고국으로 향하는 중국 공군 수송기에 오릅니다. 

'선배님들, 저희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마음을 다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모습이 마음을 울립니다. 


이어서 오늘 인도식을 주관한 국방부 차관(백승주)과 중국의 民政部 부부장(더우위페이)의 인사말을 듣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 측은 인도주의적 차원으로 진행되는 중국군 유해송환이 보다 발전적인 한·중관계의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으며, 


중국측은 오늘 행사의 뜻을 기리고, 한국 측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한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오늘 중국군 유해 인도식의 주요 참석자들의 기념촬영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공식적인 행사를 마치고, 내년을 기약하며 한·중 대표가 악수를 나눕니다.


올해는 분단 70년을 맞이하는 해 입니다. 

이번 중국군 유해 송환과 한·중 대표의 굳게 맞잡은 두 손이 

앞으로 더 긍정적으로 발전할 한·중관계를 상징하기를, 

과거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공동번영에 기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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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 지상군 주둔약사 [ 6 ] 제3사단, 제6사단, 제7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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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 지상군 주둔약사 [ 6 ] 제3사단, 제6사단, 제7사단


1917년 창설되어 양차대전 당시 유럽에 투입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전통의 제3사단은 제2차 대전 종전 후 편제가 축소되어 있었는데, 특히 예하 제7연대와 제15연대는 단지 1개 대대만 있었을 뿐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8월 20일 부대를 일본으로 긴급 전개함과 동시에 푸에르토리코에 주둔한 제65연대를 배속 받아 1950년 11월 10일 완편할 수 있었고 즉시 6.25전쟁에 참전했다.


[ 현재도 주요 현역 부대인 제3사단 ]


애초 미 8군 사령관 워커가 미 8군의 예비대로 배속하여주기를 맥아더에게 요구했으나 미 10군단에 배속되어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 방향으로 북진하면 점령지를 인계받는 역할을 담당했고, 흥남 철수 이후 중부전선으로 재배치되었다. 특히 1951년 5월에 있었던 현리전투에서 운두령을 점령함으로써 국군 3군단이 붕괴되면서 생긴 커다란 구멍을 신속히 틀어막는 놀라운 기동력을 선보여 전선을 안정화하기도 했다.



[ 1951년 현리 전투의 위기를 틀어막는 전공을 세웠다 ]


이후 주로 중서부 전선을 담당하다가 휴전 후 1954년 10월 다시 본토로 철군했고,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재편된 후 미군의 전략 예비부대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 지난 2003년 이라크 침공전 당시에 미군의 선봉대 역할을 맞아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명에 걸맞게 전 세계 TV 시청자들에게 모래바람을 휘날리며 진격하여 바그다드를 신속히 점령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보여주었다.



[ 2003년 이라크에서 작전을 펼치는 모습 ]


제6사단은 1917년 창설되어 제1차 대전에도 참전했고 1921년 일단 해체된 후 1939년 재창설되었다. 일본의 침략이 있자 태평양전선에서 주로 활약했고 말기에 24군단 소속으로 있다가 1945년 10월 8일 목포에 상륙하여 한반도 서남부의 일본군 무장 해제와 군정을 담당했다. 이후 1949년 철군 후 본토에서 해체되었는데 6.25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고 우리나라와는 단지 미군정 시기에 인연이 있었을 뿐이다.



[ 잠시 주둔했던 제6사단은 국군 6사단 마크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


제7사단은 1917년 창설되어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일본 점령군으로 홋카이도에 주둔하다가 6.25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여러 번의 부대 해체 및 재창설을 반복하다가 2012년 행정사령부 성격으로 재창설되었다. 7사단은 한국과 인연이 유독 많은 부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일본이 항복한 후 1945년 9월 8일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한국에 진주한 최초의 미군 부대였기 때문이다.



[ 제7사단은 수시로 해체와 창설을 반복한 부대다 ]


한반도와 처음 인연을 맺은 미군 부대인 7사단은 정부 수립 후 1948년 12월 31일 철군하여 일본에 재배치되었다. 일본에서 극동사령부 예비대 임무를 수행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는데 그때는 이미 많은 감편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낙동강 교두보에서 일진일퇴하던 중 7사단은 10군단이 창설될 때 예하로 편제되었는데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한국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 1945년 중앙청 앞에서 행사를 펼치는 미 7사단 한반도에 최초로 주둔한 미군 부대다 ] 


이후 계속 한국에 주둔하다가 닉슨 독트린에 의거, 미 1군단과 함께 1971년 미국 본토로 철군했다. 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기 위해서였는데 그 대상이 바로 7사단이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철수가 이루어지자 공식철군 행사 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아쉬움을 표하였을 정도로 우리 안보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 부대였다.



[ 1971년 철군식 당시의 모습 ]


1945년, 1950년에 걸쳐 공교롭게도 두 번이나 인천에 상륙했고 동해안의 이원에도 상륙한 경험이 있어 해병대도 아니면서 한반도의 동과 서 양쪽의 상륙전을 섭렵한 특이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전선이 고착화 된 후에는 주로 중부전선과 서부전선 일대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1945년부터 시작된 주둔 경력까지 따진다면 2사단 다음으로 한국에 가장 오래 주둔했던 부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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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알아보는 군수]14 그리고 1,200(외국과 상호군수지원 MOU체결,콜롬비아에 초계함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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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동고동락 지기 입니다. 

우리나라가 어렵던 시절, 해외 여러국가의 원조, 지원 등을 받았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계시죠? 

우리는 지금 지원을 받던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은 군수분야의 다양한 해외교류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14개 국가와 "상호군수지원 MOU"체결 



1950년 6.25가 발발했을 때 우리를 돕기 위해 UN 16개국이 파병을 했고, 그 외 많은 나라가 물자와 의료품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미리 약속도 한 적 없는데,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손길을 내민 나라들입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2014년 현재, 우리는 14개 나라와 “유사시에 서로 돕자”는 약속을 체결했습니다. 바로‘상호군수지원 MOU'를 통해서입니다. 



‘상호군수지원 MOU’는 상대국이 군사연습 및 훈련, 작전을 펼치거나 재난, 긴급사태를 당했을 때 이후 상환을 조건으로 군수품과 용역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최근 들어 UN의 평화유지군 활동이 증가하고, 세계 각국에 대형 재난이 자주 발생하면서 나라 간의 상호 군수지원과 협력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뜻 맞는 나라들이 서로를 돕겠다는 뜻을 모으고 약속한 게 바로 군수지원 MOU입니다. 또한 군수지원 MOU를 맺으면 양국 간의 군수지원을 통해 향후 방산수출 전략까지 모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답니다.  


현재 우리나라와 ‘상호군수지원 MOU’를 체결한 나라는 미국(88, 괄호 안은 체결 연도), 태국(91), 뉴질랜드(07), 터키(08), 필리핀(09), 이스라엘(10), 호주(10), 캐나다(10), 인도네시아(11), 싱가포르(11), 캄보디아(12), 스페인(12), 영국(12), 그리고 몽골(13)입니다. MOU 체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6.25 때는 적으로 맞서 싸웠던 중국도 우리와 2001년부터 ‘한중군수협력회의’를 개최해오고 있답니다. 


이렇게 다양한 나라들과 속속 ‘상호군수지원 MOU’를 체결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우리 국력, 군사력의 성장을 상징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각국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한 군사력은 유지하되, 더 많은 나라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우리나라, 우리 군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2014년 콜롬비아에 1,200톤급 초계함을 양도 



우리나라는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성장한’, 세계에서 보기 드문 사례로 손꼽히곤 합니다. 군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군 창설 당시나 6.25 전쟁 때 수많은 나라로부터 병력과 군수 지원을 받아야 했던 우리가 이제는 해외에 군수품을 양도해 주는 나라로 우뚝 섰습니다. 


국방부는 지난 2008년 5월 ‘불용군수품의 해외양도에 대한 예규’를 제정, 우리 군에서 도태된 군수품을 해외에 지원해주는 법적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도태된 무기나 장비를 필요로 하는 나라에 지원해주는 것이 ‘불용군수품 해외양도’입니다. 


우리 군에서 도태된 장비를 폐기처분하지 않고 해외에 양도함으로써 국가 외교안보정책을 뒷받침하고 외국과의 군사교류 협력 및 방산수출 증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2014년 7월에는 진해에서 2011년에 퇴역한 1,200톤급 초계함인 안양함을 콜롬비아에 양도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고속정과 연안경비정 등 소형 함정을 주로 양도하였고 초계함을 양도한 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초계함을 양수받은 국가는 콜롬비아가 최초가 되었습니다. 콜롬비아에 양도된 초계함은 콜롬비아의 해안 방어 및 마약거래 단속 임무를 수행할 예정입니다. 



이보다 앞선 2014년 5월에는 우리나라 굴착기, 불도저, 크레인 등 불용 공병장비 10종 15점이 몽골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번에 양도된 공병장비는 몽골군의 UN평화유지활동 뿐 아니라 몽골 국가기반시설 건설에 활용되어 몽골경제 발전에 기여할 예정으로 이번에 양도된 장비는 지난해 말 체결한 ‘한․몽 상호군수지원 MOU'와 함께 양국 군수분야 협력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용군수품 해외양도는 주는 나라와 받는 나라 사이에 외교․군사 협력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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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비의 군모닝] 130화 기다리고 기다리던 철이의 분대 맞후임!!

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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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1-

 

이 글은 여순 14연대 반란 주모자의 한 명이었으며 6년간 지리산 일대에서 악명 높은 공비 행각으로 군경을 괴롭히다가 1953년 11월 사살 된 공비 두목 이 영회의 최후에 관한 글이다.

 

이 영회에 대한 전사적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 글이 이 자에 대한 유일한 글일 수도 있으며 단편적이지만 그에 관한 새로운 인적 정보도 담고 있어서 전투 경찰사에 의미있는 기록이라고도 자평하고 싶다.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도로 반란 진압의 출동 명령을 받고 승선 대기 중이던 14연대 일부 좌익분자들은 장교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사병들과 인간 관계가 좋았던 연대 인사계 지 창수 상사가 주도해서 반란의 불길을 일으켰으나 곧 뒤에 숨어있던 좌익 장교 김 지회 중위가 전면에 나서 반란을 지휘했다. 두 명의 장교와 좌익 부사관들 40여명이 일으킨 반란 사건은 300여 명이 사살되고 2,000여명이 투항하여 일단 진압되었다.

 

 

진압 직전 반란군들이 지른 불에 타고 있는 여수시

 

두목 김지회와 홍순석등의 좌익 장교들과 하사관들은 700명의 잔당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김지회와 홍순석이 지휘하는 반란 부대는 지리산으로 잠적 후 추적하는 군경들과 싸우며 도망다녔다. 두 장교 출신 수괴들은 6개월 뒤에 토벌대에 포착되어 사살당했다.

 

그러나 14연대 반란병들중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던 몇몇 하사관들은 공비 부대의 간부들로 변신해서 휴전의 시점을 지나서까지 긴 세월동안 반란군 공비 부대를 이끌며 군과 민간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반란을 주도한 연대 하사관 그룹에는 지창수와, 이영회, 송관일, 김흥복등이 있었다. 주동자 지 창수만 반란 직후 행불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공비 두목으로 변신하여 대활약을 하였다.

 

반란군 출신의 공비들. 머리가 긴 것으로 보아 사건후 적어도 한 달이 지나서 체포된 듯하다.

그들은 반란으로 준 피해를 준 것보다도 공비 활동으로 몇 배나 더 큰 피해를 대한민국에게 주었다. 반란군 출신 공비 두목들은 모두 군경의 손에 의해서 최후를 맞았지만 군사 훈련을 받은 그들의 전투 지휘력은 공비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났다.

 

비록 후퇴하지 못하고 지리산으로 들어온 북한의 정예 4사단이나 6사단의 북한 정규군 잔당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이들 반란군 출신처럼 끝까지 버티어 내지 못하고 일찌감치 토멸되었다. 한때 1만 명의 공비들이 우글거리던 지리산 공비들도 여러 번의 군의 대규모 토벌 작전과 경찰의 추격전으로 휴전 무렵에는 1,000여 명이 남아 있었다.[일설에는 600명]


그리고 3년 뒤인 1956년에는 단지 60여 명만이 산야를 떠돌며 목숨을 이어갈뿐이었다. 1963년 11월 최후의 공비이자 여자였던 정순덕이 체포됨으로서 남한의 공비 준동은 끝을 맺었다.

 

이 현상- 금산군의 부농 출신으로  보성전문을 나오고 박 헌영과 함께 조선 공산당을 창립했다.

 

 

남로당은 반란군 입산 후 이들 군사력을 지휘 보존하고자 과거 일제시 지리산에서 피신 생활을 했었던 이현상을 입산시켰다. 이현상은 이후 지리산을 일대의 공비들 지도자가 되어 이들을 이끌었는데 군경의 지속적인 토벌을 받아서 감소되다가 한국 전쟁 발발 때는 겨우 200여명의 공비들만 남았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발발하고 남침한 북한군 패잔병들과 부역자들이 대거 입산함으로서 그의 파워는 대폭 확대되었었다.

 

그가 1951년 덕유산 송치골 회의에서 남한을 6개 구역으로 나누고 자신이 제일 주요한 전남북의 5 구역 위원장겸 남한 공비부대를 총지휘하는 남부군 총사령관이 된 것은 아직 북한에서 잔명을 이어가며 그래도 약간의 힘이 있었던 남로당의 영향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전후 김 일성에 의해서 잔인한 남로당 대숙청이 있자 이현상은 휴전 직후인1953년 8월 26일 지리산 반야봉 서쪽 빗점골 회의에서 전남 도당 위원장 박 영발이 주도하는 반대파에 의해서 5 지구당 위원장 직을 박탈당하고 실질적으로 남한 공비 부대의 총사령관직도 내려놓은 평당원으로 강등당했다.


 1953년 9월 17일,그는 자기를 지지하는 경상도 제 4 지구당을 찾아가다가 지리산 빗점골에서 군경에 죽임을 당하였다. 이현상은 리더십이 뛰어난 남로당 간부였지만 그가 일사분란하게 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이 현상은 경남도당 위원장 김 선우의 지지를 받았으나 그가 직할하는 제 5지구당의 휘하 전북도당 위원장 방 준표와 전남도당 위원장 박 영발과는 상당한 알력이 있었다.

[위 세 명의 도당 위원장들은 다음 해인 1954년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이현상이 그래도 그 지휘권을 행사했던 것에는 그가 공비 최강 부대를 지휘하는 여순 14연대 출신 이 영회의 지지와 충성을 받았던 것이 큰 이유가 된다. 이현상과 구(舊)빨치로 분류되는 반란군 출신 부대와는 한국전부터 토벌대에 쫓기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다져진 진한 유대감이 있었다.

 

14연대 대전차포 중대 상사 출신인 이영회는 그를 신임하는 이현상에게 충성을 다했었다. 이영회는 이현상의 지지로 남부군 부사령관까지 승진했었다. 이영회가 지휘하던 부대는 공비 부대중에서도 알아주는 최정예 부대로서 전투 경찰들도 상대하기를 두려워하는 부대였었다. 이영회 부대와 여러 번 싸운 일이 있었던 현재 참전 경우회 사무총장인 김을로씨는 이 영회 부대를 이렇게 평했다.

 

“ 그 누마 부대 말도 못하게 강했다 아이가!”


 그는 또 잔인한 것으로도 유명해서 한때 몸담았던 국군 군인을 포로들은 방면해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하였으나 군 입대 전부터 감정이 안 좋았던 경찰 포로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학살해버리기 일쑤였다. 이영회는 휴전 다음해 인 1953년 11월에 이 글이 소개하려고 하는 의령 경찰서 습격을 마치고 지리산 아지트로 복귀하다가 전투 경찰의 매복에 걸려 사살될 때까지 수없는 살인과 약탈의 만행을 저질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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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 지상군 주둔약사 [ 7 ] 제24사단, 제25사단, 제40사단, 제45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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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 지상군 주둔약사 [ 7 ] 제24사단, 제25사단, 제40사단, 제45사단

 


제24사단은 1950년 7월 2일, 예하 제21연대 1대대를 한반도로 긴급 전개하면서 6.25전쟁에 최초로 투입된 사단이었다. 하지만 죽미령 전투에서 참패를 시작으로 대전에서 사단장이 포로가 되고, 예하 제34연대는 6.25전쟁에서 재건되지 않고 해체된 유일한 부대가 되는 망신을 당했다. 미군 전사에서 이때 미 24사단이 담당했던 오산에서 낙동강 교두보까지의 후퇴를 ‘defeat after defeat’ 라고 표현하였을 정도였다.

 

 

[ 제24사단은 처음 전투에 투입 된 부대였으나 시작은 좋지 않았다 ]

 

그러나 낙동강 교두보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의 대열에 앞장 서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후 주로 9군단 소속으로 후방에서 작전을 벌이다 중공군 남진 후 전선에 투입되었고 1952년 1월 23일 40사단과 임무 교체 후 일본으로 부대를 옮기고 난 뒤 재편과정을 거쳐 1953년 7월 16일 재차 한반도에 배치되었으나 곧바로 휴전을 맞이했다. 그 후 1954년 미국 본토로 철수했고 현재는 해체되었다.

 

 

[ 최초로 교전에 참전한 24사단 예하 스미스 부대원의 모습 ]

 

제25사단은 일본 오사카에 주둔하고 있다가 1950년 7월 18일 미군 참전과 동시에 낙동강 교두보로 긴급 이동 전개를 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완편된 상태는 아니었다.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전쟁 기간 중 병력 및 장비를 보충 받아 싸우면서 부대를 재편했고 이후 중서부 전선을 오가며 무공을 세웠다. 휴전 후 1954년에 하와이로 부대를 철수했는데 현재도 유지되고 있는 10개의 미군 현역 사단 중 하나다.

 

 

[ 제25사단은 현재도 현역 사단이다 ]

 

이동 전개가 신속한 경보병사단으로 중전투 사단에 비해 전술적 이동 능력이나 화력이 뒤지지만 항공 수송 등을 이용한 장거리 전략 기동 능력은 매우 뛰어난 부대다. 때문에 철군이후에도 1970~1980년대 팀스피리트 훈련이 당시 한국에 긴급 전개하는 제1순위 부대로 훈련을 수시로 받아왔을 만큼 우리와 인연이 깊다. 21세기 들어 스트라이커 여단 체제로 바뀌면서 화력도 증강되었다.
 

[ 1980년대 팀스피리트 훈련 당시의 모습 ]

 

제40사단도 우리와 상당히 인연이 많은 부대다. 1917년에 창설되었고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임무를 수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현역화 되어 태평양전선의 필리핀 전투 등에 투입되었고 종전 후에 24군단 소속으로 9월 29일 부산에 상륙하여 한반도 동남부를 군정 통치했다. 철군 후 다시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임무를 수행했으나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9월 1일 동원 소집되어 다시 현역부대가 되었다.

 

 

 

[ 제40사단은 평시 주방위군이지만 한반도에 두 차례나 파견된 이력이 있다 ]

 

6.25전쟁 초기에 긴급 투입된 이전의 부대와는 달리 충분한 훈련과 장비, 편제를 유지하여 참전 초기부터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다. 1952년 2월 24사단과 임무를 교대하며 6.25전쟁에 참전했고 휴전 후 1954년 6월 30일 캘리포니아로 귀대했다. 현재 다시 주방위군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미국의 전시 동원이 이뤄지는 경우 현역사단으로 제일 먼저 전환될 미 육군 전략 예비전력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 1952년 중부 전선을 담당하던 당시의 40사단 장병들 ]

 

제45사단은 6.25전쟁 발발 당시 오클라호마 주방위군 임무를 수행하던 부대였다. 1950년 9월 1일 동원 소집되어 1951년 4월 일본으로 이동한 뒤 이듬해 2월 1기병사단과 임무를 교대하면서 6.25전쟁에 참전했다. 휴전 후 1954년 4월 30일 본토로 귀대했다. 45사단도 주방위군에서 동원된 사단이지만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충분한 훈련과 장비, 편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참전 초기부터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다.

 

 

[ 제45사단은 주로 중부전선에서 활약하였다 ]

 

45사단이 참전했을 당시에는 양측 모두가 전선을 돌파하여 전쟁을 끝내려는 생각은 사실상 접고 있던 상황이어서 전선이 38선 인근에서 정체되자 주로 참호전으로 일관했다. 40사단과 45사단의 예를 본다면 6.25전쟁 참전 초기의 24사단처럼 현역이라도 훈련이 부족하고 자만에 가득 차면 코피가 터지고, 아무리 예비군이라 해도 충분한 훈련과 준비를 한다면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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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주년 향토예비군의 날] 예비군을 위한 특별 할인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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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주년 향토예비군의 날 기념 특별 할인 행사 




2015년 4월 3일제47주년 향토예비군의 날을 맞아 예비군 여러분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할인 행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극장, 국립국악원, 국립민속국악원, 국립남도국악원, 국립부산국악원에서 다양한 공연과 전시를 할인 또는 무료로 제공한다고 하니, 여러분들을 위한 혜택!!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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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알아보는 군수]3,390(우리 군 소유 미술품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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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동고동락 지기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봄기운이 느껴지고 남부 지방에선 꽃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는데요. 

요즘 같이 나들이 하기 좋은 날 미술관을 방문해서 문화생활을 즐기시는 분들도 계시죠? 

웬지 딱딱하게 경직된 군기만을 상상하게 되는 군에 미술품이 전시되고 있다면 상상이 가시나요? 

우리 군에서도 3,390여점의 미술품을 보유하고 있답니다. 

지금부터 자세한 이야기 들려드릴게요!! 



우리 군이 소유하고 있는 미술품은 3,390여점 




군은 수준 높은 미술품을 소유하고 있는 컬렉터이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는 분들도 적잖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사실입니다. 

우리 군이 현재 소유한 미술품은 육군 1,840여점, 해군이 670여점, 공군이 880여 점 등입니다. 그렇다면 군은 왜, 그리고 어떻게 미술품을 소장하게 된 것일까요? 힌트는 미술품의 ‘주제’입니다. 


군이 소장한 미술품의 많은 수가 전투장면이나 피난민의 모습 등 전쟁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 작품은 그 기록성과 상징성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구입해 군에 전달했거나, 유명 인사들이 소장 작품을 군에 기증해서 모인 것들이죠. 

종류도 여러 가지입니다. 한국화, 서양화, 서예, 조각, 판화, 도자기, 공예품 등 


구구절절 사연이 많은 미술품도 있답니다. 현재 국방부 신청사 1층 현관에 걸려있는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 ‘적영’. 베트남 파병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알려진 638고지전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런데 한-베트남 수교 후 베트남 국방장관이 국방부를 처음 방한했을 때 국방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베트남 장관이 이 그림의 ‘정체’를 알면 마음이 불편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작품 배경을 설명한 동판을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답니다. 


또한, 국방부에는 1979년 12.12 사태 때 총알을 맞은 그림도 있습니다. 박항섭 화백의 작품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난민’이 그것입니다. 12.12 당시 국방부 구관 1층 엘리베이터 근처에 걸려있었던 바람에 총알을 맞은 작품이죠. 이 그림은 현재 국방부 근무지원단 지하 1층에 걸려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작품 중 많은 작품이 보관 상태가 다소 좋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공군의 경우 전문가에게 의뢰해 작품을 복구하는 작업이 비교적 진척되었지만 최근까지도 각 군의 미술품 보유 현황조사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2014년 2월 ‘군소유 미술품 관리지침’이 제정되고, 미술품 관리시스템을 만들어 각 군 홈페이지에 미술품 목록을 탑재하는 등 본격적 관리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가까운 시일 안에 미술품을 일반 공개할 계획은 없지만, 혹시 국방부 청사를 방문할 일이 있으시다면 벽에 걸린 그림을 눈여겨 봐주세요. 그게 바로 여기에서 소개한 군 소유 미술품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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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비의 군모닝] 131화 여친이 보낸 소포는 나의 자랑!! 생활관에서 펼쳐진 소포 대결!!

1화 그때 ( PROLOGUE )

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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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2-



이영회는 지리산 주력 공비 부대 지휘관이자 우리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준 인간. 또는 한국 국방사에 중요한 비중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었으나 그에 대한 연구는 전혀 안 되어있다.


나는 그가 반란 시에 단 스무 살이었다는 공식 기록에 의문을 가졌던 것을 계기로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었으나 정말 얻은 결과는 너무 미미했다. 한국 국방사에서 악당으로서 죽은 이 인간에 대해서 별다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시 전투 경찰대 - 철모가 지급된 것은 후기에 들어서였다.


나는 1955년 출간된 군 자료에서 이영회가 사살되던 1954년에 32살이었음을 발견했다. 반란 시에 단 스무 살의 애송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역시 나의 의문이 풀렸다. 이 기록은 이영회의 본적지 주소가 전북 순창이라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었다.


그가 1947년 국방 경비대 시절에 군에 입대해서 일 년 조금 넘은 시점에 일찍 상사 계급장을 달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과거 일본군 복무 경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무렵 군은 군 전투력 증강 차원에서 일본군 복무 경험이 있는 병사들은 일반 병들보다 훨씬 빠른 진급의 특혜를 주었었다. 여순 반란 사건에서 앞장을 섰던 지창수 상사가 입대 1년 반 만에 상사와 연대 인사계라는 자리를 차지한 사실은 이를 입증해준다 할 것이다.


영회가 47년 국방 경비대 입대시 나이가 벌써 26세였는데 일본군에서 돌아온 해방 후의 그의 이력은 ‘실록 정순덕’을 썼던 작가 정충제 씨가 밝히고 있다. 이영회는 입대 전 순천역전에서 놀던 깡패 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불순한 범죄 행위를 하고 있으니 경찰이 가만히 둘리가 없다. 경찰관에게 자주 단속도 되고 경찰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기도 했으니 경찰에 대해 쌓였던 원한이 전투 경찰 포로들을 마구 학살한 배경이었던 듯하다.


그는 군에 들어와 입대 전부터 이미 적색물이 든 지창수와 일본군 출신이라는 공동의 배경으로 친해지고 자연히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지창수는 반란시기에 나이가 거의 40대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병력 충당을 위해서 1937년부터 실시한 조선인 대상 지원병 제도 초기에 나이가 든 상태로 입대했던 것 같다. 지창수는 자연히 그의 많은 나이와 일본군 시절의 계급으로 14연대 적색분자들 비밀 조직의 리더가 되었고 여기에 일본군 출신 다수가 합세했을 듯하다.


반란후 공비가 된 이영회는 군경의 토벌이 극심해지면서 그 대담한 전투 지휘로 관록을 쌓아가며 이현상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가 지휘했던 공비 부대는 자주 부대명을 바꾸어서 혼동을 주지만 57사단이라는 부대명을 쓸 때 가장 위력을 떨쳤다.


의령 경찰서를 습격했을 때 그의 부대는 대폭 감소되어 구례군당 소속 995 부대로 다시 재편성을 하여야 했다.

마지막 공비 정순덕은 이영회 부대를 따라다니며 밥을 해주다가 전투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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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정순덕’을 보면 이 영회가 전투가 벌어지면 전투모를 뒤로 돌려쓰고 부하들을 마구 다그치며 대담한 전투 지휘를 했다는 정순덕의 회고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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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국방부 블로그에서 ‘한국전 최고의 파이터 강삼수 경위’를 두 번 소개했었는데 역시 일본군 출신인 강삼수 경위의 산청군 사찰 유격대는 공비 최강의 부대 이영회 부대를 상대로 잘 싸워서 이영회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경찰 부대가  되었다.


단 10여명의 부대원만 이끌고 62회의 전투와 322명의 공비를 사살한 산청경찰서 사찰 유격대장 강 삼수 경위



전에 소개했었던 글을 여기 다시 소개한다.


1951년 9월 11일 산청군 새롭재에서 강삼수 부대의 매복조에게 당해 큰 피해를 입었었던 이영회는 애같은 짓으로 그에 대한 증오감을 드러냈다. 전투 경찰사는 이런 일화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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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금서면 매촌 부락에서의 보급 투쟁을 마치고 소굴로 돌아가던 공비 57사단장(정규 사단이 아니라 이영회 부대를 가리킴) 이영회(李永檜)는 밤머리 재에 올라서 마을을 향해 


"삼수 요놈아! 뽈갱이 여기 있다. 잡아봐라! 잡아 봐!" 

"삼수야! 헛다리 짚었다고 슬퍼 말아라! 이 요사할 놈아!"하고 외쳐댔다고 한다. 


위에서 썼던 ‘뽈갱이[빨갱이], 요사한 놈’등은 이영회가 태어난 고향의 향토 사투리다. 경상도인 산청에서 이런 고향 사투리가 흘러나온 것을 보면 위의 말은 이영회가 정말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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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일화는 강삼수 경위에게 시달릴대로 시달린 이영회가 그를 얼마나 깊이 증오했던가를 잘 보여준다.(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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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규제개혁 홍보웹툰] 군무원 임파서블!


주한 미 지상군 주둔약사 [ 끝 ] 제5연대 전투단, 제187공수연대 전투단, 제1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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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 지상군 주둔약사 [ 끝 ] 제5연대 전투단, 제187공수연대 전투단, 제1해병사단



제5연대 전투단은 원래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 전투단으로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 해제에도 참여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주둔군 외에 미국에서 가장 먼저 증원된 부대였다. 1950년 7월 31일 부산에 상륙한 후 낙동강 방어전에서 혈전을 벌이던 8군의 귀중한 예비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했고, 34연대가 연이은 졸전 끝에 해체되자 이후 24사단 예하로 편성되어 맡은 바 임무를 다했다.



[ 1950년 8월 27일 낙동강 전선의 5연대 전투단 야전 치료소 ]


제187공수연대 전투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창설된 제11공수사단 예하연대로 켄터키 주의 포트 켐벨(Fort Campbell)에 주둔 중이던 1950년 8월 1일 전투단을 구성하여 9월 20일 일본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맥아더가 이 부대를 한반도에 투입하여 줄 것을 요구했을 때 내주기 싫어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질 정도로 정예 중의 정예였고 현재도 세계 최강의 공수사단으로 평가되는 제101공수사단에 속해 있다.



[ 제187공수연대는 미군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


187공수연대 전투단은 10월 20일 김일성 체포와 북한군의 퇴로차단을 목표로 순천-숙천 사이에 대규모 공수작전을 수행하면서 멋지게 6.25전쟁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후 1951년 3월 임진강 일대에서 후퇴하는 중공군의 퇴로를 막기 위한 공수작전을 다시 한 번 수행했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유엔군 전체의 전략예비대 역할을 수행하다 1955년 미국으로 귀대했다.



[ 문산 공수작전 당시의 모습 ]


제2차 대전 종전 후 제1해병사단은 축소 편제되어 캘리포니아 주 포트 펜들턴(Fort Pendleton)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증편에 착수하여 육군 7사단과 함께 10군단을 구성하여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 시점까지도 사단 병력은 여전히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작전 중이었는데 7해병연대는 한국으로 이동 중이었고, 5해병연대는 낙동강 방어전투에 임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 제1해병사단은 지금도 최강의 전략 기동부대다 ]


20세기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인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도 이 부대의 명예를 드높였지만 그해 11월부터 12월 사이에 있었던 장진호전투는 미군 전체의 신화로 남아있다. 비록 부대가 재편되는 데 엄청난 시간을 요할 정도로 많은 타격을 입었지만 중공군 수개 군단을 잡아놓고 출혈을 강요해 함경도 방향으로 진출했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의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여 주었다.



[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모습 ]


또한 십여만의 민간인이 흥남부두를 통하여 공산 치하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든 전사를 통틀어 보기 힘든, 그것도 후퇴라는 급박한 순간에 이루어진 놀라운 인도적 작전이었다. 이런 명성으로 인하여 해병 1사단의 장진호전투는 오키나와전투, 이오지마전투와 더불어 미 해병대 역사상 3대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중부, 서부전선을 담당하다 1955년 4월 미국으로 철수했다.



[ 신화가 된 장진호 전투 당시의 모습 ]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미군의 많은 지상군 전투부대가 한국과 인연을 맺었음을 알 수 있다. 행정적으로 군정을 담당하기 위해 잠시 주둔했던 부대도 있었고 엄청난 피를 흘려가며 치열한 전쟁의 한가운데서 맹활약한 부대도 있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상군을 보호하고 도와준 해군, 공군은 물론 비전투부대를 포함한 수많은 여타 부대들도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 현재도 미 지상군은 대한민국 안보의 중요한 조력자이다 ]


미 군정시기에는 1개 군단 예하 3개 사단이 주둔하여 정부 수립 이전까지 행정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담당했고 전쟁이 한창일 때는 1개 야전군, 3개 군단, 해병대 포함 9개 사단(동시 최고 7개 사단이 참전했고 2개 사단은 후방에서 재편)의 거대한 군대가 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해 투입되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미 지상군의 여러 부대들은 굴곡 많았던 우리 현대사의 일부임에는 틀림없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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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알아보는 군수]6 그리고 161(린6시그마, 장기계속계약 품목 161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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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동고동락지기입니다. 

오늘은 숫자 6과 161에 담겨있는 군수분야 품질관리와 계약관리에 대한 내용을 알려드릴게요! 





기업 뺨치는 국방부 선진 경영기법 '린 6시그마' 



지난 2013년, 포스코 경영지원그룹 임직원들이 해군 군수사령부 정비창을 참관하고 갔습니다. 안보 교육이라도 받고 간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그날 보고 간 것은 품질관리를 통한 생산성 향상 노하우였습니다.


기업이 군대에서 품질관리 기법을 벤치마킹하다니 놀라운 일이죠? 더군다나 육군 군수사령부는 그 해 한국생산성본부가 주최하는 국가생산성대회 종합부문에서 민간 기업들과 당당히 경쟁하여, 대통령표창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여기에 ‘6’이란 숫자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군이 이렇게 기업을 앞지르는 생산성 향상을 일궈낸 것은 2010년 도입한 ‘린 6시그마’ 사업의 결과거든요. 일본의 기업 도요타가 개발한 ‘린(Lean) 경영’은 업무 절차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 단순화(Lean)하는 기법이고, 1980년대 미국 기업들이 주창한 ‘6시그마(6sigma)’는 업무과정 개선과 기술개발 등을 통해 제품 1백만 개 당 불량품을 3.4개 수준으로 줄이는 선진 경영기법입니다. 


군이 ‘린 6시그마’를 도입한 것은 올해로 4년째. 본격적인 사업시행 첫해인 2011년에는 56개 프로젝트 통해 300억 원, 2012년에는 138개 프로젝트를 통해 264억 원의 재정 감축효과를 거뒀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사업 성공사례를 살펴볼까요? 우선 공군 82항공정비창으로 가봅시다. 이곳 정비창에서는 ‘창정비’라는 공정이 이뤄집니다. 항공기가 일정시간 비행을 마치면 완전히 분해해서 기체나 기관 등을 점검하고 교환, 수리해 새 항공기처럼 만드는 작업입니다. C-130 항공기의 경우 2011년까지만 해도 한 대를 창정비하는 데 목표기간으로 232일을 잡았는데, 어떤 때는 이 과정이 지체돼서 300여 일이 걸리기도 했죠. 이 정비 기간 동안 항공기는 발이 묶여 작전에 투입될 수 없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그런데 ‘린 6시그마’ 도입을 통해 4,000여 개 공정 과정을 모두 분석하고 문제점을 개선한 결과 정비기간을 201.5일로 줄였답니다. 무려 34%의 생산성 향상! 그 결과를 인정받아 한국생산성본부가 주관한 생산성 경영체제 인증에서 레벨 5+등급 받기도 했는데, 이는 국내 기업 중 상위 10%이내 수준이랍니다. 이만하면 기업들이 찾아와 벤치마킹을 해갈 만하죠?  


이런 성공사례는 한 둘이 아닙니다. 육군 55사단은 2주에 한 번 30개 부대에 각각 수송되던 군 양곡을 가까운 지역끼리 6개 그룹으로 묶어 통합 수송함으로써 매월 200여 명씩 동원되던 수송인력을 60여 명으로 줄이고, 수송차량도 70여대에서 20여대로 줄였답니다. 기름도 그만큼 절약된 것은 당연하고요. 


이렇게 군대 자체가 선진 경영체로 변신하고 있는 것과 함께, 군이 길러내는 경영관리 전문가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간 군이 배출한 6시그마 전문인력은 820명. 이들이 군에 계속 남아 군에 기여를 할 수도 있고, 사회로 진출해 다른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도 있으니, 이쯤 되면 군대가 ‘선진 경영인 육성기관’으로서 역할도 톡톡히 하는 셈이죠?







피복류, 수리부속 등 161개 품목에 장기계속계약 시범적용 



잠깐 사업가가 되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매해 납품업체를 새로 선정하거나, 기존 업체하고도 해마다 계약을 새로 체결하기 위해 서류를 반복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볼까요? 새 업체를 선정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 납품이 일시 끊어지는 사태가 생길 수 있고, 해마다 계약행정을 반복하다 보니 인력이 낭비될 수 있고…….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업체와는 1년 단위 단기계약이 아니라 몇 년 간 지속되는 장기계약을 맺어 공급선을 안정화하는 게 유리하죠. 우리 군도 일부 물품에 대해서는 1년짜리 계약을 해마다 갱신하느라 물품 조달에 공백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 공급업체와 장기계속계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 항목이 운동화. 2012년의 경우 입대 장병들에게 지급될 장병용 운동화의 단가가 오르는 바람에 추가물량 계약이 지연돼서 신병들에게 제 때 운동화를 보급하지 못하는 사건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군은 2014년 피복류, 수리부속, 정비사업 등 161개 품목 4,038억 원 어치 물품에 대해 업체와 2~5년의 장기계속계약을 시범적으로 맺었습니다. 


장기계속계약은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의 기본사항을 정한 ‘국가계약법’ 제 21조에 근거해 체결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몇 년 간에 걸쳐 진행되는 물품의 제조 등에 대해 연차별 계획을 수립해서 계약할 때 전체 금액을 결정하고, 매년 해당 연도의 예산범위 안에서 발주를 허용하는 계약방법이죠. 


이로써 해마다 군으로서는 반복되는 행정절차를 줄이고, 물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이 가능해진답니다. 업체로서도 몇 년 간 납품이 보장되는 만큼 효율적인 생산계획을 세우고 해당 물품을 좀 더 집중도 높게 제작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요. 


하지만 한 가지 짚어야 할 것! 장기계속계약체제 때문에 일부 업체가 군 계약을 독점해서는 안 되죠. 좋은 물품을 저렴하게 공급받기 위해서는 업체 간 선의의 경쟁은 필수적이니까요. 


그래서 군은 경쟁업체 진입이 제한되지 않도록 품목을 신중히 선정하고 계약기간을 지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군은 2015년까지 장기계속계약 적용 품목을 점차적으로 늘여나갈 방침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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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참전용사 유해발굴 증언]"그 때 내 전우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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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 유해발굴 증언] "그 때 내 전우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하얗게 서리가 내린 머리칼, 세월의 나이테가 깊게 새겨진 얼굴과 손. 

지나온 시간을 증명하는 듯 마음과 달리 느리기만 한 움직임..... 


그러나, 그 때를 되새기며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만큼은 그 때의 그 청년....

 

빛나는 눈을 가진 청년과 

똑같은 눈빛을 지닌 노인이 오버랩되는 순간....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80세를 넘긴 나이에도 당시의 소속 부대를 또렷하게 기억하시는 우리 할아버지들.. 

동고동락 지기가 참전용사 어르신들을 뵙는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난 달 26일 용산에 위치한 용사의 집에서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6.25 참전용사 분들을 모시고 유해발굴 증언 청취 및 사업설명회가 개최되었는데요. 동고동락 지기가 그 현장을 방문해보았습니다. 



이 행사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준비한 행사로 전쟁이 끝난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땅 속에 묻혀있는 유해(13만 여위)를 발굴하는데 박차를 가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유해발굴감식단에서는 행사 한 달전부터 참전용사를 방문 면담하여, 전투에 직접 참여했고 유해매장 관련 증언이 가능한 분으로 70명을 선정하여 한 자리에 모시고, 전쟁 당시 소속된 사단 및 지역별로 5개 그룹화한 후 전사지도를 비치한 독립된 공간에서 유해매장 예상지역에 대한 증언을 촬영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블루 스크린 앞에 앉아 전쟁 당시 전사자가 발생했던 상황과 지역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지도를 짚어가며 



그 날 전우들을, 동지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지역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저는 6․25전쟁 당시 2사단 공병대대 소속 송종수(84세)이고 피의 저격능선 전투에 참전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적 전차 출현에 지휘관의 지시로 밤 12시 경 지뢰를 매설하던 중 적의 기습 공격으로 많은 전우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야간에다 비까지 내려 전사한 전우는 두고 눈에 보이는 중상자와 경상자만 싣고 후퇴를 했습니다. 금성천과 오성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삼각지대. 달빛에 비쳐 어렴풋이 보이던 전사한 전우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지금도 그때 두고 온 전우들이 보고 싶습니다.”


분명 지금도 그 지역에 전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겁니다.제가 살아있는 동안 유해발굴감식단에서 꼭 전우를 찾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저격능선 전투 : 1952년 중부전선의 김화(현재 철원군 김화읍 주변)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2사단이 중공군 제15군에 맞서,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기지를 빼앗기 위해 공방전을 벌인 전투로 결국 국군 2사단은 6주간의 장기전으로 저격능선 방어에 성공한 전투


저는 5사단 27연대 소속으로 가칠봉 전투에 참전했던 김방우(84세)입니다. 지휘관이 향후 작전을 위해서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고지라고 수차례 강조했습니다. 치열했던 전투였던 만큼 아군과 적군의 시체가 혼재되어 구분하는 것 조차 쉽지 않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미처 수습하지 못한 전우들의 유해를 해금강 건너 골짜기에서 집단 화장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바치신 분들인데 국가가 그분들을 꼭 모셔와야지요.


    * 가칠봉 전투(1951.9.4.~10.14) :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목적으로 양구 북방의 가칠봉 일대에 국군 5사단을 투입하여 고지를 점령하게 한 작전으로 북괴군 27사단과 12사단을 투입해 반격에 나섰으나 40여일의 격전 끝에 결국 한국군의 승리로 끝이나면서 펀치볼 지역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전투



유해발굴감식단원들이 증언을 위해 카메라 앞에 앉은 참전용사분들에게 

"선배님, 당시 소속과 성함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리고 전사자들이 누워 있었거나, 화장이나 가매장을 한 지역이 어디였는지, 그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를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라고 말하자, 


아주 힘 있는 목소리로  

"1950년에 육군 00사단 00연대(대대) 소속, 000입니다......"

모든 어르신들께서 어깨를 쭉 펴며 60년이나 지난 군 소속을 또렷하게 밝히시는 모습은 감탄스러웠습니다.  


또 참전용사 어르신이 유해발굴감식단원이 본인과 같은 부대에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선배님~후배~하면서 부대의 임무와 역할에 대한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서는 요즘의 현역과 예비군의 만남과는 또 다른 끈끈함이 느껴졌습니다.    


증언을 하기위해 당시 소속 부대의 기록, 전투의 기록을 가져오신 참전용사 분도 계셨습니다. 


전투 참여 기록을 직접 책자로 만들어 가져오신 참전용사분의 뒷모습을 살짝 담았습니다. 

고 구겨진 종이, 주름지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 하얀 머리카락, 거친 숨에서 지나오신 세월이 느껴졌는데요.  

이 뒷모습에서 우리 할아버지 같으시네..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눈물이 핑... 



이 모습들을 보지 못했다면 아마 저는 이 분들을 그냥 동네 할아버지처럼 생각하며 무감하게 지나치고, 그저 어르신이라는 생각만 했을 겁니다. 그런데 60여년 전에 근무했던 부대이야기, 생생한 전쟁 상황을 힘주어 말씀하시고 죽어간 전우를 언급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시는 모습을 직접 보고나니 이 분들이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해야할 분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지내온 시간들이 부끄러웠습니다.   


동시에 이 분들이 연로해지시고, 기억이 흐려져가는 것처럼 우리도... 겪어보지 못했단 이유로 우리 역사를 교과서에서 배운, 시험에 나온 그 것! 쯤으로 치부하며 살아온 건 아니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저와 같이 생각하셨나요?? 


겪은 적 없고 책으로만 배운 내용을, 겪은 사람만큼 이해하거나 공감하기는 당연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 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정말 6.25 전쟁은 책과 자료에서만 존재하는 '역사'가 되어버립니다. 살아계시는 동안 존경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노력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된 소중한 현장취재 경험이었습니다. 


국방부와 유해발굴감식단은 이 날 증언 청취를 발판으로 우리 군 지역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 북한지역에서 벌어진 전투 기록까지도 기록해 마지막 한 분의 호국용사님까지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모셔드릴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예정입니다. 


올해 계획된 총 3회의 증언청취가 마무리 되면 900분량의 영상과 증언록을 제작하고, 증언이 나온 지역에 대한 현장실사와 검토를 통해 적극적인 유해발굴을 추진하겠습니다. 


그리고 발굴된 유해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유가족 유전자(DNA) 시료 채취, 전사자 유해소재 제보 등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현장 취재를 마무리 하면서 살펴 본 유해발굴 사진과 유품 전시를 소개합니다. 


6.25전쟁 개관, 유해발굴 사업소개도 있고, 


면도기, 담배파이프 등의 유품들이 있습니다. 


누구의 주머니에 꽂혀있던 만년필일까요? 

누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갖고 있던 라이터였을까요? 


이 계급장의 주인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까요?


깨진 철모가 가슴을 철렁하게 합니다.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겨누고 발사되었던 무기겠지요...



유해발굴감식단은 이렇게 선배님들을 찾아냅니다. 

신발을 신고 있고, 품에는 유품이 가득합니다.. 



선배님들, 저희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렇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신 분들도 계시지만, 

아직도 13만 여위나 우리 한반도 땅에 어딘가에 누워계십니다. 


유해발굴사업이 잘 추진되어 하루 빨리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시길 기원합니다.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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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비의 군모닝] 132화 곰신과 군화가 함께 보내는 외박!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라!!

2화 다짐 ( 눈물의 초코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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